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를 읽고-2. 바깥에서 오는 이야기 쓰기
최근 영문으로 장편소설까지 써 미국의 대형 출판사와 계약한 번역가 안톤 허는 번역과 창작의 이분법에 대해 몸서리치며 항변한다. 마치 번역은 창작으로 대변되는 글쓰기의 아랫 단계이자 창작이 아니라 그저 많은 기술 중 하나라는 듯, 번역가는 무슨 무료 투어가이드인 듯 작가를 대우해 주는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현 세태에 대해 수그리고 침묵하기를 사양한다고, 아주 힘든 싸움이지만 끝까지 번역가 사회를 위해 맞서겠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중 하나, 작가와 번역가는 위, 아래 계층으로 분리되지 않으며 작업하는 과정 또한 다르지 않은, 두 사람 다 하나의 작품을 창작해 내는 예술가라고 말한다. 소설을 쓰는 번역가, 번역을 하는 소설가인 안톤 허는 이를 그가 읽은 수많은 책들 속에서 발견하였으며 깊은 공감을 그의 에세이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에 표현했다. 아래와 같이.
베스트셀러 작가 리 차일드가 잭 리처 시리즈 창작 과정에 대해 쓴 기사를 읽었습니다. 리 차일드는 소설을 쓸 때 첫 문장부터 끝 문장까지 독자가 읽는 순서대로 글을 씁니다. 결말이 대략 어떤 내용인지는 어렴풋이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개요도 짜지 않습니다. 과연 데드라인 안에 책을 송고할 수 있을지가 매번 고민인데 아직까지는 한 번도 데드라인을 놓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독자의 위치에서 스토리 전개를 확인하고, 모든 상황의 반전과 감정 변화를 독자와 똑같은 타이밍에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초고를 끝낸 후에도 힘겨운 편집 단계를 거쳐야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써야만 소설의 '뛰는 심장'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아니 이건… 내가 번역하는 순서와 같잖아. 그 이유마저 똑같다니!'
- 책 195쪽에서
책에 따르면 의외로 많은 번역가들이 번역 시작 전 책을 끝까지 읽지 않는다고 한다. 최대한 '처음 읽는 느낌'을 보존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안톤 허는 의식보다 무의식에 더 의존하며 한국어 원서를 읽으며 무의식이 그것을 영어로 번역할 때까지 기다린다고 한다. 무의식에서 솟아오르는 영어를 받아 적는다고 보면 된다고. 물론 문법, 톤, 암시를 나타내는 표현 등 의식적으로 해법을 모색하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과정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뛰는 심장'을 가진 초고를 완성한 다음 순서라고 한다.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도 자신의 언어가 자신의 내부가 아니라 외계인의 교신처럼 자신의 바깥에서 오는 듯하다고 말합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여성의 전문직>이라는 에세이도, 시애틀 서브루너리 출판사에서 출판될 예정으로 제가 지금 번역 중인 이성복 시인의 <무한화서>라는 시론집도 이 방법을 묘사합니다.
울프는 에세이에서 호수 앞에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물속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며 이를 창작에 비유합니다. 즉 조용히 문장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다 보면 문장들이 들려온다는 의미입니다.
이성복 시인은 문장에 입과 꼬리가 있다면서 뒤 문장이 앞 문장의 꼬리를 물고 있어서 첫 문장을 살살 빼기 시작하면 그 뒤 문장들이 줄줄이 따라 나온다고 말합니다. 작가는 그저 좋은 비서처럼 조용히 받아 적기만 하면 됩니다. 유능한 비서는 상사의 뒤죽박죽인 생각과 일정을 잘 정리할 줄 알고, 상사가 일할 수 있는 최고의 여건을 만들어줍니다. 이때 문학도로서의 능력과 교육이 중요해집니다. 가장 중요한 기술은 그래도 받아쓰기지만….
이러한 창작의 고전적 개념화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는 아마도 테리 프래쳇의 소설 <외국으로 간 마녀(Witches Abroad)> 서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프래쳇은 이야기의 원시적 형태에 대해 말합니다. 이야기란 날아다니는 불멸의 기생충이어서 지나가는 이야기꾼 아무에게나 달라붙어 자신을 번식시키려 합니다. 즉 이야기꾼이 가만있어도 이야기 기생충이 알아서 기생을 시작한다는 것이죠.
