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늑대의 시간
지병이 도졌다. 운전대를 잡은 남편에게 급히 차를 몰라고 재촉했다. 늦가을 날이었다. 강원도 단풍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 병이 도진 것이다. 새로 난 경춘 고속도로에 길게 늘어진 차들은 영락없는 개미 줄 모양이었다. 서쪽 산 너머로 붉은 해가 차츰차츰 떨어지고 있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산을 넘어야만 하는 옛날이야기 속 나그네처럼 마음이 다급해졌다. 차라리 깜깜한 밤이면 좋겠다며 남편에게 투정 섞인 쓸쓸한 변명을 했다.
해넘이가 가까워져 오면 급작스레 집으로 돌아가고픈 증상은 어른이 된 지금까지 여전하다. 나는 이 병을 오래도록 앓고 있으며 내 마음대로 가져다 붙인 이름은 ‘까무룩 병’이다.
오후 4시 40분. 하루 중 이 시간이 가장 지루한 시간이다. 직장인의 경우 퇴근하기까지는 한 시간도 넘게 남았고 미루어 놓았던 일을 시작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집에 있다면 낮잠을 자기에도 부담스럽고 커피를 마시기에도 역시 부담스러운 시간이다. 이럴 때 오늘따라 내가 보고 싶다며 친구에게서 전화라도 한 통 걸려와 준다면 더없이 반가울 것 같다. 겨울이라면 급작스레 성긴 눈발이 훨훨 날려주면 좋겠고 봄이라면 연분홍 꽃잎이 바람결 따라 분분히 날려주어도 괜찮겠다. 여름이라면 더위를 식혀줄 소나기가 한바탕 지나가면 좋겠고 늦은 가을이라면 뒤뜰 후박나무가 남아있던 한 잎마저 그예 떨구어 낼지도 모르는 시간이었으면 한다.
내 지병은 나이 어렸던 어떤 날에, 지금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어떤 시간 속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놀다 돌아와 대문턱을 넘으며 엄마를 불렀을 때, 대가족으로 언제나 왁자하던 집에는 아무도 없고 안채 기와지붕 잿빛 그림자만 마당 가득 쌓여있던 날.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텅 빈 집이 무서워 울먹울먹 하던 그때. 부엌에서 나오는 엄마를 발견하고 와락 달려들어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끝내 참았던 눈물을 앙 터뜨렸던, 아슴푸레한 기억 속 어느 날이 있었을 테다. 해넘이가 빨랐던 시골집이었고 그때가 마침 늦은 가을이었고 첫눈이라도 올 듯 사위가 어둑해졌을 오후 4시 40분쯤이었을지 모른다.
벨기에 그림책 작가 안 에르보는 “불을 켜기엔 아직 환하고 책을 읽거나 바느질하기엔 조금 어두운 시간, 읽던 책을 그대로 펼쳐놓은 채 생각에 잠기고, 꿈을 꾸는 시간. 펼친 책장이 희미한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시간. 땅거미 질 무렵의 아슴푸레한 시간.”이라며 이런 시간을 ‘파란 시간’이라 불렀다. 그렇지만 내 병의 색깔은 안 에르보의 파란색은 아니다. 그것은 검정에 파랑이 섞인 암청색이거나 진고동색이다. 병이 처음 생긴 어떤 날 이후로 어둠이 시작될 무렵이면 나는 어린아이로서는 표현하기 어려운, 외로움 같기도 하면서 무엇인가가 가뭇없이 사라지는 느낌과 무거움과 무서움이 밀려와 깊은 곳으로 가라앉던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엄마의 목소리만으로 세상이 다시 환해졌던 기억은 머릿속 깊은 곳에 어렴풋이 자리 잡게 되었을 것이다.
까무룩 현상. 어른이 되면서 그 현상이 자기가 태어난 곳을 잊지 않고 본능적으로 찾아간다는 개미나 연어 같은 동물의 귀소본능 비슷한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귀소본능은 동물의 경우 온도나 냄새나 지형을 기억하는 능력이 발휘되어 나타나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람의 경우에는 뇌에 저장된 자료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돌아가는 양상을 보인다고 한다. 귀소본능과 비슷한 말로 모처母處로 돌아가고자 하는 내면의 근원적 심리를 뜻하는 회귀본능이라는 말도 있다. 인디언 중 나바호족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어머니 자궁 속 아이처럼 웅크리게 해서 해가 뜨는 쪽으로 머리를 향하게 매장하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내 병도 귀소성이나 회귀성에 기인한 것임이 틀림없는 듯하다. 병이 도질 때면 아슴했던 그날의 무거웠던 시골집 잿빛 그림자와 마당에 낮게 깔리던 저녁연기와 엄마 몸에서 났던 부엌 냄새가 이끌려 나오기 때문이다.
해가 넘어가려나 보다.
늙은 엄마의 온기 어린 얼굴과 집 된장찌개 냄새가 무의식 속 어느 날의 어스름 저녁 햇살을 타고 넘실거린다.
나는 또 까무룩 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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