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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 Choenghee Sep 07. 2023

꾸준함이 주는 선물

추억이 깃든, 여전한 카페에서 우연히 발견한...

 남편 그리고 딸과 함께 집 근처 도서관에 들렀다. 유아자료실에 갔더니 학교가 개학을 해서인지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언니, 오빠, 또래들에 관심이 더 많은 딸은 아빠, 엄마를 제외하고는 유일한 타인인 유아자료실에서 일하시는 사서분께 끊임없는 눈길을 보내고 검지로 그분을 계속해서 가리키며 말을 했다. 다행히 사서분께서 딸을 귀여워해주시며 "이리 와봐, 걸어와봐, 악수하자" 하시면서 딸이 보내는 눈길과 손길에 따뜻한 반응을 해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딸에게 그림책 몇 권을 읽혀주었고 딸은 이리저리 온 사방을 기어 다니고 일어섰다가 다시 기며 열심히 유아자료실의 탐색에 매진했다.  


 한 시간쯤 흘러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 같아 딸을 유아차에 태워 남편과 도서관을 나섰다. 5분 정도 걸었을까. 딸이 마침 잠들었다.

 "오빠, 이럴 때 카페 가야 해. 가서 여행 계획도 짜고 책도 읽을까요?"

 나의 제안에 남편은 좋다고 응답했다. 그리고는 마침 근처에 있던 연애 때 갔었던 카페로 향했다. 새로 생기는 음식점과 카페가 많아지는 만큼 사라지는 곳들도 많은데 다행히 우리의 추억이 존재하는 카페가 거기 그대로 여전해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 카페는 초록 식물들과 무심한 듯 시크한 철제 책장,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조명이 특징이다.
유아차에 잠든 딸은 우리에게 카페에서의 데이트 시간을 허락했다.


 초록초록한 식물들과 무심한 듯 시크한 철제 책장, 디자인, 인테리어, 라이프스타일 등과 관련된 매거진, 단행본들이 있는 것도 여전했다. 카페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는데 카페 안을 채우고 있는 것들까지 그대로여서 연애할 때 앉았던 그 자리를 바라볼 때면 그 시간에 거기 앉아 많은 것을 공유했던 우리가 보이는 듯했다. 잠시 추억에 젖어있다 카페 책장을 구경하며 관심 있는 매거진 B 몇 권과 무라카미하루키가 자신이 갖고 있는 티셔츠에 대해 쓴 에세이 <무라카미 T>가 보여 테이블로 가져왔다.    




<매거진 B>의 Instagram, Seoul, Freitag, 그리고 <무라카미 T>. 우리가 주문했던 베이지라테 두 잔까지.


 <매거진 B>를 훑어보다 남편과 프라이탁, 인스타그램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프라이탁의 친환경성과 높은 가격의 아이러니하지만 사게 되면 갖게 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 갖고 있는 가방이 된다는 그 유일함과 특별함의 가치,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의 효율적인 이용방법 등등에 대해서. 그러다 남편이 잠시 볼 일이 생겨 나와 딸만 카페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앉아있던 다른 손님들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남아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무라카미 T>를 본격적으로 읽어보려 책을 내 쪽으로 가까이 가져왔다. 처음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유명한 작가라 그런지 별 것 아닌 소소한 주제들로 글을 써도 책이 되는구나'라고. 나에게 별로 도움이 되는 발전적인 생각도, 긍정적이지도 않은 후기였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구절을 만나고는 그 생각이 180도 전환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티셔츠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모인 것'이다. 값싸고 재미있는 티셔츠가 눈에 띄면 이내 사게 된다. 여기저기에서 홍보용 티셔츠도 받고, 마라톤 대회에 나가면 완주 기념 티셔츠를 준다. 여행 가면 갈아입을 옷으로 그 지역 티셔츠를 사고...  


