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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Jbenitora Aug 15. 2022

널널하게 일하면서 돈을 더 많이 버는 일자리는 있다

 직장에 갓 들어가서 받았던 임무는 케이블 방송의 밀린 계약 갱신 업무였다. 대형 공동주택인 아파트의 계약은 연륜이 있는 선배들이 처리하고 있어 문제가 없었는데 빌라나 원룸과 같은 소형 공동주택과 모텔과 여관 같은 숙박시설들은 계약들이 밀려있고 연체금도 많았다. 당장 여름이 가기 전에 처리하지 않으면 전부 민원이 되어 회사에 상당한 부담을 남길 여지가 있었다. 내가 속한 방송영업팀의 전원은 이 업무에 투입되었다. 직원들은 2인 1조로 남구 한조, 중구와 울주군 한조, 북구와 동구 한조 해서 총 3개 조로 나뉘었다. 일단 8월 한 달간 그간 밀린 계약들을 모두 정리하기로 했다. 나는 M선배와 한조로 남구를 담당하게 되었다. 


 M선배는 출근을 하면 그날 갈 건물들의 주소와 집주인의 연락처가 적힌 엑셀 파일을 출력해서 파일에 꽂았다. 재계약할 건물의 계약서를 작성하여 2부를 출력해서 또 파일에 꽃았다. 회사 직인을 절차대로 불출받아 도장밥과 함께 준비했다. 출발하기 전에 건물주인들과 미리 통화를 하는데 보통은 리스트의 절반도 전화를 안 받았다. 선배가 한번 보여준 이 절차는 다음날부터는 내가 맡아하게 되었다. 첫 직장생활이라 뭐든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절차를 일일이 적어두고 실수 없이 준비했다. 대학교 때 배워둔 컴퓨터 활용 능력 덕분에 선배가 1시간 걸리는 일은 나는 30분이면 할 수 있었다.


 계약을 하기 위해 회사를 나서면 8월의 무더위가 우리를 맞았다. 내 차를 마련하기 전이라 선배의 렉스턴을 같이 탔다. 선배는 대면 계약도 시범을 한번 보여주고는 그대로 하라며 나머지 계약을 전부 나에게 맡겼다. 계약서를 들고 약속한 시간과 장소에서 건물주와 만났다. 건물 안에 들어갈 것도 없이 밖에 서서 재계약 사항에 대해 설명을 한 뒤에 즉시 서명을 받고 회사 직인을 찍어 한 장은 건물주를 주고 한 장은 가져왔다. 당시만 해도 10세대가 사는 원룸이라고 하면 4세대는 공실로 빼주고 1세대 당 케이블 방송 시청료로 4,400원을 받았다. 이걸 재계약하면서 공실을 3세대로 바꾸고 1세대 당 시청료를 5,500원으로 올리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건물주는 계약의 갱신이 늦어지는 것에 삐죽거리더라도 갱신을 안 한 몇 개월간 다른 곳은 오른 요금을 받았는데 자신은 그대로를 유지했다는 사실에 민원을 걸지 않았다. 간혹 생기는 민원은 선배가 해주는 조언에 따라 대처했다. 다른 곳을 알아보고 연락하겠다고 하면 그렇게 하라고 하고, 재계약을 안 하겠다고 하면 방송 케이블을 빼 버렸다. 그 지역에 케이블 방송은 우리밖에 제공하지 않으니 소비자들에게 다른 선택사항은 없었다. 지역 내에 다른 케이블 방송이 하나 더 있었지만 둘 간에 기존의 건물들은 상호 건드리지 않는 모종의 약속이 있었다. 건물주가 다른 케이블 방송에 전화를 해도 설치가 안된다는 대답을 들을 뿐이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재계약은 이뤄졌다.


 우리 조의 계약은 순조로웠다. 하루 평균 4건의 계약을 쳐냈다. 그렇게 2주가 지나자 쉬엄쉬엄 진행해도 그 달의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M선배는 일에 숙달된 내가 준비를 마치고 차에 타면 운전수 역할만 했다. 선배는 차 안의 에어컨을 항상 최대로 틀어두었다. 내가 땡볕 속에서 계약을 하고 오는 동안 선배는 느긋하게 차에서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때 차 안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가 MC몽의 'I LOVE U OH THANK U'였다.


