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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 축사는 신랑이 해줘요

by CJbenitora

첫째의 어린이집 졸업을 열흘정도 앞둔 어느 날이었다. 아이엄마가 평소처럼 첫째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차에 타면서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선생님이 어린이집 졸업식에서 주완이 아버님이 축사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얘기해 보겠다고 했어요."

"네?"

"졸업식 축사를 언제 해 보겠어요? 신랑이 해줘요."

"축사하고 싶은 부모님들도 있을 수 있고...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졸업식에 참여하고 싶으니 안 할래요."

"아빠가 앞에서 축사를 하면 애한테 좋은 기억으로 오래 남을 거예요."

"그건 애 입장이고 나는 안 하고 싶다니까요. 발표문을 써 주는 것도 아닐 거 아니에요?"

"선생님이 다 써주시는 거 읽으면 될걸요? 신랑이 해요."

"그렇게 뜻깊은 거라면 엄마가 하세요. 굳이 하기 싫은 아빠를 시키나요?"

"신랑의 이미지가 좋으니까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특별히 부탁하는 거잖아요."

"다른 부모님들께 물어보시라고 하고 정 한다는 분이 없으면 다시 얘기하자고 하세요."


생각지도 않은 부모님 졸업 축사 제안이라 당황스럽기도 하고 마음의 준비도 안되어있어 완곡히 거절하라는 뜻으로 아내에게 말했다.


다음날 첫째를 데려다주고 차에 타는 아내에게 선생님께 얘기를 했냐고 물으니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빨리 거절의 의사를 얘기해 줘야 선생님들도 대안을 찾을 거 아니에요?"

"그냥 신랑이 해요."

"그럼 선생님이 준다는 발표문은 언제 받을 수 있데요?"

"발표문은 정해진건 없다네요. 신랑이 하고 싶은 말 하면 된데요."


아내의 뻔뻔한 대응에 말문이 막혔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축사를 쓰고 읽는 모든 과정에 내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준비해 둔 행사장에 가서 아이사진 찍으며 행사를 관전하다가 졸업장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 되는 편안한 행사가 축사하나로 나도 행사의 주체가 되어 버리는 느낌이 마뜩잖았다. 슬슬 마음의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아내의 독단을 단호하게 쳐내던가. 못 이긴 척 받아들이고 준비를 하던가.


등원을 마치고 오전에 여유가 있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축사를 준비하는지 확인이나 해보자는 생각으로 인터넷으로 '어린이집 졸업축사'를 검색해 보았다. 몇몇 블로그와 포스팅이 나왔다. 하나하나 읽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쓴 축사를 참고용으로 공개하기도 하였다. 그걸 읽으면서 절대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점점 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첫째, 졸업식에 참여하는 부모님들은 대부분 편한 마음으로 행사에 참여하고자 하기 때문에 선뜻 축사를 하겠다고 나서지는 않을 것이었다. 포스팅을 올린 그 어머니도 선생님들이 다른 부모님들에게 부탁했는데 어렵다고 해서 본인이 떠맡았다고 했다. 내가 다른 부모들의 축사 기회를 뺏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와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 또한 내가 하지 않으면 졸업식 준비를 하는 것만으로도 바쁜 선생님들이 다른 부모님들에게 일일이 축사를 부탁하여야 할 것이었다. 축사를 맡는다는 것은 선생님의 수고를 덜어주는 행동이었다.


둘째, 나는 글 쓰는 것에 부담을 느끼거나 대중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말과 글로 먹고사는 사람들 중에 한 명이었다. 잠시 짬을 내면 축사를 쓸 수 있을 것이고 강의하듯 철저히 준비할 필요도 없었다. 내게 큰 기대가 없을 것이니 쓴 글을 출력해 가서 읽는 수준이면 충분하였다. 생각해 보면 애들이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행사니까 부담을 비우는 게 맞았다.


셋째, 여유 시간이 많았다. 다른 것 한다고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대기 어려울 정도였다. 컨설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은 연초의 이 시간은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긴 해도 한다고 해서 손해 보는 것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유명해지면 미국의 스탠퍼드 대학에서 졸업축사를 한 스티브잡스와 같이 대학 졸업생들에게 축사를 할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은 다르지만 사전 연습을 한다고 생각하고 준비하면 꿈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 아내가 내가 하는 것으로 이미 결정 내린 일, 더 구차하게 끌지 말고 그냥 하자!'

'졸업축사를 하면 와이프가 고마워할 것이고 아빠의 축사에 아이 어깨에 힘이 실릴 수도 있으니...'


어떤 엄마가 인터넷에 공개한 축사를 참고해서 1시간 동안 축사를 적었다. 그리곤 졸업식까지 일주일가량 짬짬이 읽으며 퇴고를 하였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 졸업식날이 되었다. 오전 업무를 마치고 집에 오니 아이가 그날 휴가를 쓴 아내와 놀고 있었다. 아내가 미리 인터넷으로 주문해 둔 킨더조이 꽃다발을 챙기는 사이, 나는 축사를 주머니 속에 꼬깃꼬깃 접어 넣었다. 오후 5시가 졸업식이라 여유 있게 20분 전에 어린이집에 도착했다.


