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의 추억은 기념품으로 남아
여행을 떠나면 일상에서 잠시 멀어질 수 있기에 집으로 돌아오면 마치 생생한 꿈을 꾼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모든 여행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특별했고, 나는 기록으로든 물건으로든 다녀온 여행 자체를 기억에 남기고자 애썼다. 떠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 설렜고, 유명한 곳에 가보았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마음이 집으로 돌아와서 점차 옅어지는 것이 두려웠던 걸까. 여행을 가면 꼭 그 여행지를 떠올리게 하는 무언가를 사 오곤 했다. 미국에서 인턴을 할 때 다녀온 뉴욕의 흔하디 흔한 아이러브뉴욕 냉장고 자석이라든지, 일본 오타루에서 들렀던 오르골 박물관에서 사 온 고양이모양 오르골이라든지, 강원도 대관령 양떼목장 기념품 가판대에서 산 도자기 양 모형이라든지 말이다. 여행을 가면 돈도 돈이지만 구매한 물건을 넣을 공간이 부족해 되도록이면 자석이나 자그마한 모형 같은 아주 작은 기념품으로 고심하여 골라오긴 하는데, 곧 나이 마흔을 바라보는 이 시점에 돌이켜 보니 그렇게 자잘하게 모은 기념품이 넘치고 넘쳐 수납장 안에서 서로 겹치게 얹어져 있는 형태로 손쓸 수도 없게끔 엉켜있었다.
언젠가 시간적 여유가 있는 육아휴직 중에 정리를 한 번 해보자고 기념품이 모여 있는 수납장 문을 열었던 적이 있다. 정리의 원칙 중 하나인 ‘싹 다 빼서 넣을 것만 넣고 버리기’를 실천했어야 했는데 실수했다. 하나씩 빼며 어느 여행에서 구매했더라 기억을 더듬다 보니 추억 여행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본래의 목적은 잊고 하나 둘 구경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시간이 훅 지나가 있어서 다시 우르르 수납장에 넣은 후 문을 닫았다(왜 이 시점에서 정리왕 남편의 한숨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지 모르겠다). 기념품을 넣어둔 거실 수납장은 기념품을 진열하여 보여줄 수 있게끔 전면이 투명 창으로 되어 있는데, 그 안에 알록달록 기념품이라는 꼬리를 달고 있는 잡화들이 있어서 그런지 만 15개월 둘째의 눈을 종종 사로잡았다. 열어 달라고 떼를 쓰는 걸 몇 번 열어줬더니 뺐다 넣다 하다가 더욱 난장이 되어 버린 수납장. 버릴까 말까 하면 버려야 한다던데 다시금 수납장에 넣어버리고 마는 나는 정녕 정리계의 구제불능인 것인가.
자자 다시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는 명언을 남긴 곤도 마리에 정신을 불러와보자. 설레는가 설레지 않는가. 여행지의 기념품과 하나씩 눈 맞춤을 하며 설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하… 아무래도 버리지 못할 것 같아 한숨이 나오는 걸 보니 나는 설레는 쪽인 것 같다. 물건도 물건이고, 각 여행지에서 하나씩 모은 냉장고 자석(대개 지역명이나 땅 모양으로 만들어져 특징적이다)은 냉장고 한 면을 점점 가득 점령하고 있지만 도저히 버릴 수 없다. 내가 다녀온 여행, 남편이 다녀온 여행, 함께 다녀온 여행 모두의 추억이 하나씩 기념품으로 남았다. 누군가에겐 별거 아닌 물건이 여행이라는 특별한 경험에 대한 추억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나니 버릴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버릴 수 있는 여행 기념품이 있긴 하다. 많지는 않지만, 타인이 여행하고 사다 준 기념품은 나의 추억이 서려있지 않기에 비교적 쉽게 이별할 수 있다. 여행을 다녀온 가족이나 지인이 먹을 것을 사다 주면 참 행복하게 먹어치울 수 있는데, 가장 난감할 때가 물건을 선물 받을 때다. 화장품처럼 소모품 말고 그야말로 ‘기념품’ 같은 물건을 받으면 여행지에서 내 생각을 해줬다는 고마운 마음 외에, ‘이 물건을 어떻게 지니고 있다가 이별한담’하는 부담스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 때도 많다. 여행지 전통 의류를 선물 받으면 한 번쯤 걸쳐 인증샷을 날려주며 고마움을 양껏 표현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둘째 치고, 처분할 시 여행지에서 나를 떠올려준 이들의 마음을 저버린다는 점에서 죄책감이 상당하다. 쩝… 받을 때는 너무나 고맙고 기분이 좋은데, 이 것이 짐이 되는 순간 나의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진다. 버리는 것은 언제나 힘들다.
차마 이별을 고하지 못한 여행 기념품을 다시 떠올려 본다. 영 내키지는 않지만 기념품 사진을 찍은 후, 사진으로 추억에 젖어 볼까. 추억 영정사진 느낌이려나. 아, 아무래도 나는 물건에 너무 의미 부여를 과하게 하는 피곤한 타입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