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 증명>을 읽고-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 최진영 작가의 소설 <구의 증명>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신다면 이 글을 읽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교보문고에서 새로 들어온 책은 뭐가 있나 둘러보다 최진영 작가의 <단 한 사람>이란 제목의 장편소설을 발견했다. 꽤 재미있어 보일 것 같아 작가소개 부분과 이전 소설작 제목을 읽다 <구의 증명>을 발견했다. 읽어보진 못했지만 자주 들어보았고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면 자주 마주친 소설이었다. 마침 밀리의 서재를 들여다보니 <구의 증명>이 서비스 중이라 읽어보기로 했다.
소설을 다 읽은 후 계속 머릿속에서 스토리가 떠나지 않았다. 이런 적이 많지 않았다. 특히 소설을 읽을 때는 영화 보듯 재미를 위해 여가 시간을 즐겁게 보내기 위한 단순한 취미활동처럼 읽는 경우가 많았다. 다 읽고 나면 여러 의미로 좋았던 작품들은 '아 좋다. 재미있었다.'와 같은 뭉뚱그려진 감흥만이 남았고 며칠이 지나면 그 내용이 잘 기억나질 않았다.
다른 소설과 에세이들을 읽어도 머릿속 한 구석에 <구의 증명> 스토리가 잊히지 않고 남아 '아 이 정도면 올해 내가 읽은 소설 베스트 몇 권에 속할 작품이었고 이 작품에 대한 글을 써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서 현재 노트북 앞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도대체 왜 긴 시간 동안 내 기억 속에 남아 잊히지 않는가에 대해 고민하면서.
소설 맨 끝 '작가의 말'에서 출발하여 풀어보고자 한다.
지난날, 애인과 같이 있을 때면 그의 살을 손가락으로 뚝뚝 뜯어 오물오물 씹어 먹는 상상을 하다 혼자 좋아 웃곤 했다. 상상 속 애인의 살은 찹쌀떡처럼 쫄깃하고 달았다. 그런 상상을 가능케 하는 사랑. 그런 사랑을 가능케 하는 상상. 글을 쓰면서 그 시절을 종종 돌아봤다. (중략)
그렇다. 최진영 작가는 애인과의 일상에서 시작된 상상으로 <구의 증명>이라는 소설을 썼다. 소설의 줄거리를 간략히 소개하자면 '구'와 '담'이라는 아이는 어릴 적부터 친한 친구로 지내다 사귀게 되는데 둘은 시간이 갈수록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구는 구대로 담은 담대로 불완전한 가정적 환경과 재정적 어려움으로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적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서로에게 희망이 되어주며 사랑을 피워간다. 그러다 구가 죽게 되는데 담은 자신이 사랑하는 구를 먹음으로써 자신 안에 여전히 살려두려고 한다.
어떤 이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게 사는 거냐고, 답 없는 삶이라고 말할 것이다. 살면서 이미 그런 말을 수차례 들었다. 그런 구가 진짜 죽었다. 죽었는데도 그런 말을 듣게 할 수는 없다. 죽었는데 잘 되었다니. 견딜 수 없다. 지금도 구를 찾고 있을 자들이 구의 죽음을 안다면, 분명 구의 몸을 팔려고 할 것이다. 구의 몸을 당당히 가져가서 닭고기 팔 듯 팔 것이다. 그들에게 구는 살아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구를 미친 듯 찾게 만들고, 찾지 못하여 미치게 해야 한다. 어째서 사망신고를 해야 하는가.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구가 죽었다고, 내 이름으로 그것을 증명해야 하는가. 그럴 수 없다. 여기 내 눈앞에 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몸이 있는데. 만지고 안을 수 있는데.
그 누구도 몰라야 한다.
어차피 관심 없지 않았는가. 사람으로서 살아내려 할 때에는 물건 취급하지 않았는가. 그의 시간과 목숨에 값을 매기지 않았는가. 쉽게 쓰고 버리지 않았는가. 없는 사람 취급 하지 않았는가. 없는 사람 취급받던 사람을 없는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다.
이렇게 아름다운 몸을 땅에 묻을 수도 불에 태울 수도 없다.
구는 여기 내 눈앞에 있다.
이들의 사랑이 너무 절절해서 비현실적으로 보일만큼 꽉 차 보여서 어찌 보면 오글거리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구와 담 각자의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고 안타까운 상황, 그 속에도 서로에게 희망을 발견하는 사랑의 힘. 그리고 죽어서도 사랑하는 이의 곁에 머물며 다음을 기다리는, 죽어서도 사랑하는 이의 모든 구석구석을 먹어 함께 하려는 애절함이 작가의 깊이 있는 서술로 하나하나 다 전달되었다.
작가의 어느 날 상상에서 비롯되었지만 자칫 개연성 없는 호러물로 빠지지 않은 것은 아마도 작가가 소설을 쓸 때 한시적으로나마 구와 담이 '되어' 그들의 삶을 살았기 때문인 것 같다. 소설 속 인물을 창조해 내어 그들의 말과 행동들을 서술할 때 그들이 '되어'보지 않고 그들의 배경, 삶, 가치관 등을 '아는' 것에서 그친다면 이런 깊이 있는 소설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표면적으로 겉도는 스토리를 그려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소설이 그토록 잊히지 않고 남은 것은 인물이 처한 현실과 심리 등을 너무나 깊게 파헤쳐 그 절절함이 그 작품을 읽은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떻게 죽은 이후의 한 인간의 감정과 생각까지 이리 세밀하고 감성적인 시선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 작가는 구가 되었고 구의 말을 서술할 땐 작가가 아니라 구가 쓰지 않았을까.
네가 지금 죽더라도 우리 영혼이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나는 아직 노마도 이모도 만나지 못했으니까.
우리가 몸을 가진 존재로 다시 태어나 만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태어났고 죽었지만 아직은, 다시 태어나지 못했으니. 다시 태어나 다른 존재로 만난 너를 내가 사랑하게 될까. 다른 존재인 나를 네가 사랑해 줄까. 그 역시 알 수 없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너 아닌 그 어떤 너도 상상할 수 없고, 사랑할 자신도 없다. 이승에서 너를 사랑했던 기억, 그 기억을 잃고 싶지 않다. 그러니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네가 나를 기억하며 오래도록 살아주기를. 그렇게 오래오래 너를 지켜볼 수 있기를. 살고 살다 늙어버린 몸을 더는 견디지 못해 결국 너마저 죽는 날, 그렇게 되는 날, 그제야 우리 같이 기대해 보자. 너와 내가 혼으로든 다른 몸으로든 다시 만나길. 네가 바라고 내가 바라듯, 네가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은 후에, 그때에야 우리 같이.
언젠가 네가 죽는다면, 그때가 천 년 후라면 좋겠다.
천 년토록 살아남아 그 시간만큼 너를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천만년 만만년도 죽지 않고 기다릴 수 있으니까.
영화를 볼 때 무서운 장면이 나오면 영화관에서도 눈앞을 손바닥으로 가린다. 소설을 읽다 가혹한 현실에 처한 인물이 나오면 어렵사리 읽으면서도 그가 처한 상황에 나까지 고통스럽다. 그런 등장인물이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 하는 작가는 아마 몇 배의 더한 고통 속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마치 배우가 작품의 역할을 다 해낸 뒤에도 그 배역에서 못 벗어날 만큼의 밀도를 가진 고통을 속으로 안으로 밑으로 느껴가며 썼을 것이다.
한 사람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이 되어 그의 삶을 살아보는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