아이는 졸업식 복장을 입으러 가고 우리 부부는 자리에 앉아 졸업식 시작을 기다렸다. 선생님들이 미리 준비해 둔 아이들의 활동사진을 영상으로 보고 있으니 어느새 5시가 되었다. 다른 부모님들도 모두 입장하여 어린이집의 넓은 방이 사람으로 꽉 찼다.


여느 졸업식처럼 개회, 국민의례, 졸업장 수여, 시상식, 동생들의 송별편지 낭독, 졸업생 답사, 원장님 축사가 쭉 이어졌다. 부모님 축사 차례가 되자 사회를 보시는 선생님이 소개를 해주어 앞으로 나갔다.


선생님은 졸업생들을 일어서게 해서 나에게 인사를 하게 했다. 어떤 녀석이 "우리 아빠 아닌데?"라고 해서 웃음이 터졌다. 졸업생 부모님을 대표해서 아이들과 상호예를 갖추고 연단에 섰다. 주머니 속 준비한 축사를 꺼내 읽었다.


"안녕하세요 리라 어린이집 다섯 솔반 주완이의 아빠 OOO입니다.

먼저 부모님들을 대표해 졸업 축사를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돌이켜보면 리라 어린이집을 다닌 지난 4년은 주완이에게나 저에게나 즐거웠던 기억입니다.

입학설명회에서 선생님을 뵙고 두 솔반 친구들과 처음 인사할 때, 학부모 숲 체험에 참여해 대공원을 산책하며 다른 부모님들과 같이 게임을 할 때, 부모초청 행사에서 장난감을 만들고 아이와 함께 신나는 음악 속에서 춤출 때, 코로나19 방역 활동으로 아이들이 모두 하원한 어린이집에서 소독장비를 들고 방마다 소독할 때마저 즐거웠습니다.


또래아이들이 그렇듯 주완이는 한번 꽂히면 그것만 하는 아이입니다.

4살 때는 엘리베이터에 꽂혀서 주야장천 엘리베이터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일부러 공항이나 기차역에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집에는 삼촌이 선물로 사준 주완이 전용 엘리베이터 버튼이 있네요.


작년 말부터는 줄넘기에 꽂혀서 줄넘기 학원을 보내고 있는데 어린이집과 학원을 다녀와서도 밤에 자기 전까지 줄을 넘습니다.

그런 주완이의 사회성이 궁금해서 한 번씩 “요즘에 뭐가 제일 즐거워?”라고 묻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완이는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노는 것이 가장 즐겁다고 합니다. 다행이지요.


이렇게 정들었던 어린이집 친구들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면 너무 슬프지만

초등학교에 가서도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잘 해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리라에서 보낸 시간들이 좋은 추억으로 떠올라

행복한 유년시절의 기억으로 남을 거 같습니다


저는 지금 돌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둘째가 있어 육아를 처음부터 다시 하고 있는데요. 아기와 지내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어린이집 선생님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커지고 있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주완이와 다섯 솔반 친구들을 현명하게 지도해 주신 OOO 선생님 감사합니다.

원장선생님 이하 리라어린이집의 지혜롭고 따뜻하신 선생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리라 어린이집 친구들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한 보물들입니다.

주완이는 여러분과 친구여서 행복했고 앞으로도 행복할 겁니다.


졸업식을 끝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선생님과 아이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학부모님들 모두 행운과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축사를 하며 선생님들께 감사인사를 할 때 눈을 바라보며 서로 목례를 하였고 아이 얘기를 할 때는 부모님들의 공감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이 자리에 서있기를 잘 결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졸업 축사의 진중한 분위기는 바로 이어진 아이들의 꿈을 듣고 졸업노래를 부르는 시간이 되자 금방 사라졌다. 졸업식은 즐겁게 진행되었고 단체사진과 개별사진을 찍고 나서 끝이 났다. 이로써 아이의 지난 4년의 어린이집에서의 시간들도 마무리가 되었다.


사람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 처음에는 귀찮았던 졸업축사가 수동적이나마 할 마음이 생기고 마음을 고쳐먹으면서 진심을 가지고 준비할 수 있었다.


이제 아이는 유아가 아닌 초등학생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런 전환점에서 다른 부모님들을 대표해서 졸업축사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또한 이번 축사로 인해 잃은 조그만 나의 수고와 시간보다 얻은 것이 훨씬 많았다. 아빠가 다른 부모님들을 대표해서 어린이집 졸업축사를 했다는 기억을 아이에게 확실히 남겼고 아이엄마에게 점수를 땄다. 그리고 나중을 기약하는 훌륭한 예행연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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