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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바라보며 뛰었던 인생 세 번째 하프마라톤

포항해변마라톤

by CJbenitora

"너무 더웠습니다."

지난해와 지지난해의 포항해변마라톤 후기에서 가장 많이 찾아볼 수 있었던 말이었다.


후기도 후기지만 포항해변마라톤은 정말 뛸 생각이 없었다. 동네 마라톤 참가로도 운동을 위한 동기부여가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작년에 경주에서 열리는 마라톤에 참여한 것은 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차량으로 이동하면 40여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라 행정구역만 다르지 동네나 마찬가지였다. 1시간 이상을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마라톤 대회는 올해가 아니어도 실력을 충분히 올리고 참여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올해 포항해변마라톤 공지가 올라오자 1주일 고민하고 하프에 덜컥 신청해 버렸다. 신청을 해놓고 혼자 가기 싫어서 동생에게 연락을 넣었다.

"포항해변을 따라서 왕복하는 코스인데 오르막도 거의 없고 괜찮다 하더라."

"그래? 그럼 10km 뛸 거가?"

"아니, 하프 뛰려고, 아직 4개월 남았으니 천천히 연습해 보자!"

"알았다. 등록하고 카톡 줄게."

동생이 선뜻 오케이 한 덕에 걱정이 반이 되었다.


재작년에 처음 하프마라톤 대회를 나갔을 때 하프마라톤은 일 년에 한 번만 하반기에 뛰고, 상반기는 10km만 뛴다고 계획을 세웠다. 작년에는 그 계획에 맞춰 상반기 10km 대회 2번, 하반기 11.2km 대회 1번, 하프 대회 1번을 나갔다.


올해 상반기도 10km 대회 2번, 5km 대회 1번 정도로 심플하게 구성하려다가 덜컥 하프마라톤 하나를 더 넣었다. 왜 뜬금없이 아무도 시키지도 않은 대회를 사서 고생하려고 신청을 하였느냐?

그 이유는 '긍정확언 외치기'에 있었다.


작년 6월부터 매일 외치고 있는 긍정확언의 가장 첫 문장은 "나는 꾸준한 달리기로 체력을 키워 하프마라톤을 2시간 내로 완주하였다."였다. 그렇게 외치기만 하고 별로 달라지지 않은 생활을 하다가 작년 10월 말부터 매일 달리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긍정확언의 가장 마지막 문장은 "나는 이 모든 것을 1년 안에 전부 이루었다."였기 때문이었다. 칼을 뽑았으니 썰어내든 못 해내든 무를 베어야 했다.


5월 이후에는 날씨가 너무 더워서 하프마라톤을 뛰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으니 4월 대회에서 긍정확언을 이뤄내야 했다.


눈 깜짝할 새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바람까지 지나가며 포항해변마라톤 날짜가 되었다. 동틀 녘에 동생과 만나서 포항종합운동장으로 이동했다. 8시 출발 시간을 1시간 앞두고 도착했더니 이미 운동장 주변 주차장은 차로 빽빽했다. 빙빙 돌다가 대로 건너편 동네 골목의 빈자리를 하나 찾아 주차를 했다. 대회 시작 20분 전이었다.


대회장으로 걸어가며 쌀쌀한 아침공기에 얼어붙은 몸을 풀었다. 매달 수령지와 탈의실, 물품보관대 위치를 확인하고 입고 온 겉옷을 벗어 맡겼다. 하프선수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는 출발선은 물론이고 우리의 출발을 지켜보는 10km와 5km 참가자들로 북새통이었다.


두 번의 하프 모두 2시간 23~24분대의 걷뛰 기록이라 이 기록을 돌파해야 했다. 매일 평균 5km를 뛰면서 매달 평균 마일리지가 150km를 넘었던 것이 4달째였다. 출발선에 설 때마다 '이제 죽었구나!' 소리가 절로 나오던 것과 달리 오늘 만큼은 기록을 앞당길 수 있다는 기대감도 두려움 옆에 같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5분 정도 줄 서 있다 보니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후미에서 천천히 속도를 올리며 출발하였다. 운동장을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강변에 접어들자 병목현상이 나타났다. 1km당 7분 정도의 속도로 달리니 주변 경관이 눈에 잘 들어왔다. 형산강 건너편 포스코 공장은 장난감 공장처럼 보였다. 주변에는 휴대폰을 셀카봉에 달고 영상을 찍는 유튜버, 거추장스럽지 않게 머리를 땋고 달리는 외국 여성, 허리는 좀 구부정하지만 일정한 속도를 내는 어르신 등 수많은 군상들이 각자의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첫 급수대는 2.5km 지점에 있었다. 막 시작해서 목이 마르지 않았지만 일단 종이컵을 집어 들었다. 5km부터 물을 마시며 식염포도당을 같이 먹기로 계획했는데 느닷없는 급수대로 인해 계획에 없는 물을 한 컵 마셨다. 그랬더니 출발 15분 전에 화장실을 갔음에도 다시 작은 볼일이 보고 싶어졌다. 같이 달리던 동생과 잠시 헤어져 주로 옆 송도해수욕장 화장실에 잠시 들렀다. 금방 볼일을 보고 나와서 동생을 따라잡았다. 이쯤 오니 주로가 넓어져서 앞서나갈 충분한 여유가 생겼고 몸도 가벼워졌기에 조금 빨리 뛰어보기로 했다. 지금 힘을 끝까지 가져갈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무리는 하지 않는 선에서 보폭을 짧게 유지하되 분당걸음수는 180까지 높였다. 5km 지점에서 식염포도당 2알을 먹으며 물 한잔을 마셨더니 뱃속에 물이 찰랑이는 느낌이 났다. 2.5km마다 급수는 물배 안고 달리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8km 표지판이 저 멀리 보이는 지점에서 맞은편에 하프 1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프의 총길이가 21km니까 선두그룹은 내가 8km를 뛸 동안 13km를 뛴 것이었다. 이후로 하프반환점이 있는 10km 언저리까지 맞은편의 사람들이 계속 늘어났다.


