어리바리 2종세트를 또 찍었지만

아름다운 우리말, <기픈>을 사랑했네(266)

by 봄비전재복

[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곶 됴코 여름 하나니

샘이 기픈 므른 가말에 아니 그츨쌔 내히 이러 바랄에 가나니 ]


아름다운 우리 말 우리 글로 지은 최초의 노래(歌辭) 용비어천가 2장이다.

여기에 근거를 두고 <기픈시>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매년 주제를 달리하여 테마시를 써온 지가 어느덧 28년, 2025년 연말에 스물일곱 번째 동인지를 발간하고, 자축하는 출판기념 세미나를 엊그제 전남 무안의 바닷가 마을에서 가졌다.

세월의 흐름을 거스리지 못해 이런저런 사정으로 빠지고 참석한 인원은 많지 않았으나 소수의 정예부대라는 자긍심을 가져도 된다는 원로시인 이향아교수님의 격려말씀에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미수에 이른 연세임에도 변함없는 열정으로 후배들을 이끌어 주시는 이향아시인님이 계셔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나는 이번 1박 2일 짧은 여행에도 어리바리 2종세트를 보태고 말았다.

적당히, 그럭저럭, 그만하면 되었지 뭘 더? 그냥... 내가 근래에 자주 둘러치는 생각의 울타리이다.

고심하고, 재어보고, 꼼꼼히, 한 번 더 확인하기는 젊은 날 나를 옭조이던 보이지 않는 끈이었다.

그러나 칠십 중반을 훌쩍 뛰어넘고 보니 바쁠 것도 없고 조일 것도 없다. 느슨하게 풀어놓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살아보니 이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긴장을 풀어놓고 사니 웃기는 장면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코 앞에서 시간을 놓쳐 당황하거나, 조금만 익숙지 않은 곳에서는 곧잘 길을 잃고 헤맨다거나, 암튼 어리바리한 행동으로 치매전조 증상인가 싶어 때로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그 또한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는다.

흐르는 데로 흘러가면 될 일이지 어쩌면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을 앞당겨 끌어다가 근심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근심은 관심의 다른 표현일 지도 모른다. 무슨 일엔가 마음이 꽂혀 이루려 애쓰는 것도, 타인의 관심에서 멀어질까 조바심치는 일도 내 안에서 일어나는 근심의 근원이지 싶다.

나이를 먹고 보니 세상 돌아가는 일이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든 그저 둥글게 묻어서 흘러감이 좋다. 앞장서 이끌고 갈 깜냥이 안되니 한 발 뒤에서 어울려 따라감이 좋고, 주인공보다는 배경이 되어 조화를 이루는 일이 더욱 좋다. 그저 오늘 누리는 만큼의 평안이면 족하고 오늘 받은 만큼의 사랑이면 과분하고 감사하다.

언젠가 남루한 이 생의 껍질을 벗어두고 떠나는 날, 미련도 애착도 남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가끔 엉뚱하고 어리바리한 짓을 저지르고도 감추거나 숨기지 않고 기꺼이 웃음거리가 된 나를 공개한다.

허술한 나를 드러내어 듣는 이에게 웃음 한 꼭지 선사하고 긴장을 풀어준다면 그 또한 보시가 아니겠는가!


이번 남도여행 첫날, 서울과 수원에서, 군산과 광주에서 오는 사람들이 광주 종합터미널에서 일단 만나기로 했다.

그곳에서 점심을 먹고 렌터카를 이용해 무안 바닷가의 펜션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교수님을 모시고 내려온 정란희 총무가 책이며 저녁에 먹을 간식거리까지 챙겨 오느라 짐이 무거웠다. 나는 짐가방 중 하나인 녹색 가방 하나를 챙겨 들었다.

우리는 유스퀘어 광장을 가로질러 건너편으로 이동하기 위해 터미널 바깥쪽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다. 렌터카가 있는 곳까지 가려면 엘베를 타고 내려가 지하도를 건너야만 했다.

어깨엔 작은 가방을 사선으로 메고 양손에 짐가방을 들고 긴 우산까지 들었으니 무게보다는 걸리적거리고 행동이 자유스럽지 않았다. 파스를 붙인 어깨도 살짝 부담이 되고, 허리와 무릎도 젊지 않으니 쉽지 않았다.

엘베를 타기 직전 약간 돌출된 턱에 사각녹색가방을 잠깐 내려놓고 그 위에 내 짐가방을 올려놓았다. 금방 엘베가 도착하여 우리는 서둘러 엘베를 타고 내려가 지하도를 지나서 건너편 지상으로 올라갔다. 렌트한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 트렁크에 짐가방들을 실으려는데

"어머, 녹색가방!" 정신이 퍼뜩 들었다.

우산과 내 가방만 손에 들려 있고 녹색가방이 없었다.

어디에 두고 왔는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는 짐도 내려놓지 않고 정신없이 뒤돌아서 왔던 길을 되짚어갔다.

