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약과 연체금이 대략 정리가 되었다. 엑셀 차트로 수백 건이 되던 연체자 리스트가 10건도 남지 않았다. 팀이 여름 내내 뛰어다닌 결과물이었다.
악성으로 분류된 고객들은 숙박업이 많았다. 외관을 불빛으로 휘감은 휘황찬란한 모텔들이 여기저기 생기고 있던 시절이라 동네 여관이나 여인숙, 작은 모텔들은 손님이 없다시피 하였다. 일을 찾아 옮겨 다니는 분들에게 달방을 받아서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그분들의 사정도 있지만 케이블 TV를 시청하고 있다면 그에 상응한 금액을 납부받아야 되는 게 방송국 측의 사정이었다. 여관이 장사를 포기할 생각을 하고 TV 연결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면 인입된 케이블 선을 전부 철거하고 연체금도 복명서 처리를 할 생각이었다. 또다시 본부장님과 신경전을 해야겠지만 현장을 아는 입장에서 이른바 '없는 사람 속옷까지 뺏는 일'은 하기 싫었다.
연체금 납부하고 재계약하시라고 하면 사장님들은 나를 피하거나 다음에 주겠다며 달랬다. 처음엔 믿고 돌아갔지만 그게 몇 번 계속되자 나도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시장통에 위치한 모 여관 사장님에게 나름의 최후의 통첩을 날렸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선을 철거하겠습니다."
"아니 젊은 양반, TV선까지 뽑아버리면 우리 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저라고 이렇게 하고 싶어 하겠습니까? 제가 한 달 사이 3번을 왔는데도 1년 넘게 밀린 방송료를 낼 생각이 없으시고 재계약도 못 하신다니 그렇지요."
"1층에 달방 묵는 사람들이 월세 내면 내가 조금이라도 낼게. TV 끊으면 달방 사람들 다 딴 데 가버린다니까!"
사장님은 장사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방송국에 돈을 낼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사장님 보다 20살은 더 젊은 나는 도저히 그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공짜 방송을 계속 허락하는 것은 내가 추구하는 상식적인 세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관 안내실 안쪽 의자에 앉아 사장님께 말했다.
"선 철거도 안 된다고 하시니 오늘은 정말 변제 의사가 있으신지 확인해야겠습니다. 아까 카운터 지폐칸에 지폐가 있던데 다만 얼마라도 주셔야 일어나겠습니다."
"돈이 없다니까 그러네. 그러지 말고 며칠 뒤에 오면 갚는다니까?"
"제가 올 때마다 그 소리인데요. 그게 정말이라면 나머지는 며칠 뒤에 갚더라도 지금 주실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주십시오. 그래야 저도 상사에게 사장님이 말뿐이 아니란 걸 보여드릴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사장님이 그 뒤로도 답이 없자 나는 의자에 앉아 30분을 버텼다. 들락날락하면서 눈치를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신문을 보고 청소를 하던 사장님이 내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드디어 카운터로 갔다. 그는 지폐통에서 3만 원을 꺼냈다.
"다음번에 준다니까 사람말을 못 믿네... 이거라도 가져가요. 더는 없어."
"네, 연체금 3만 원 주신 거 확인했습니다. 이 돈은 정확하게 회사에 수납하겠습니다. 다음 주에 나머지 금액 받으러 오겠습니다. 가보겠습니다."
'오늘도 졌구나!' 이번만은 반드시 연체금 전액을 받아갈 굳은 다짐을 하고 왔지만 내 손에는 연체금의 십 분의 일도 안 되는 만 원짜리 3장이 들려있을 뿐이었다.
'이런 업무가 맞지 않나?'
'내가 마음이 여리고 어리숙해 보여서 연체자들이 가지고 노는 건가?'
회사에 들어오니 선배들이 모두 외근을 마치고 와서 자리에 앉아있었다. 내가 오기만을 기다린 듯 팀장님이 회의를 소집하였다. 우리는 순서대로 각자 맡은 일의 진행상황과 성과를 브리핑하였다. 선배들도 자기 구역의 연체자들 때문에 속을 썩고 있었다. 어떤 선배는 이런 건들을 팀장님이나 회사 선에서 처리해 달라고 건의도 하였다. 내 차례가 되었다.
"제 구역은 연체와 재계약이 10건 정도 남았습니다. 대부분이 숙박업인데 몇 번을 가도 다음에 주겠다는 말뿐이지 해결이 어렵네요. 오늘은 갈 때마다 다음에 주겠다는 분에게 다만 얼마라도 주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하고 30분 넘게 버티고 앉아서 3만 원 받아왔습니다. 얼마 못 받아와서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선을 끊고 오던지 다 받아오던지 하겠습니다."
브리핑이 끝나자 팀장은 내가 받아온 3만 원을 건네받고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막내가 오늘 연체금으로 3만 원을 받아왔습니다. 우리는 이런 마인드가 필요합니다. 얼마 받아왔는지보다 받아오겠다는 생각과 행동이 중요합니다. 이제 해결해야 할 악성연체가 몇 건 안 남았습니다. 모두 이런 마음으로 서둘러 해결합시다. 오늘 수고한 막내에게 박수!!"
"짝 짝 짝 짝"
팀장은 일어서서 박수를 쳤고 분위기에 어쩔 수 없이 선배들도 크게 박수를 쳐주었다. 발표하고 자리에 앉기도 전에 졸지에 박수세례를 받게 된 나는 얼떨떨하게 서서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박수소리를 듣고 다른 팀 사람들이 무슨 일 있었냐며 물었다. 파이팅을 위한 박수였다며 얼버무렸지만 회사 내에 소문이 퍼졌다. 졸지에 나에게 노력하는 우수사원의 이미지가 씌워졌다.
그 박수로 인해 남은 연체건을 대충 처리할 수 없었다. 누구보다 빨리 마무리지었고 사람들은 나를 더 높게 평가해 주었다. 이 일로 다른 팀 사람들도 나를 눈여겨보게 되고 빠르게 회사 식구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날의 박수는 잊을 수 없다. 지금도 그것이 박수받을 일인지 모르겠다. 특별하게 잘한 것도 없는데 받았던 박수는 내가 특별하게 잘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회사 다니는 내내 요직을 거치게 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대단치 않은 것에 대한 칭찬이라도 사람을 변화하게 만든다. 우리가 살아가고 일을 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는 사랑, 우정, 의리, 자비, 욕망 등 여러 감정에서 오지만 그중에서도 신나고 즐겁게 어떤 일을 하게 하는 것은 단연코 칭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