오래 살다 보니 이렇게 모인 티셔츠 얘기로 책까지 내고 대단하다. 흔히 '계속하는 게 힘'이라고 하더니 정말로 그렇군. 뭔가 나 자신이 계속성에만 의지하여 사는 듯한 기분마저 들 정도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사면서 그게 무엇이 되었든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것이 가지는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책은 단순히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가 티셔츠에 대해 가지는 소회, 티셔츠의 특징에 대해 쓴 게 아니었다. '티셔츠가 좋아서 샀다. 디자인과 가격은 이러쿵저러쿵'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티셔츠, 혹은 티셔츠에 그려진 프린팅에 자신과 관련된 어떤 것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며 꾸준하게 사모아온 티셔츠가 만들어낸 이야기였고 책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꾸준함이 가져다주는 힘에 대해 쓴 에세이가 또 있다. 많이들 알고 있는 그 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아래 구절이 당시 와닿아 북다트를 해당 부분에 끼워두어 빨리 찾아 읽을 수 있었다.


집중력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지속력이다. 하루에 3시간이나 4시간 의식을 집중해서 집필할 수 있었다고 해도, 일주일 동안 계속하니 피로에 지쳐버렸다고 해서는 긴 작품을 쓸 수 없다. 반년이나 1년이나 2년간 매일의 집중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소설가에게는-적어도 장편소설을 쓰는 작가에게는-요구된다. 호흡법으로 비유해 보면, 집중하는 것이 그저 가만히 깊게 숨을 참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숨을 지속한다는 것은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호흡해 가는 요령을 터득하는 작업이다. 그 두 가지 호흡의 밸런스가 잡혀 있지 않으면 몇 년 동안에 걸쳐 전업 작가로서 계속 써나가기 어렵다. 호흡을 멈추었다 이었다 하면서도 계속할 것.


이와 같은 능력(집중력과 지속력)은 고맙게도 재능의 경우와 달라서, 트레이닝에 따라 후천적으로 획득할 수 있고, 그 자질을 향상시켜 나갈 수도 있다. 매일 책상 앞에 앉아서 의식을 한 곳에 집중하는 훈련을 계속하면, 집중력과 지속력은 자연히 몸에 배게 된다. 이것은 앞서 쓴 근육의 훈련 과정과 비슷하다. 매일 쉬지 않고 계속 써나가며 의식을 집중해 일을 하는 것이, 자기라는 사람에게 필요한 일이라는 정보를 신체 시스템에 계속해서 전하고 확실하게 기억시켜 놓아야 한다. 그리고 조금씩 그 한계치를 끌어올려 간다.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금씩, 그 수치를 살짝 올려간다. 이것은 매일 조깅을 계속함으로써 근육을 강화하고 러너로서의 체형을 만들어가는 것과 같은 종류의 작업이다. 자극하고 지속한다. 또 자극하고 지속한다. 물론 이 작업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만큼의 보답은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은 소설가이다. 더도 덜도 말고 매일 원고지 20매를 쓰는 규칙적인 생활을 해오고 있다. 소설가라는 직업을 계속해나가기 위해서는 재능, 집중력뿐만 아니라 이렇게 꾸준히 써나갈 수 있는 지속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 꾸준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매일 10Km씩 러닝도 해오고 있다고 한다. 매일 소설 쓰기와 매일 러닝이 가져다주는 상호보완성과 그들이 주는 힘은 1949년, 올해 나이로 만 74세의 나이의 하루키가 계속 소설을 쓸 수 있는 힘을 낼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 힘으로 또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썼지 않았을까. 매일 러닝을 하며 커피 한잔과 함께 스스로 정한 분량만큼의 소설을 써나가는 한 유명한 소설가의 일상을 막연하게 상상해 본다.         




삼 단으로 구성된 베이지 라테. 우유, 커피, 크림.


 꾸준함이 주는 선물을 받기 위해서 나는 일생동안 무엇을 꾸준히 해볼 것인가. 생각해 보았다. 퍼뜩 생각나는 것은 영어교육, 운동, 글쓰기. 그러곤 섞지 않고 마셔야 맛있는 베이지 라테를 문득 쳐다보았다. 우유, 커피, 크림, 그 세 개가 주는 고소하고 달콤 씁쓸한 맛의 베이지 라테가 마치 방금 나의 결의를 비유한 것 같았다. 영어교육, 운동, 글쓰기에 꾸준히 투여하는 나의 노력으로 오는 선물은 무엇일까. 아주 맛있는 한 잔의 베이지라테 같은 선물이 무엇일까 기대하며 멈추지 말고 꾸준히 해보자고 한 번 더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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