- 책 198, 199쪽에서
책에는 그가 장편소설을 쓴 과정도 소개되어 있다. 서울의 지하철을 타고 새 로이텀 노트를 펼친 채 소설의 언어가 찾아오길 기다렸다고 한다. 그렇게 자신에게 온 첫 문장 "내 흉터가 돌아왔다."을 받아 썼고 다음 문장이 찾아와 또 받아 썼고, 그다음 문장, 또 그다음 문장이 찾아와 받아 썼다고 한다. 그렇게 문장이 줄줄 써지는 경험, 단지 조용하게, 최대한 무심하게 받아 적기만 하면 되었다고 말하는 안톤 허. 생산되는 문장들을 편집하려 하거나 다른 감정이 이입되는 것도 막아버리듯 문장들이 생물처럼 무의식 속에서 헤엄치듯 빠져나왔다고 한다.
아직 소설을 써본 적도 없고 번역을 해 본 적도 없다. 작가의 에세이를 통해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지만 작가가 글을 쓰는 과정과 번역가가 번역을 하는 과정을 간접적으로 겪어볼 수 있었고 두 과정은 하나같이 예술적이었다. 작가는 자신의 외부에서 오는 이야기, 번역가는 원서 속 이야기를 마치 무아지경과 같은 몰입 속 무의식에 빠져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문장 하나하나를 받아 적는 사람들이었다.
작가 리 차일드의 소설창작 과정,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욘 포세의 '외계인의 교신', 버지니아 울프의 '물속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성복 시인의 '문장에 입과 꼬리가 있다' 그리고 테리 프래쳇의 '이야기란 날아다니는 불멸의 기생충'을 통해 작가들 또한 자신에게 불현듯 다가와 머릿속에 떠오른 하나의 이야기를 받아 적는 사람들이었다. 번역가가 원서를 차근차근 읽으며 들리는 도착어를 받아 적듯이. 작가와 번역가 모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이 아니다.
물론 안톤 허의 주장을 읽은 작가들 중 심기가 불편한 작가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번역가가 단순히 하나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기술자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번역하기 전에 한 명의 독자가 되어 역서를 읽을 독자들의 감정선을 철저하게 따라가며, 작가는 할 수 없는 적확한 표현을 수많은 선택안 중 하나를 결정하여 써 내려가는 과정은 하나의 예술이자 완성작은 번역가 자신의 작품인 것이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은 이제 너무나 많다. 그래서인지 나도 번역이나 한 번 해볼까 하는 사람들이 많은지도 모른다. 아마 번역을 단순히 해석, 영작으로 치부한 것일지도. 해석, 영작에서 번역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너무나 많다. 문체, 어투, 그 스토리가 담고 있는 문화와 역사, 동의어들 중 가장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는 표현을 선택하기 등등. 또 한 언어의 뇌에서 다른 언어의 뇌로 넘어가는 과정은 육체활동과도 맞먹는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래서 저자 안톤 허는 번역은 몸으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한국문학 번역가는 전 세계 통틀어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며, 안톤 허가 유일한 한국인인 것으로 알고 있다.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처럼 한국문학 번역가들 중 외국인도 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다섯 손가락이라는 숫자 5가 그 어려움을 증명해 준다.
번역은 단순한 해석이나 영작이 아니다. 작가와 같이 자신에게 떠오르는 문장들을 받아 적어 내려가는 것이다. 다른 언어로 되어있는 문장일 뿐. 이에 더해 적확한 단어 하나, 문체, 등장인물의 어투, 스토리에 엮여있는 문화와 역사 등을 고려하며 작은 것이 큰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사명감으로 예민하게 텍스트를 써 내려가는 창작하는 예술가이지 않을까.
한 때 한국문학 번역가를 꿈꿨던 그때를 떠올려 본다. 나도 번역가를 한낱 기술자로 보는 시선을 갖진 않았는지, 번역의 과정을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작업으로 생각하진 않았는지.
문학 작품을 포함해 책을 볼 때마다 나는 작가뿐만 아니라 번역가도 누구인지 챙겨본다. 작가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번역가도 유명해지는 날이 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