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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Jbenitora Nov 16. 2022

지금 해야 할 일을 빼고 나머지는 다 재미있습니다

 누구나 해야 할 일을 미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 토익 시험이나 JLPT 시험을 접수해놓고 한참 놀다가 시험에 임박해서야 부랴부랴 문제집을 훑어보는 일은 일상에 가까웠다. 이제야 나이가 들어 그런 시험들이 큰 의미가 없지만 30대 초반까지는 그랬다.


 지금은 어떤가? 방 한구석에 던져놓은 빨래 개기, 쌓인 설거지, 장난감이 흩어져 있는 거실 바닥청소와 같은 일은 분명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인데 손에 잡히지 않는다. 

"조금 있다가 하자! 아이들 어린이집에 데리러 가기 전에만 하면 되지.'

이 생각으로 어린이집 하원 시간까지 미뤄둔다. 그러곤 책을 읽고 브런치에 접속하고 영어공부를 한다. 


 이것은 어떤 일에 갖다 붙여도 다 적용된다. 내가 브런치에 글을 올리려고 마음을 먹으면 브런치 글을 쓸 생각을 하지 않고 다른 짓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빨래 개기가 싫어서 하는 브런치 글쓰기는 재미있는데 글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시작하는 글쓰기는 재미가 없다. 신기하게도 무언가를 하려고 마음먹으면 세상에 그 일을 빼고 나머지 일들은 다 재미있다.


 최근에 대학원 졸업을 위해 학위 논문을 제출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날짜는 다가오는데 논문의 진도가 안 나갔다. 논문을 쓸 준비는 다 되어있었다. 연구모형과 가설은 몇 달 전에 이미 설정되어 있었다. 설문조사는 충분한 모수를 채워 진행하였고 통계 프로그램을 돌리기 위해 코딩까지 해 두었다. 선행조사 역시 방대한 양을 완료해 두어 해당 내용을 정리하여 글로만 풀면 되었다. 그런데 그 논문 글 쓰는 것이 하기가 싫었다. 어떻게든 글을 늦게 쓰려고 글쓰기 대신 그간 미뤄두던 빨래 개기, 설거지, 바닥청소를 하였다. 평소에는 그렇게 손에 잡히지 않던 일들이 왜 그렇게 재미있는지 후딱 집안 정리를 마무리했다. 그러고도 글쓰기 싫어 손톱을 깎고 이번 달에 개인적으로 지출한 금액을 엑셀에 정리하였다. 결국 그날도 그다음 날도 논문은 손을 대지 못했다. 머릿속에 논문을 어떻게 써야 할지가 들어 있었지만 손은 움직여 주지 않았다. 내일 쓰지, 주말에 쓰지 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가 흘러만 가고 있었다.


 교수님과 정한 데드라인이 임박했다. 논문 제출 신청서에 지도교수님 서명을 받아 학과 사무실에 제출하고 오니 논문 심사일이 얼마 남지 않음이 실감 났다. 마음이 급해졌다. 이제 더 이상 미루다 가는 올해 졸업은 물 건너간다는 긴박감이 전신에 돌기 시작했다. 새벽에 일어나 논문을 써나갔다. 오늘은 서론을 마무리하고 내일은 선행연구 정리를 마무리하고 모레는 통계 결과를 적는다는 단기 계획을 세워 그에 맞춰 글을 썼다. 주말에는 온전히 논문을 쓰기 위해 와이프에게 아이들과 처가나 본가에 가서 놀아 달라고 부탁했다. 와이프는 그동안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 논문은 안 쓰고 뭐했냐며 핀잔을 줬지만 이번 한 번만 그렇게 해달라는 나를 보며 마지못해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다. 


 그렇게 홀로 컴퓨터 앞에 앉아 논문을 쓰면서도 '조금 쉬다할까?' '토요일에 이 정도 했으니 그만하고 나머진 일요일에 할까?' 하는 생각과 싸웠다. 의자에 앉은 몸은 뒤틀리는데 논문은 어서 나를 완성하라며 재촉하고 있었다. 당장 일요일 저녁에 교수님께 메일을 보내야 하니 논문이 잘 쓰이지 않을 때는 대문 밖에 나가 잠시 걸으며 바깥공기를 쐬고 생각을 정리해 다시 자리에 앉는 정도의 딴짓만 허용되었다.


 토요일 저녁에 돌아온 아내는 일요일 아침에도 쫓겨나듯 아이들과 나갔다. 논문 쓰기를 게을리한 결과가 주말에 가족 간의 생이별로 돌아왔다. '이래서 사람들마다 학위 논문 말미에 가족에게 감사의 글을 적는 건가?' 피식 웃음이 났다.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빠르게 논문을 완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돌아오기로 한 시간이 되자 여차저차 논문의 내용이 완성되었다. 목차의 순서 맞추기와 교정 때문에 일요일 저녁에 보내기로 한 논문 파일은 월요일 새벽에야 교수님께 보낼 수 있었다.


 평소의 내가 그렇듯 많은 사람들이 지금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 경험 상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 중에 극소수만이 일을 미루지 않고 즉각 끝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우리 어머니가 그렇고 두 번째 직장에서 같이 일했던 직원 하나가 그랬다. 어느 날 그 직원에게 물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급한 거 아니면 내일 하면 안 돼?"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과장님, 전 일을 남겨놓고 집에 가면 일 생각 때문에 제대로 쉴 수 없더라고요. 얼마 안 남았으니 다 해놓고 가겠습니다."

 

 사람마다 기질이 다르고 스트레스받아하는 요인도 다 다르다. 어쩌면 나는 미리 해놓고 마음의 안녕을 찾는 것보다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구상을 다 해놓고 긴장 속에서 다른 것을 하는 것을 즐기는 타입일지 모르겠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가서 쏟아붓듯 일을 마무리하고 뿌듯함을 느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다. 


 오늘은 컨설팅 마무리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 날이다. 보고서에 넣은 자료는 컴퓨터에 정리되어 있고 내용은 머릿속에 있지만 보고서는 아직 쓰지 않은 상황이다. 이 글을 읽은 여러분은 여기서 2가지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내가 지금 왜 브런치 글을 쓰고 있는지 그 이유이고 둘째는 그 보고서가 오늘 중에 완성될지 아닐지에 대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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