광주의 함진원시인이 뒤따라 달려왔다. 엘베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 지하도를 건너 터미널 건물 안으로, 점심을 먹었던 식당으로, 분실물 신고를 하라는 식당주인 말대로 매포소에도 들르고, 함시인은 112에도 신고하고 정신없이 나댔으나 가방은 없었다.

가방 안에 떡과 과일 등 간식거리만 들었으니 그냥 차 있는 곳으로 돌아오라는 란희총무의 전화가 있었지만 그래도 행여나 두리번거리며 엘베 타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저 멀리 녹색가방이 보였다. 눈이 번쩍했다. 함시인과 나는 땀에 젖은 채 달려가 가방을 찾아들었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내 손에는 차에 내려놓지 못한 가방과 우산이 여전히 들려 있고 등은 땀에 젖었다

"가방이나 차에 내려놓고 오지 그걸 왜 들고 다녀요?" 함시인이 내 모습을 보고 그제야 웃어댔다.


긴장이 풀렸던지 무안 바닷가 펜션으로 이동하는 동안 도란도란 이야기소리를 들으며 나는 까무룩 잠에 빠졌다.


숙소에 짐을 풀고 <시인과 주방장>

이라는 젊은 시인이 운영하는 장소로 옮겨갔다. 카페와 식당과 공연장과 전시장을 겸한 청년들의 문화공간이었다.

교수님의 제자인 젊은 교수 한 분도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인인 쥔장(김을현시인)은 우리의 시낭송을 위해 미리 영상을 만들어 화면에 띄워주는 성의를 보여주었다.

화기애애한 가운데 맛있는 요리와 식사를 즐기며 삶을 얘기하고, 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숙소로 돌아와 다시 우리끼리 앉아 쌓인 이야기도 하고, 이번 동인지에 실린 작품을 낭독하며 시의 배경이 된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 동인지의 주제는 <아들>이어서 저마다 가슴에 담아둔 어미의 사랑을 꺼내 들었다.

기쁨이고 희망이고 자랑인 나의 분신, 어찌 좋은 날만 있었으랴! 때로는 비바람과 태풍 같은 아픔과도 만났다.


나는 3.1절 107주년 기념행사 때문에 다음 날 아침 일찍 군산으로 돌아가게 됨을 알리고 양해를 구했다. 고맙게도 총무인 정란희 시인이 무안 터미널까지 태워다 주기로 했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지만 뒤척이느라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새벽 6시도 못 되어 살그머니 일어나 화장실로 향하는데 란희시인도 깨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 깨우지 않으려고 고양이 걸음을 하는데도 다들 깨어서 나를 배웅해 주셨다.

심지어 이향아교수님께서는 기어이 무안터미널까지 따라오셔서 배웅해 주셨다. 오경심선생님도 함께.

가시거리가 20m도 채 되지 않는 짙은 안갯속을 운전하느라 란희시인이 너무 수고가 많았다.

무안의 무자가 안개무(霧)인지 무안엔 안개가 많다고 한다. 무안공항 비행기참사가 언뜻 머릿속을 스쳐갔다.


광주유스퀘어까지 50분 정도 걸린다니, 여유롭게 앞 좌석에 앉아 잠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침에 찍은 사진을 둘러보고 먼저 떠나서 미안하고 고맙다는 인사말을 써 내려갔다.

얼마큼 가다가 버스가 멈춰서 보니, 몇 사람이 내렸다.

벌써 다 왔나? 나는 휴대폰을 급히 닫고 사람들을 따라 내렸다. 기사님에게 수고하셨다는 인사까지 하고.

그런데 내려서 보니 번잡한 광주터미널이 아니었다. 두리번거리다 어떤 남자에게 "여기가 광주유스퀘어 아닌가요?" 물었더니

"여기는 함평인데요." 한다.

대여섯 대가 서있는 버스를 빠르게 훑어보며 내가 내렸던 버스(정신이 없어서 그게 맞는지도 알 없었다.)를 찾아 발을 디밀고

"이거 유스퀘어 가는 거 맞나요?" 했더니 맞다고 타라고 했다. 아마도 기사양반이 목적지도 아닌데 부라 부랴 내려서 두리번거리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놓칠 뻔한 광주행 버스를 다시 타고 종합터미널에 도착하여 1시간을 더 기다린 끝에 군산행 버스를 탔다.

함평에서 내렸다는 이야기를 기픈시 단톡방에 올렸더니 무안과 함평사이는 겨우 한 정거장 거리였단다.(안 봤지만 숙소에 있던 사람들 배꼽을 쥐고 웃었을 것이다.)


드디어 오늘, 1919년 3월 1일 그날의 함성을 재현하고, 목숨 바쳐 독립만세를 외쳤던 3.1 운동 107주년 기념행사에서 우리 시낭송예술원회원들은 한 달 동안 연습했던 재현극 <3ㆍ5만세, 그날 우리는 봄이 되었다>을 무대에 올렸다.

*1919년 3월 5일, 군산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시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뜨겁게 저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