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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Jbenitora Aug 16. 2023

전교 1등의 기억이 내 인생에 미친 영향

초등학생 저학년들은 요즘 받아쓰기 시험을 치지 않는다. 시험은 곧 경쟁을 뜻하는 우리 사회에서 놀면서 자라는 어린이들에게 괜한 스트레스 주지 않는 좋은 제도라 생각한다.


내 어린 시절에는 시험이 많았다. 국민학교를 들어가면서부터 받아쓰기와 구구단 시험을 쳤다. 어른들은 그런 것들을 잘하면 으레 칭찬하였다. 나는 그런 칭찬을 듣는 것이 좋았다. 그러다 보니 노력하지 않아도 성적이 좋았다. 가끔씩은 반에서 일등을 했고 부모님은 기념으로 짜장면을 배달시켜주시기도 했다. 잭팟이 터진 날이었다. 그런 날 단칸방에서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먹었던 짜장면 한 그릇의 기억은 지금도 생각할 때마다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무슨 대단한 노력을 한 것이 아니었기에 상위 등수가 나올 때면 복권 맞은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노력 없이 성취를 이룬 것이기에 의도한다고 성적을 높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행히도 국민학교 6년간 성적은 꾸준히 상위를 유지했다. 성적이 10등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니 맞벌이하시느라 공부에 신경 써주지 못하시는 부모님도 만족하셨다. 그때 부모님의 기대가 컸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르지만 나 역시 이 정도에서 만족했기에 공부를 더 해서 전교에서 놀아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반에선 한자리 등수라도 전교에서는 50등도 넘었다.


6학년이 되어서도 많은 시간을 친구와 컴퓨터게임을 하거나 동생들과 놀이터에서 노는데 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봄에 치는 중간고사도 그럭저럭 잘 봤다. 조금 덥다 싶더니 순식간에 한 학기가 지나고 기말고사가 눈앞이었다. 따로 공부를 안 해도 어느 정도 성적이 나올 것을 예상할 수 있었기에 며칠 공부하는 흉내만 내었다.


드디어 기말고사날이 되었다. 며칠 동안 치러지는 시험이었다. 지난 중간고사에서는 발목을 잡는 문제들이 많았는데 기말고사는 모든 과목이 별 생각을 하지 않아도 답이 보였다. 고민 없이 답을 적어내려 갔다. 마지막날 마지막 시간이 체육시험이었다. 주관식 한 문제가 아리송했다. 태권도의 3요소를 묻는 질문이었는데 체육책에서 본 기억이 없었다. 정권 지르기, 발차기, 막기 등 생각나는 데로 3개를 채워 적었다.


시험을 치고 나서 친구들은 서로의 정답을 맞혀보고 있었다. 나는 다른 문제는 고민하고 풀지 않았기에 관심이 없었다. 태권도 3요소만이 답이 뭘지 궁금했다. 정답은 품새, 겨루기, 격파로 기억되는데 이 문제가 논란이 많았다. 교사의 의도대로 제대로 쓴 학생이 거의 없었다. 결국 체육선생님은 다양한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해 태권도 동작의 어떤 것이라도 3가지만 적으면 맞는 것으로 인정해 주었다.


몰랐던 문제인데 3가지를 적어서 어쨌든 맞게 되니 기분이 좋았다. 

'여느 때처럼 성적은 그럭저럭 나오겠네'

성적이 오르고 내린다고 뭐라 할 부모님은 아니지만 스스로 떳떳했다.


시험이 끝났으니 친구들과 어울려 신나게 놀았다. 한 친구는 며칠 뒤 시험 성적이 발표되는 날 자기 집에 아무도 없으니 가서 비디오 게임을 하고 놀자고 하였다. 친구집에 놀러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신났다.


얼마 후 기말고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수업이 끝나고 종례 시간에 담임선생님이 성적표를 나눠주었다. 중간 번호였던 나는 앞번호 애들이 성적표를 받아가는 것을 보면서 덤덤히 이름이 불리길 기다렸다. 머릿속은 오늘 친구집에서 놀 생각이 가득했다. 드디어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앞으로 나갔다. 선생님이 나를 교단 앞에 세웠다.


"친구들, 우리 반에서 전교 1등이 나왔어요. 모두 박수로 축하해 줍시다."


순간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아이들의 박수를 받으며 성적표를 펴 보았는데 국어에서 한 문제를 틀렸고 등수는 전교 300여 명 중에 1등이었다. 또 한 번 잭팟이 터진 것이었다. 시험을 힘들게 준비한 것도 아니고 공부를 오랫동안 한 것도 아닌데 1등이 되다니 마치 천재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부러움의 시선을 받으며 자리로 돌아왔다. 지난 시험에서 반에서 1등 하던 친구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분을 참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와 같이 놀던 친구들이 몰려와 축하해 주었다. 

'체육 시험에서 그 문제를 틀렸으면 전교 1등은 날아가는 것이었는데 이런 행운도 있구나!'


친구들은 나 때문에 2등이 된 친구는 평소에도 잘난 체 하던 녀석이라며 고소해했다. 지난 시험에는 비교할 감도 안되던 녀석이 자기를 제쳤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그런 등수놀이와는 상관없는 사람이었기에 1등을 뺏긴 심정은 이해되지 않았다.


청소를 하고 가방을 싸서 약속된 친구집으로 향했다. 친구 부모님이 없는 줄 알고 갔는데 어머니가 계셨다. 어머니는 거실의 탁자에 간식거리를 준비해 놓으셨다. 친구가 나를 소개했다.


"엄마, 내 친구 OOO야! 이번 기말고사에서 전교 1등 했어."

"안녕하세요."

"그래, 얘기는 많이 들었다. 책 많이 읽고 공부도 잘한다며... 우리 □□□ 모르는 거 있으면 좀 가르쳐주고 친하게 지내라."

"네"


친구가 그동안 자기 엄마에게 내 칭찬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말투에서 느껴졌다. 그날 친구집에서 간식을 배불리 먹고 게임도 재밌게 하였다. 집에 가서 어머니께 성적표를 내밀었더니 장하다며 안아주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 한 번도 전교 일등을 해본 적이 없다. 그래도 그날의 기억은 강렬히 남아서 내가 약해지거나 자신감을 잃을 때 일으켜 세워줬다. 물론 부작용도 있었다. 뭐든 최선을 다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준비를 하고는 하늘에 맡기는 버릇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시험은 자신의 지식이나 능력이 어떤 수준인지를 측정하는 것이다. 시험점수가 낮다면 보완하면 되는 것이고 높다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의 경험을 통해 우리 아이는 나중에 시험을 보게 되더라도 높은 등수는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등수와 상관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분야에 마음껏 빠져들어 즐기면 좋겠다.


그러면 전교 1등의 추억과 맞바꾼 최선을 다하기보다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준비하는 것에서 만족하는 아빠의 오랜 습관을 물려받는 일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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