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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Jbenitora Mar 27. 2023

진정한 박사가 되기 위한 한나절의 여정

 박사 졸업을 하였다. 내 학력에 '박사'라는 한 줄이 추가할 수 있게 되었지만 마음속 한편에는 찝찝한 감정이 남아있었다. 졸업 후 한 달간 난 아직 박사가 아니었다.


 나 보다 한 학기를 먼저 졸업을 하였으나 같은 이유로 아직까지도 심적으로 박사가 아닌 형님과 약속을 잡았다. 나와 같은 지도교수님 아래 과정을 마쳤고 심사도 같은 교수님들에게 받았던 형님이었다. 형님은 내가 박사 논문을 한참 수정하고 있을 때부터 심사하는 교수님들에게 인사를 드리러 갈 때 꼭 같이 가자고 부탁했었다. 그 형님은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어 부산에 내려올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그로 인해 졸업 후 인사 시기를 어영부영 놓쳐버렸다. 그래서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나와 함께 인사 가는 것을 매우 중요한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박사 논문 심사에 참여한 교수님들에게 출판된 논문을 가지고 인사를 드리는 것은 시기조절이 중요했다. 일단 졸업식을 치르고 나서여야 하고 그분들이 교수실에 상주를 할 때가야 실례가 되지 않기 때문에 개강을 한 3월 이후여야 했다. 개학 초기의 부산함이 지난 3월 하순의 금요일로 날을 잡고 교수님들께 보름쯤 전에 미리 메일을 보냈다. 다행히 그날에 안 된다는 교수님들이 없어서 오전에 두 분, 오후에 두 분과 약속을 잡았다. 지도교수님께는 이미 논문 양장본을 드렸기에 점심식사를 함께 하는 것으로 했다.


 인사를 드리러 가는 당일 오전에 형님과 ㅇ대학교 입구의 지하철 역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차로 이동하다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는 형님을 태우기로 했는데 부산의 지리가 어색했던 나는 그를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부산의 대부분의 대학이 그렇듯 ㅇ대학교 역시 산중턱에 있었다. 형님을 놓친 나는 대학교 입구에 차를 세우고 지하철 역으로 걸어내려가다가 중간에서 그를 만났다. 양복에 백팩을 멘 그가 땀을 흘리며 오르막을 오르고 있었다. 부산의 차도는 좁기도 좁아서 차를 적당히 대어 둘 곳이 없었기에 부득이 입구까지 올라간 것이지만 괜히 미안했다.


 교수님께 10분쯤 늦는다고 문자를 넣어두고 입구까지 같이 걸었다. 형님은 교수님께 드릴 논문 속표지 앞 빈 여백에 글을 썼냐고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교수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앞장에다가 손으로 적는 거 말이야."

 "논문을 인쇄소에 맡길 때 맨 뒤편에 감사의 말씀을 적어뒀는데 그걸 또 적는다구요?"

 "나는 감사의 말씀을 적진 않았는데... 그래도 니 책을 한 권 드리는 건데 적는 게 안 맞겠나?"

 "이제와서요? 저는 됐습니다. 그냥 드릴래요."


 형님은 미리 적어둔 감사의 말에 교수님 이름을 내게 재차 확인한   이름 란에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는 봉투를 하나 꺼내  페이지에 끼웠다. 교수님께 감사의 의미로 준비한 현금이었다.


 오늘을 준비하면서 감사 선물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ㅎㅇ브레인'이라는 석박사들이 모이는 웹사이트를 통해 정보를 검색했다. 논문 심사를 맡은 교수님들께 인사 시에 뭘 가져가는지는 학생들마다 생각이 달랐다. 어떤 사람은 선물을 사서 갔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상품권을, 어떤 사람은 현금을 드렸다고 했다. 금액으로 따지면 5 ~ 50만 원까지 다양했다.


 나는 얼마 되지 않긴 하지만 심사비를 학교에서 받은 교수님들에게 현금을 주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받는 교수님들과 주는 내가 부담이 되지 않는 범위의 금액의 상품권을 준비했고 그것을 주머니 속에 넣어갔다. 더불어 아버지께서 재배하시는 사과로 만든 사과즙 한 상자를 같이 준비했다.


 첫 번째 교수님은 우리가 온다고 미리 따뜻한 차를 내려두고 있었다. 짧게 근황을 주고받고 그에게 논문을 건넸다. 그는 심사하며 느낀 점과 덕담을 말씀하시며 우리 둘의 논문을 차례로 보았다. 형님의 논문을 펼쳤을 때 현금 봉투가 나왔고 교수님은 그것이 마치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후에 몇 마디 나누다가 앉은 지 10분도 되지 않았는데 형님이 교수님 바쁘시다며 일어나자고 했다. 나는 차를 준비한 교수님을 생각해 남은 차만 마시고 일어나겠다고 하고 차를 남김없이 비웠다. 연구실을 나오면서 교수님께 상품권 봉투를 건넸다.


