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만든 게으른 일상과의 나만의 작별 법

by CJbenitora

2020년 1월 19일 중국 우한에서 발생하여 당시 ‘우한 폐렴’이라고 불리던 코로나19의 확진자가 국내에서 처음 발생했다. 우한에서 국내로 입국하려던 중국 여성에게서 코로나 증상이 발현된 이날 하루 천 건 내외였던 국내 인터넷 사이트의 ‘폐렴’ 검색량이 1월 27일에는 6만 5천 건이 넘어갔다.


코로나19 발생 후 1개월 간 확진자가 꾸준히 증가하였지만 30명을 넘지 않는 수준이었기에 그 와중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2015년 메르스 사태처럼 ‘정부 주도의 방역으로 금세 사그라지지 않을까’라는 긍정적 추측을 하였다. 당시 주변에서 대학원 동기 한 분이 마스크를 몇 천 개 단위로 구매할 수 있는 방법을 수소문을 하며 다녔지만 그저 남의 일이었다.


2월 18일 코로나 증세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던 31번째 확진자가 대구 지역 모 종교단체 예배에 참석하면서 코로나19의 감염자는 몇 천명 단위로 빠르게 증가하였다. 3월부터는 국내뿐 아니라 유럽과 북미를 포함하는 서구권에서도 코로나19의 감염자가 급증하였다. 감염을 염려한 사람들의 마스크 사재기가 시작되었고 3월 9일 대한민국 정부는 마스크 공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공적 마스크 제도를 시행하였다.


이제 외부 활동을 할 때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은 개념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아침마다 약국 앞에는 공적 마스크를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있는 풍경이 일상이 되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2019년부터 프리랜서로 경영컨설팅을 주업으로 하던 나도 코로나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와이프가 노인복지 관련 직장에 다니고 있기에 기업을 방문하고 사람을 만나는 업무에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몸을 사리다 보니 서서히 일감이 줄어들었다.


가뭄에 콩 나듯 본업인 컨설팅이나 심사평가 의뢰가 들어왔다. 이전 같으면 신나서 갈 일인데도 시간을 뺏는 귀찮은 일처럼 느껴졌다. 부산, 대구는 물론 거창, 봉화, 세종, 서울과 같이 동선이 멀거나 시간이 많이 걸리는 곳까지 가서는 같이 심사를 한 위원님들과 식사 한 끼 하고 올 수 없던 현실도 발을 떼고 싶지 않게 했다. 길을 다니면서 배고프다고 뭘 사서 들고 먹을 수 없었고 음료수를 홀짝거릴 수도 없었다. 코로나 19는 생활에서 당연시되던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앗아갔다.


절반은 어쩔 수 없이 절반은 스스로 의도한 집콕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집에서 대부분을 보내야 하는 생활은 그간 못한 것을 마음껏 할 기회였다. 벌이는 와이프에게 맡긴 채 하루 종일 책을 읽거나 인터넷 검색을 하거나 컴퓨터 게임을 할 수 있었다. 아이 어린이집 등 하원만 시간에 맞춰해 주면 되었다. 금전에 일희일비하지 않아도 되고 타인에게 에너지를 소비할 필요 없는 단순하고 자유로운 생활이 이어졌다.


집에서의 생활이 해를 넘어갔다. 싸늘했던 대지가 녹고 햇볕은 다시 따스하게 내리쬐었다. 집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익숙해졌다. 익숙해지면 찾아오는 것이 권태였다. 마음대로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도 권태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권태는 일상에서 보람을 뺏어갔다.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만 온전히 소비되는 시간은 따분함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지루함이 자리 잡은 일상 속의 유일하게 남에게 내세울 것은 "육아를 하고 있으니까 이런 생활도 괜찮아"라는 생각이었다. 이것은 나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었지만 사실 아이는 혼자서도 잘 크고 있었다.


코로나19 전에는 매일 읽던 책은 한 달에 한 권이나 읽으면 다행이었다. 구독하고 있는 유튜브 채널은 한 손에 꼽힐 정도였는데 1년 만에 50개가 훌쩍 넘었다. 자주 하는 액션 게임 속 전사 캐릭터는 만렙이었고 입고 있는 장비는 호화 찬란했다. 게임 조작을 할 때 현란한 기술이라도 쓰면 프로게이머가 된 듯 뿌듯하였다. 현실의 내가 새로운 것과 거리를 두고 반복되는 일상에 매몰된 반면 가상의 나는 눈이 부시게 잘 나갔다.


