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첫 번째 10km 마라톤 대회가 남긴 것

by CJbenitora


나에게 달리기는 중고등학교 체력측정시간에 친구들과 우르르 운동장 5바퀴를 뛰어야 했던 오래 달리기나 군대에서 대대원들과 아침마다 웃통을 벗고 뛰던 구보가 전부였다. 몸을 움직여 운동하는 것이 습관에 없던 나는 달리기와도 당연히 맞지 않았다.


대학교 2학년 가을 축제 기간에 그 전 축제 때도 그래 왔듯이 영화동아리에서 밤새 틀어주는 영화를 보았다. 자다 깨다 비몽사몽으로 날밤을 새고 햇살 속에 다시 서니 어질어질했다. 아침과 점심 사이 어설픈 시간이라 출출했다. 마침 기숙사 가는 길에 학생들이 음식을 팔려고 간이 점포를 만들어 놓은 곳이 있었다. 점심식사 준비를 일찍 마친 점포가 있어 그곳에서 맛있어 보이는 음식 몇 가지를 샀다. 음식을 싼 비닐봉지를 들고 기숙사 방으로 향하는데 모퉁이에 포스터가 보였다. 대학교 총학생회 주최 단거리 마라톤 포스터였다. 3일간의 축제 마지막 날 오후에 진행되는 마라톤은 참가비가 없었다.

'오늘이 축제 이틀 째니까 마라톤은 내일이구나!'

그냥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기숙사 방으로 들어갔다. 음식이 든 비닐봉지를 푸는데 왜 인지는 모르겠으나 군대 가기 전 마지막 축제인데 한번 뛰어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가 지났다. 마라톤에 참가하고자 하는 학생들은 시간 맞춰 학교 정문으로 모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모인 인원이 남녀 합쳐 100명은 되었다. 어제 흐리멍덩한 눈으로 포스터를 보던 나도 그중에 한 명이었다. 마라톤은 성별에 따라 코스가 달랐는데 여자들은 5km, 남자들은 10km였다. 서로의 출발시간 역시 달랐다. 남자들의 경우 남송리에 있는 학교에서 흥해읍내 입구까지 나있는 아스팔트 길과 콘크리트길이 혼재된 시골길을 뛰는 코스였다. 출발 전 총학생회에서는 급수대 위치와 반환점 위치를 꼼꼼히 설명해주었다. 결승선에 들어오는 순서대로 1등부터 5등까지는 상품이 있다고도 얘기했다. 언감생심 상품에 관심을 둘 실력이 아니었고 달리기 연습을 한 것도 아니었기에 상품 설명을 귓등으로 흘렸다. 설렁설렁 뛸 생각으로 무리 중간에 서 있었다. 여자들이 먼저 출발하고 10분 뒤 남자 경기의 출발 신호가 울리자 무리 속에 섞여 달려 나갔다.


흥해읍내까지 가는 길은 평소에 학교버스로 다녀보았고 자전거로도 다녀보아 익숙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페이스를 유지하기로 했다. 중간그룹에 속해 앞사람만 보며 쳐지지만 않게 달리자고 마음먹었다. 익어가는 노란 벼이삭을 곁눈질로 훑어보면서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방구석에 누워있었을 나를 떠올렸다. 오랜만에 몸에 도는 활력은 10km의 거리쯤은 아무것도 아닐 것 같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그 상태로 2km까지 빠른 페이스를 유지하였다.


3km를 넘어가자 뛰는 속도가 줄었다. 호흡이 점점 달려왔다. 얼마 안 가 햇볕에 머리가 뜨거워지면서 급속히 피로해졌고 심장은 쿵쿵대었다. 내 앞의 선두그룹을 따라가기는커녕 뒤에서 하나씩 나를 추월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아직 반환점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데 남자 1등은 반환점을 돌아 나왔는지 다시 학교 쪽으로 뛰며 나와 엇갈리고 있었다. 1등인 학생은 내 동기였는데 키가 훤칠했고 평소에도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와 농구를 자주 하던 친구였다. 친구는 흐트러지지 않은 달리기 자세를 유지하며 나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런 친구를 보며 이 시합을 위해 준비된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나의 속도는 걷는 것인지 뛰는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자세가 흐트러졌다. 1등이 돌아 나왔으니 얼마 안 가면 반환점일 것이라는 희망 하나를 붙잡고 뛰었다. 조금 더 가니 급수대가 나왔다. 생수를 하나 집어 물 한 모금을 입에 머금은 후 나머지는 머리에 들이부었다. 달아올랐던 머리가 식으니 살만했다. 급수대에 서있던 학우가 바로 요 앞이 반환점이니 힘내라고 소리쳤다. 그 한마디에 힘이 났다. 실제로 반환점은 얼마 안 가서 나왔고 반환점 앞에 모여서 응원하는 총학생회 사람들은 손을 내밀어 하이파이브를 해 주었다.


