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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Jbenitora Jun 19. 2023

천사의 사치품

 녀석의 출신지는 정확하지않다. 서부 아프리카추정될 뿐이.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에서 특히 인기가 높았는데 이집트인들은  길을 떠날  물통대신  녀석을 챙겨 갔다고 한다.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세상 모든 사치품의 으뜸이며, 한번 맛을 보면 천사들이 무엇을 먹고 사는지   있을 것이다.” 라며 극찬했다.


동그랗고 무거운 초록색 열매 속에 붉은 속살을 가진 이 과일이 지금 제철을 맞았다.

'수박'

누구나 그 모습을 보면 쨍쨍 내리쬐는 태양이나 반바지, 시원한 계곡물, 바닷가를 함께 생각할 바로 그 과일이다.


수박은 무더운 7월과 8월이 제철이지만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5월부터 마트마다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6월 중순인 지금은 길거리 트럭, 동네 슈퍼에도 수박이 산을 이루고 있다. 어릴 적에 비해 수박철이 한두 달 빨라진 것이 느껴진다.


장을 보러 대형마트에 간 김에 수북이 쌓인 수박에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가 멈칫했다. 몇 백 원 차이로 2만 원이 안 되는 가격에 비해 무게가 7kg 정도밖에 나가지 않는다. 첫 해외여행에서 현지시장의 상인에게 직접 사서 먹었던 수박도 딱 이만했다.


연년생인 남동생과 처음으로 배낭여행을 갔던 나라는 태국이었다. 방콕에서 며칠을 보내고 에메랄드색 바다 하면 떠오르던 푸켓으로 갔다. 신혼여행지로 알려진 푸켓이지만 타운은 작았다. 해변과의 거리도 멀었다. 오토바이를 하나 빌렸다. 내가 운전을 하고 동생은 뒤에 탔다. 우리는 여행의 목적인 바다로 향했다. 물장구를 치고 수상오토바이도 빌려서 탔다. 놀다 보니 햇볕이 아스팔트를 달구는 오후가 되었다.


파라솔을 빌려 해변에 누웠다. 피곤이 밀려와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니 갈증이 났다. 자리를 정리하고 해변을 나와 시원한 음료를 팔 만한 가게를 찾았다. 주변에는 없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했다.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 나왔다. 상점을 찾아 골목길에 접어드는데 시장이 보였다. 그곳에 수박이 가득 실린 작은 트럭이 있었다. 일꾼들이 땀을 흘리며 수박을 내려 땅에 산처럼 쌓고 있었다.


물 한 방울이 간절한데 수박을 보니 마음이 급했다. “수박 먹을래?” 물어보며 동생을 보는데 이심전심이었다. 동생의 대답이 끝나기 전에 상인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뛰어갔다. 그는 영어를 잘 모르는 시골의 수박장수였지만 숫자만은 알아듣는 듯했다. 흥정 끝에 100바트, 한국돈으로 환산하여 3천6백 원에 어른 머리보다 조금 작은 수박 하나를 샀다. 한국의 1/4 가격이었다.


싸게 산 수박 하나에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동생과 수박을 깨 먹을 만한 조용한 곳을 찾다가 길 모퉁이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수박을 땅에 내려놓으니 살 때 미리 잘라 달라고 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해결하는 법'


동생이 수박을 들어 땅에 패대기쳤다. 수박이 ‘통통~ 또르르’ 굴렀다.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이번엔 내가 수박을 잡고 하늘로 던졌다. “퍽~” 땅에 떨어지며 박살 났다. 먼지 바닥에 얼굴을 비빈 수박의 일부를 솎아내니 온전하게 쪼개진 2/3가 남았다. 우리는 그걸 한번 더 쪼개 하나씩 잡고 먹었다. “우걱우걱” 아무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 길에 수박 먹는 소리만 들렸다. 그렇게 푸켓의 어느 길바닥에는 오후의 쨍한 햇볕 아래 산산조각 난 수박을 들고 시뻘건 수박물을 줄줄 흘리며 먹고 있는 두 남자가 있었다. 갈증은 금세 사라졌고 힘을 보충한 우리는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장을 잔뜩 보았지만 결국 수박을 사지 않았다. 수박에 미련이 남아 집에 오는 길에 아내에게 얘기해서 동네 슈퍼에 들렀다. 슈퍼에는 10kg은 됨직한 수박이 있었다. 값은 좀 더 나갔지만 한통을 계산하고 나오는데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비타민A, B1, B2, C  포도당, 과당, 칼슘, 칼륨, 철분, 글루타민산, 알기닌 등 각종 영양소가 풍부한 과일이며 고대 그리스인들도 이뇨제로 사용하고 먹고 남은 껍질로 피부를 진정시켰다는 수박.

근대까지 평민들은 비싸서 먹기 어려워 양반들만 먹었기에 양반의 과일이라고 불렸던 수박.


세상에는 수많은 과일들이 있지만 수박이 으뜸으로 좋다. 여름 한철 맛보는 과하지 않은 달콤함이 그 첫째 이유다. 조금 많이 먹었다고 하면 화장실을 몇 번이고 들락날락해야 하는 다른 과일들과는 달리 배 터지게 먹어도 탈이 나지 않는 것이 둘째 이유다.


그렇다고 수박이 단점이 없는 과일은 아니다. 먹으면서는 속살 속의 수많은 씨를 매번 뱉어 내야 한다. 계량이 되어 씨가 많이 줄었는데도 번거로운 것이 사라지진 않는다. 먹고 나서도 처리가 곤란한 껍질이 수북이 쌓인다. 음식물 쓰레기통이 순식간에 꽉 찬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 집은 집 앞에 텃밭이 있어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할 수 있다. 수박을 살 때 다른 고민 없이 적정한 가격인지만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요즘은 태풍과 병충해의 위험을 피해 겨울 동안 하우스에서 재배하여 봄에 출하하는 수박이 많다. 하우스 수박 덕분에 전국의 수박쟁이들은 대략 넉 달은 수박과 함께 할 수 있다. 초기에는 조금 비쌌지만 여름이 한창인 지금은 수박 크기별 가격도 1만 원대 중반부터 2만 원대 중반까지 안정화되었다. 한동안 우리 집 냉장고 한편에는 수박이 자리할 것이다.


장 봐온 물건들을 정리하고 슈퍼에서 사 온 어른 머리통만 한 수박을 반으로 가른다. 반은 냉장고 넣고 남은 반을 먹기 좋게 썬다. 나만큼 수박을 좋아하는 우리 아이들은 그 모습을 보며 쟁반 주위에 둘러앉는다. 잘라놓은 수박을 우걱우걱 먹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태국에서의 내 모습이 보인다. ‘천사의 사치품’ 하나로 우리 가족은 오늘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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