햇살은 따가웠지만 생각만큼 덥진 않았다. 힘이 들 때면 건너편 러너들과 파이팅을 주고받았다. 한동안 내가 추월하는 사람도 없고 나를 추월하는 사람도 없었다. 반환점이 가까워지자 복숭아향 에너지젤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매번 다른 러너들이 먹던 것을 보기만 하고 직접 먹은 적은 없었다. 2주 전 장거리 연습 때 동생이 챙겨준걸 오늘에야 드디어 먹는 것이었다. 하나를 까서 입에 넣고 쭉 짰다. 달콤함이 온 입안을 감싸는데 왜 급수대를 얼마 안 남기고 먹으라는 지 알 수 있었다. 반환점 앞의 10km 급수대에서 물을 마시며 단맛을 삼키고 식염포도당은 1개만 꺼내 먹었다. 에너지젤과 함께 2알을 먹는 것은 과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왔던 길을 돌아가는 길, 속도가 점점 떨어졌다. 나를 앞서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체력이 떨어지니 추월을 막을 수 없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행동은 잠시라도 추월자들의 보폭과 리듬을 따라 해 보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좀 가다가 다시 느린 페이스로 복귀했다.

'이런 것이 다리가 잠긴다고 하는 것이구나!'


6km쯤 남겨놓은 지점인 오르막이 있는 다리에서는 걷는 사람이 좀 있었다. 앞서던 그들을 제치니 괜히 신이 났다. 4km쯤 남겨놓은 지점에서 10km 번호를 달고 걸어가는 참가자를 추월했다. 3km 남은 지점에서는 또 다른 10km 참가자인 엄마손을 잡고 가던 초등학생을 따라잡았다. 2km 남은 지점에서는 대여섯 명의 10km 참가자를 제쳤다.


이쯤 오니까 속도가 안나는 것은 물론이고 여기서 포기하고 저 사람들처럼 걷고 싶다는 생각이 올라왔다. 만약 여기서 걷는다면 뒤에 따라오는 무수한 러너들에게 지는 것은 물론이고 오늘 목표인 걷지 않고 뛰기는 물 건너가는 것이었다. 다리를 끌다시피 남은 거리를 달렸다. 경기장 입구가 보였다.

'이제 내부로 들어가면 한 바퀴 크게 돌고 골인이겠지.'

남은 힘을 체크해 보았다.

'그냥 이 속도로 끝까지 뛰어야겠는데... 너무 힘들어.'


입구를 지나며 경기장 안을 보았더니 골인 지점이 바로 100m 앞에 있었다. '아차! 거리계산을 잘 못했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마지막 질주를 하지 않는 것은 러너로서의 직무유기라던 한 러닝유튜브의 말이 떠올랐다. 힘이 솟아올랐다. 온 힘을 짜내어 전력질주를 하여 골인점을 지났다. 기록은 2시간 3분 21초였다.


완주자 배부 물품을 받고 짐을 찾았다. 잔디에 앉아서 멍한 정신과 굳어버린 몸을 풀고 있으니 동생이 도착했다. 동생과 같이 문자로 날아온 기록증을 캡처하여 가족들 단톡방에 결과를 공유했다. 동생과 서로의 달리기 썰을 풀며 휴식을 취하고 음료와 빵을 먹으니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포기했다면 맛볼 수 없는 행복이었다.


결국 이번 하프마라톤에서 긍정확언처럼 2시간 안에 들어오는 기록은 내지 못했다. 하지만 아직 1년이 되기에는 한 달 반이 남아있고 대회에서 증명은 하지 못하겠지만 꾸준히 5km를 달리다 보면 2시간 안에 들어올 체력을 가지게 될 것임을 알 수 있는 대회였다. 하반기 하프마라톤에서 2시간 돌파를 증명해 내기 위해 꾸준히 달려갈 것이다.


오늘 대회는 실패가 아니고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많은 도전 중에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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