 "교수님, 식사라도 같이 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 자리를 만들기가 어렵네요. 이걸로 가족분들과 식사라도 하십시오."


 교수님은 슬쩍 당황해하였지만 봉투를 받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동했다. 그렇게 첫 번째 교수님께 논문을 드리고 나왔다.


 다음 교수님께로 이동하기 전에 형님이 담배를 한대 피고 가자고 했다. 담배를 피우며 형님은 이렇게 말했다.


"봉투는 논문에 끼워서 드려라."

"그러게요. 제가 잘 몰라서 나올 때 직접 드렸네요. 근데 형님은 어떻게 이런 걸 잘 아십니까?"

"나보다 먼저 졸업한 선배들에게 전화 걸어서 일일이 물어봤지."


 마치 촌지를 돌리듯 쉬쉬하며 사례비 조로 뭔가를 건네는 인사치레가 영 익숙하지 않았다. 형님이 준비한 현금이 내 상품권에 비해 많아서 뭔가 내가 잘못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 교수님들은 관례상 받을 뿐 그 정도에 따라 차별할리가 없지. 그리고 적은 금액이라서 섭섭하게 생각하는 교수님들이라면 나도 알고 지낼 이유는 없어.'


 담배 타임이 끝나고 출발했다. 두 번째 인사드릴 교수님이 있는 ㄹ대학교 역시 산을 제법 올라가야 했다. 차를 대고 약속된 시간에 연구실로 들어갔다. 교수님은 밝게 맞이해 주었다. 아까와 같이 사과즙을 드리고 논문을 전달했다. 근황을 주고받고 10여분 후 연구실을 나왔다. 이번에는 감사의 말씀 페이지에 상품권 봉투를 넣어두어 서로 어색한 분위기는 없었다.


 외부교수님 2분에 대한 인사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모교 교수님들이라 마음이 편안했다. 학교로 이동했다. 지도교수님을 만나 인사드렸다. 교수님께는 졸업 전에 이미 논문의 양장본을 드렸기에 그 박사논문을 요약해 실은 학술지를 전달드렸다. 교수님과 함께 학교 앞 음식점으로 이동해 점심을 먹었다.


 약속된 시간이 되어 다음 교수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교수님은 박사 되심을 축하한다며 먼저 악수를 건넸다. 사과즙을 드리고 논문을 전달했다. 근황을 나누다 교수님의 전화벨이 울려 금방 사무실을 나왔다.


 이제 남은 교수님은 한분이었다. 마지막 교수님과의 약속시간까지 지도교수님 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다가 시간이 되어 이동했다. 교수님께 인사를 드리고 사과즙과 논문을 전달했다. 교수님은 논문을 넘겨보다가 속표지가 비어있는 것을 보고 이런 얘기를 했다.


 "제가 학생분들께 논문을 받을 때 손글씨로 인사말이 안 쓰여있으면 바로 휴지통으로 갑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예의를 잘 모르시더군요. 볼펜을 드릴 테니 써주시겠습니까?"

 "죄송합니다. 교수님. 생각해 보니 제 책을 드리는 건데 적어야죠."


 형님과 교수님이 얘기 나누는 동안 그 자리에서 감사의 말씀을 적었다. 교수님은 다시 한번 논문에 글을 적는 것이 예의라는 것을 강조하며 혹시 이걸 모르는 후배분들이 있다면 가르쳐 주시라고 말을 했다. 근황을 잠시 주고받고는 인사를 마무리하고 나왔다.


 지도교수님께 다시 들러 심사를 맡아주신 교수님들께 인사를 마쳤다고 말씀드렸다. 교수님은 고생들 하셨다며 격려했다. 다음에 또 연락드리고 찾아오겠다고 하고 밖으로 나왔다. 형님은 흡연구역으로 가더니 담배를 하나 꺼내며 아주 맛있게 피었다.


 "아 이제 홀가분하다."

 "그러게요. 형님. 드디어 짐을 벗었네요. 오늘 고생했습니다."

 

 이렇게 한나절 동안 심사해 주신 5분의 교수님들께 박사가 되었음을 보고하며 인사드렸다. 나의 평소 생각과 충돌되는 부분이 있었고 굳이 손글씨를 적을 것을 요청한 부분도 인상이 깊었다. 몰라서 못 지킨 예의인지, 생각 없이 흘러내려오는 구습(舊習)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상식과 구습의 접점에서 잘 마무리되었다. 이제 나는 박사, 즉 연구자로서 첫발을 내디뎠다는 느낌을 가진다. 앞으로 박사 타이틀이 부끄럽지 않게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다.


  다섯 분의 교수님들 뿐 아니라 나의 박사과정 내내 함께 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더불어 이 글이 석 박사 졸업을 앞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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