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새로운 상담사와 심리상담을 받고 왔다. 주기적으로 받을 예정인데, 오늘 느낀 감정을 한 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상처받고 싶지 않다. 상처받을까 두렵다.'
인간관계가 어렵다고 생각한 적이 거의 없다. 왜일까? 사회생활을 잘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내 생각엔 타인에게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프로세스를 요약하면 기대없음→실망없음→상처받지않음 이런 구조다. 나에게는 10년 이상을 공들인 견고한 자기방어용 갑옷이 있다. 웬만한 공격에는 타격이 없을 정도의 내구력, 거의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라 자랑하고 싶을 정도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살짝 갑갑하다는 느낌이 든다. 갑옷 안의 맨살은 어떨까..?
나와 비즈니스 관계의 사람들은 내 인상을 차갑거나 굳건해 보인다고 느낄 수 있다. 실상은 그 반대다. 나의 내면은 매우 연약한 상태다. 상처받고 싶지 않은 두려움의 강력한 의지가 표면으로 올라왔을 뿐.
톰하디가 나오는 갱스터무비에서 인상깊게 본 장면이 있다. 톰하디는 쌍둥이역할로 형동생 배역 모두를 소화하는데 동생은 그야말로 폭력, 충동으로 점철된 남성성의 화신이다. 갈등이 있어 형에게 신나게 두드려 맞은 후 동생이 형에게 진심을 속삭이는 대사가 있다. "I'm very, very fragile." fragile : 깨지기 쉬운 이라는 뜻이다. 나 또한 매우 깨지기 쉬운 존재다.
강력한 페르소나로 자신까지 속일 수 있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연약한 맨살을 햇빛에 천천히 노출시킬 계획이다. 어떻게든 상처받지 않으려는 사람은 동시에 사랑도 받을 수 없는 운명이다. 모든 것은 이분법적이 아닌 양가성을 가지고 있다. 상처는 조금도 받지 않고 사랑만 받으려는 태도를 바로 욕심이라고 부른다.
문 밖을 나설 때 나의 아름다운 갑옷은 잠시 벗어두고 홀가분하게 나서보자. 거기서 관계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 같은 느낌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