'응원의 힘이 이런 것이었나?'

풀리던 다리의 힘이 다시 들어갔다. 몸을 꼿꼿이 세웠다. 앞서 뛰는 학생들을 보면서 하나씩 따라잡아보기로 했다. 6km를 지나자 시작부터 나보다 한참 빨리 달리던 학생 하나가 길가에 주저앉아있었다. 앉은 그를 스쳐 지나가면서 뛰는 게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로만 듣던 러너스 하이(runner’s high)가 이런 느낌이 아닐까'

여전히 몸은 힘들었지만 걸어가고 있던 학생 하나를 제치고 힘겹게 뛰는 학생 하나를 제칠 때마다 아무 목적 없는 순수한 즐거움이 느껴졌다.


8km가 넘어가자 학교가 보였다. 우리 학교는 아래 도로에서 정문까지가 꽤 높은 경사로였다. 지금 뛰고 있는 평지는 그렇다 쳐도 정문까지의 오르막을 뛸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내 앞에서 뛰는 사람이 한 명 보였다.

'그래, 욕심내지 말고 저 사람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자!'

어차피 나는 연습 한번 해 보지 않고 달린 사람이었다. 꽤 오래전부터 공지되었던 마라톤 시합을 위해 최소 며칠 전부터 조깅을 하며 연습한 친구들과 같아질 순 없는 것이었다.


오르막에 발을 내딛자마자 속도는 절반으로 줄었다. 걷는 것과 진배없는 이 속도라면 그냥 걷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걷는다면 다시는 뛰는 자세로 변경할 수 없으니 그대로 뛰라는 생각이 걷고자 하는 본능을 막았다. 체력이 방전되어 있으니 몸은 관성대로 뛰고 있지만 정신은 수만 가지 생각으로 복잡했다. 앞에 가는 한 사람은 간간히 뒤를 돌아보며 무거워 보이는 다리로 뛰고 있었다.

'이제 결승선이 코 앞이니 따라잡는 것은 어렵겠군.'

속으로 이 사람은 못 따라잡겠다는 포기 선언을 하며 남은 거리를 재고 있을 때 심장 한가운데서 무언가가 치고 올라왔다.


'이대로 마지막 목표를 포기할 거니? 진짜 체력이 하나도 없어?'

생각해보면 이뤄지면 이뤄지는 것이고 아님 말고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정했지만 목표는 목표였다. 체력 역시도 기숙사까지 걸어갈 힘, 친구와 대화할 힘은 분명히 아껴두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심장이 던지는 질문에 폭발적인 스퍼트로 답을 했다. 앞서가던 학생은 갑자기 무섭게 달려오는 나를 흘낏하더니 힘을 내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체력은 이미 바닥인지 나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앞서 있던 마지막 그 학생을 제치고 결승선 테이프를 먼저 끊었다. 승리를 확인하고는 다리에 힘이 풀려버리고 말았다. 결승선 너머에 있던 운영진들은 주저앉은 나에게 물을 가져다주었으며 등수 도장을 팔에 찍어주었다. 5등이었다.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은 학생들이 하나씩 결승선으로 들어왔다. 그들을 기다리며 쉬고 있으니 체력이 서서히 회복되었다. 사전에 공지되었던 마라톤을 마칠 시간이 되었다. 수상자들은 앞으로 오라는 안내가 나왔다. 앞으로 나갔다. 1등은 아까 여유롭게 앞서가던 동기 친구였고 2등부터 4등까지는 내가 목표로 삼을 수 없을 만큼 앞서있던 사람들이었다. 5등을 호명하여 나가니 도서상품권 1만 원 권을 10장이나 주었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상품에 속으로 놀랐다.

'처음부터 도서상품권을 목표로 뛰었다면 내가 5등을 할 수 있었을까?'

단언컨대 못 했을 것이다. 자기의 한계를 알고 힘닿는 한도 내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나씩 해온 것 즉, 앞서 가는 한 사람씩을 추월했던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상품권을 받고 아까 대기하던 자리로 돌아왔다. 옆에는 마지막에 내게 추월당했던 6등 학생이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마지막에 제가 조금 먼저 들어와서 상품을 받긴 했지만 님도 상품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네요. 제가 받은 도서상품권 10장 중에 절반을 드릴게요. 잘 쓰세요."

그는 진짜 받아도 되냐며 되묻고는 고맙다며 인사했다. 도서상품권에 미련을 갖지 않고 선의의 경쟁자와 나눈 것이 뿌듯했다.


마라톤 행사가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오면서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나누고 남은 5만 원의 도서상품권은 후에 필요한 책을 사는데 잘 쓰겠지만 정작 나의 자랑스러움은 상품에 있지 않았다. 자랑스러움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목표를 다잡았고 끝내 이뤘다는 성취가 나를 가득 채웠기에 오는 것이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