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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Jbenitora Sep 06. 2022

집에 TV가 없지만 책은 읽지 않습니다

 네 식구가 사는 집의 거실에는 TV가 없다. 보통 가정집에서 보이는 소파도 없다. 카펫을 깔아놓은 거실 바닥에는 첫째가 놀다 정리해 놓지 않은 장난감과 이리저리 잘린 색종이가 널브러져 있다. 안방은 그와 반대로 침대가 있고 바닥에는 매트리스 하나가 깔려 있어 아늑하다. 한쪽 벽은 책장으로 꾸며져 있어 도서관 느낌도 든다. 책장에는 책들이 빼곡히 꽂혀있다. 


 산만함과 아늑한 두 분위기가 공존하는 집은 현실과 이상의 공존이다. 아빠는 신혼 때 책 읽는 삶을 꿈꾸었다. 저녁 식사 후 온 가족이 책을 읽다가 10시면 모두 잠드는 이상적인 꿈이었다. 엄마도 찬성했다. 그런 삶의 가장 큰 적이 TV라고 생각했기에 TV만은 집에 발을 붙일 수 없었다. TV와 단짝인 소파 역시 기피 1순위였다.


 아빠와 엄마는 각자의 집에서 신혼집으로 짐을 옮겼다. 많은 책을 수납하려고 안방 한쪽을 책장으로 만들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그림책과 동화책이 공간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렇게 늘어난 책들은 엄마의 친구에게 작은 책장을 선물 받고도 놓아둘 곳이 모자랐다. 결국 한번 읽은 책 중 자주 읽지 않을 책, 별 감흥이 없던 책을 두어 번 정리하고서야 책이 발에 걸리는 일이 없어졌다.


 세계여행을 하던 젊은 시절, 방문하는 지역마다 도서관은 꼭 들러 책을 보던 책 욕심 많은 아빠는 책을 잘 버리지 못했다. 발에만 걸리지 않을 뿐 거실 컴퓨터 책상 옆에는 30권이 넘는 책들이 먼지를 덮어쓴 채 잠들어있었다. 엄마가 버리려고 내놓은 책 중 아빠가 안 읽어본 것을 다시 수거해서 쌓아놓은 것들이었다. 바로 읽을 것처럼 하더니 책은 뒷전이었다. 돈 버는데 필요한 컨설턴트 지침은 두께가 상당해도 달달 외우는 것을 보면 읽는 능력이 어디로 간 건 아니었다. 


 집에 TV가 없음에도 '일주일 동안 책 보는 시간이 많은가? TV 보는 시간이 많은가?' 물으면 아빠는 TV를 보는 시간이 더 많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TV는 저녁마다 가는 처가나 주말마다 가는 본가에서 식사하면서 다 같이 보기 때문이었다. 


 아빠가 책과 멀어지게 된 시기는 컴퓨터를 사던 시점 부터였다. 유튜브 영상, 게임, 뉴스, 글, 온라인교육까지 컴퓨터로 할 수 없는 것을 찾는게 더 어려웠다. 책과 가까이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졌다. TV가 원흉인 줄 알았더니 컴퓨터는 더했다.


 평일 저녁 9시의 풍경을 보자. 아빠는 거실 한편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있다. 와이드 모니터 한편에 매일 업데이트되는 유머글을 띄워두고 보며 간간히 웃어대다가 다른 한편에 띄워 둔 흰 화면에 글을 쓰기도 한다.


 엄마는 안방 침대에 누워 얼마 전에 배터리가 빨리 닳는다며 버린 3년 쓴 휴대폰을 대신한 새 휴대폰을 보고 있다. 넓은 화면의 최신형 스마트폰으로 포탈에 뜬 뉴스를 보거나 미뤄두었던 드라마를 찾아본다.


 첫째 아이는 거실 앉은뱅이 탁자 옆에서 레고 블록을 쫙 깔아 두고 뭔가를 만들고 있다. 탁자 위에는 태블릿 PC가 있고 마인크래프트 게임을 전문적으로 플레이하는 유튜버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귀를 열어두고 곁눈질로 영상을 보면서 레고를 조립한다. 혼자 하기 어려우면 앞에 있는 아빠를 부르고 아빠는 도와주고는 얼른 모니터로 다시 시선을 옮긴다.


 둘째 아이는 엄마가 누운 침대 아래 바닥에 깔린 매트리스 위에 누워 쌔근쌔근 자고 있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자다가 혼자 놀라 깨서 보채면 엄마는 조용히 쪽쪽이(공갈 꼭지)를 물린다. 언제 보챘나 싶게 아이는 금방 또 잠에 빠진다. 


 이렇게 부모가 책을 읽지 않으니 첫째도 책을 읽기 싫어한다. 어린이 집에서 친구들 중에서 가장 글자를 잘 읽는 아이인데도 책을 읽으라면 잠시 앉아있다가 엉덩이를 뗀다. 아이에게 책 읽는 습관을 만들어주기 위해 엄마가 자기 전에 꼭 그림책 3권씩을 읽어주었는데 그 노력이 무색하다. 아빠는 혼자서라도 책을 읽도록 인터넷을 검색해서 세이펜이라는 도구를 사주기도 했다. 아이는 책에 대면 글자를 읽어주는 세이펜을 신기해하다가도 몇번 하곤 이내 재미가 없는지 태블릿 PC를 켰다.


 더 말하지 않아도 이 집이 책 읽는 집이 되기 위해서 물리적인 바탕만 깔아놓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이제 그동안 손대지 않았던 소프트웨어에 손을 댈 필요가 있었다. 일명 책 읽는 가족 되기 프로젝트이다.


1. 집에 있는 책들의 리스트를 작성한다.
2. 책들을 종류별로 분류한다.
3. 더 이상 보지 않을 책(공무원 시험서, 한국사 책, PSAT 시험지, TESOL에서 배웠던 영어책)들을 싹 버린다.
4. 남은 책 리스트에 독서 마감일을 적고 잘 보이는 곳에 크게 프린트해 걸어둔다.
5. 매일 책 읽을 시간을 정해 각 책들을 독서 마감일까지 읽는다.
6. 한 권을 보고 나면 반드시 독후감상문을 쓴다.
7. 한번 읽고 버릴 것들은 밖으로 빼고 여러 번 곱씹을 것들은 1독 딱지와 함께 다시 책장에 꽂는다.


 책 읽기 습관을 위한 소프트웨어를 완성했으니 이제 습관에 대한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 TV의 자리를 차지한 대용품의 사용시간을 엄격히 제한한다. 평일 저녁 8시 이후로는 아빠의 컴퓨터, 엄마의 스마트폰, 아이의 태블릿 모두 사용금지이다. 이제부터 가족은 책을 읽다가 9시 반에 불을 끄고 10시에 잔다. 주말은 하루는 도서관에 가고 하루는 자유시간을 가지기로 한다. 기존의 습관이 책 읽는 습관에게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첫째가 초등학생이 되기 6개월 전, 이 시점에서 한 가족이 책읽는 가족으로 변화하기 위해 번데기 속으로 들어간다. 새로 태어나는데 얼마나 인고의 시간이 필요할 지는 모르겠다. 


 아빠는 이제 확실히 안다. 책읽는 가족이 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TV가 아니었다는 것을... 책벌레는 환경이 만드는 것이라는 전제는 맞았지만 환경을 만들어 두어도 언제든 TV의 자리에는 다른 것들이 끼어들 수 있었다. 결국 가장 큰 적은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상과 현실의 격차를 알면서도) 변화하지 않으려던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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