 하루치 재계약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것을 파일철 했다. 결재서류를 만들어 계약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다. 엑셀 파일과 회사 전산에도 빠짐없이 입력해두었다. 그러다 보면 퇴근 시간인 6시가 훌쩍 지나있었다. 정시퇴근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라 차라리 일이 있어서 늦게까지 남는 게 더 나았다. 선배는 어디서 뭘 하는지 보이지 않다가 내가 정리가 다 되어 가면 나타나 함께 퇴근했다.

 

 하루 4건을 넘게 계약을 하는 날에는 4건만 보고하고 나머지는 다음 날 못 할 것을 대비해 남겨뒀다. 선배는 갈수록 연락이 안 되거나 까칠한 건물주들만이 남기 때문에 계약 건수가 줄어들 수 있으니 꾸준한 실적 유지를 위해 남겨놔야 한다고 했다. 빨리 처리하고 다른 일도 손대고 싶은 나와는 달리 선배는 천성이 느긋했다. 선배에게 물었다.

"선배, 밀려있는 연체금도 받아내야 하고 정리안 된 옛날 파일들도 정리해야 하는데 재계약은 빨리 끝내 버리는 게 어떻습니까?"

"야, 천천히 해라. 우리가 너무 빨리 끝내면 다른 조들 일까지 받아서 해야 된다. 이 무더위에 외근 나와서 땡볕에서 힘들게 일하는데 월급도 얼마 안 된다 아니가. 쉬어가면서 해라."

"힘드니까 빨리 끝내자는 거지요. 여기 월급이 그렇게 적습니까?" 

"신입 월급이 뻔하지 나도 많이 못 버는데... 그래도 여기는 상반기 한번, 하반기 한번 총 2번 보너스 나오니까... 너는 7월 입사니까 올 하반기 보너스는 받을 수 있겠네."

"그렇습니까? 안 받아 봐서 모르겠지만 월급이 적다면 힘 빠지긴 하겠네요. 선배, 지금보다 더 널널하게 일하면서 돈은 더 많이 버는 일자리가 있을까요?"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하나, 여기보다 더 편하면서 돈 더 주는데 천지다. 니 하고 싶은 거 있으면 지금이라도 더 찾아봐라."

"아니에요. 지금 일도 충분히 재밌습니다. 덥고 힘들어서 해본 소립니다."


 그날 이후에도 우리는 열심히 계약을 하러 다녔다. 조금 달라진 건 선배가 계약 중간중간 시간이 좀 나면 시원한 차 안에서 낮잠 좀 자두라고 말하기도 하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자고 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비 오는 날에는 멀리 있는 이름 있는 식당에서 맛난 음식을 사주기도 하였다.


 우리 조는 목표한 한 달 안에 맡았던 밀린 계약을 모두 해결하였다. 다른 조들도 우리 조를 보고 속도를 낸 덕에 모두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급한 불이었던 소형 공동주택과 숙박업체의 밀린 계약을 마치자 M선배는 원래 그가 맡던 대형 공동주택 관리 업무로 돌아갔다. 이때 마침 아버지께서 그랜저를 사시면서 기존에 타던 에스페로를 물려주시어 내 차가 생겼다. 그 덕에 직장 생활 한 달 만에 혼자 외근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100건 가까운 계약을 통해 전화 응대하는 법, 고객을 대면하는 법, 문서를 적고 관리하는 법, 전산을 활용하는 법까지 회사의 시스템을 모두 숙달하였기에 온전히 홀로 서기를 하게 되었다.


 그 한 달간 외근 위주의 일은 힘들었고 막상 받아본 월급은 쥐꼬리만 했지만 내 존재가 회사의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보람이 있었다. 그때까지 살면서 느꼈던 즐거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지금 이 자리가 아니면 아무나 해보지 못할 일을 하는 것도 스스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 널널하게 일하면서 돈을 더 많이 버는 일은 보이지도 가까이에 있지도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 맡은 일에 충실하는 것이 현 상황에서 그 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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