‘1년 전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5번의 시도 끝에 4명이서 덤벼도 이기기 어렵다는 용 한 마리를 땅에 눕혀놓고 창밖에 비치는 봄 풍경을 보며 갑자기 떠오른 물음이었다. ‘나는 은퇴한 것이 아닌데 은퇴한 사람들보다 더 여유롭고 태평하구나’ 의도이든 아니든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은 내가 벌써부터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각이 들었을 때 뭐든 지금과는 다른 걸 시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놀면서 짬짬이 정신이 돌아올 때 다이어리에 적어 두었던 좋은 문구들이 떠올랐다. 즉시 책상 맡에 큰 글씨로 그 문구들을 적어 붙였다.


“누구나 늙는다. 누구나 병에 걸린다. 누구나 죽는다. 시간은 계속 흐른다.”


언제부터인가 서랍 속에서 잠만 자고 있던 버킷리스트도 꺼내 들었다. 여러 가지 할 일들이 적힌 가운데에서 당장 마음이 가는 일 하나를 골랐다.


블로그 개설하기. 평소에도 매일 할 일을 다이어리에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날마다 어떤 생각을 했는지, 뭘 깨닫고 배웠는지는 적지 못하고 있었다. 상념들을 그냥 떠나보내는 게 늘 아쉬웠다. 시간을 조금 들여서라도 글을 써보기로 했다. 블로그는 어떤 것이라도 자유롭게 올릴 수 있는 매체이니 주제를 가리지 않고 매일 올려보기로 하였다. 당장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하고픈 마음이 없다면 내가 어떤 걸 관심 있어하고 무엇을 배우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라도 갈무리하기로 하였다.


포털사이트에 블로그를 하나 개설하고 2021년 3월 10일부터 기록을 시작했다. 오늘자 뉴스의 시사점부터 재밌었던 게임에 대한 리뷰, 라디오에서 듣고 필이 꽂혔던 노래, 읽은 책에 대한 평가 등 잡다한 생각들을 쌓아갔다. 짧은 포스팅이지만 매일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가깝든 멀든 출장이라도 가면 며칠씩 빠졌다. 쓰기 싫어 미루고 미루다 한 번에 포스팅을 하느라 하루 종일 매달리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포스팅에도 노하우가 생겼다. 내일 쓸 주제를 오늘 생각해서 임시저장을 해 두는 것이다. 생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면 무엇을 할지부터 한참 고민해야 하지만 주제라도 정해져 있으면 어떻게 풀어낼지만 생각하고 적으면 되니 시간이 훨씬 적게 걸렸다. 이런 방식으로 블로그를 쓰면서 다시 1년이 흘렀다.


2022년이 되어서도 코로나19는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3월 16일을 기준으로 하루 확진자가 621,328명이 발생할 만큼 절정을 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바깥 상황과는 반대로 나의 집콕 생활은 새로운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블로그에는 어느새 390개에 달하는 포스트가 생겼다. 매일 업로드하기로 한 나와의 약속을 지킨 것만으로도 성취감이 있었다. 블로그 이외에도 좋은 소식이 들려왔고 자신감이 되살아 났다. 첫째와 6살 터울의 둘째가 태어났고 근 2년간 손을 놓고 있던 학술 논문도 마무리 단계가 되었다. 게임은 주말에만 하기로 하였고 평일 낮시간은 자기 계발에 쓰기로 했다. 글쓰기 수업에 참여하기로 하였고 글쓰기를 시작했다.


지난 2년은 컨설턴트로서의 나에게는 힘든 시간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매사 조심을 하여도 다른 사람을 통한 감염은 늘 우려되었다. 일이 끊겼으며 벌이는 시원찮았다. 남편이나 아빠로서의 나에게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만드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한 개인으로서 나에게는 사람이 얼마나 게을러질 수 있는지, 한번 들인 습관은 얼마나 고치기 어려운지를 알게 하는 성찰의 시간이었다.


이제 코로나19가 일상화되고 감기 취급을 받으면서 운신의 폭이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그에 맞춰 계획 없이 보내던 시간들을 계획 속에 가둘 수 있게 되었다. 계획대로라면 학위과정을 올해 안에 끝낼 수 있을 것이다. 브런치를 통해 나만의 글이 꾸준히 쌓일 것이다. 첫째가 혼자 책을 읽게 될 것이고 둘째도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늘어난 업무 탓에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잘 배분해야 할 것이다.


코로나19는 사람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 변화가 서서히 진행되어서 처음에는 잘 모를 뿐, 시간이 쌓이면 일상생활 자체가 변해 있는 것이다. 집콕을 하며 핑계가 되었던 코로나19의 공포가 사라져 가는 이때, 핑계는 버리고 2년 전 싸매 놓았던 열정을 다시 꺼낸다. 양복을 차려입고 현관에 앉아 구두끈을 다시 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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