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은실 Jan 07. 2024

간난 할머니의 다이내믹

할머니의 줄넘기 다이어트

흑백 TV 시절이었다. 우리 집에도 드르륵 미닫이문이 붙어있고 물 먹는 기린처럼 다리를 빗각으로 세운 흑백 TV가 있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입에서 줄줄 따라 나오는 노래가 여러 개 있다. CM 송인데 노랫말이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 손에 담아드려요.” 하는 오란 C를 비롯해 “12시에 만나요. 브라보콘”이랄지 “손이 가요 손이 가…” 하는 새우깡까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TV 화면이 컬러로 바뀌어 제품이 확실하게 보이게 되면서 눈은 호사를 누렸으나 CM 송은 멀어진 듯했고 왠지 낭만마저도 사라져 버린 듯했다. 

유명세를 누렸던 광고음악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곡에 대한 추억 한 자락이 있다. 그 음악은 dynamic 표 트레이닝복 광고에 나온 것이었는데 흑백 화면이라 탁하게 보여서 그렇지 트레이닝복 실물은 파란색으로 바지 옆 라인에 하얀 줄무늬가 박힌 것이었다. 남녀 모델이 운동복을 입고 줄넘기를 하는 장면이 나왔고 광고 노래는 ‘다~이나믹, 다~이나믹, 다~이나믹, 젊음의 체력은 다이나믹~!’이라는 가사의 연속이었다. 

친구들과 고무줄놀이를 하다가도 졸도를 할 만큼 천생 허약 체질이었던 나의 눈과 귀는 그 광고에 머물렀다. 엄마한테 당장 줄넘기를 사달라고 졸랐다. 줄넘기 실력을 길러서 고무줄놀이에서 왕따 당했던 설움을 씻어내고 싶었다. 엄마가 흔쾌히 사다 바친 줄넘기로 집 안 마당에서 수백 번 연습을 했다. 마음속으로는 연신 다이나믹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여러 가지 방법의 줄넘기를 제법 잘하게 된 나는 고무줄 놀이터인 느티나무 아래 넓은 마당으로 진출했다. 

그날은 웬일인지 고무줄 하는 친구들이 한 명도 없었다. 자랑할 친구들이 없어서 다소 실망감은 들었지만 나무 아래 평상에 할머니 한 분이 앉아있어서 무관중은 면했다. 그동안 갈고닦은 솜씨를 뽐내며 열심히 줄넘기를 했다. 그런데 버릇처럼 마음속으로 따라 부르던 다이나믹 노래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던 모양이었다. 숨을 할딱이며 어눌한 발음으로 이렇게. “다~나미, 다~나미…이….” 

내 줄넘기 솜씨를 바라보던 할머니 안면에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심지어 “간~난이… 간~난이….” 이러면서 내 노래에 맞춰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잠시 후 할머니는 나에게 물었다.

“언년아, 너 시방 무신 노래 불렀냐? 그 노래 어디서 배운 겨?” 줄넘기를 멈추고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며 “테레비에 나왔어요. 그리고 나는 언년이가 아닌데요.”라고 답을 했다. 할머니는 “언년이 너 내일 이 시간에 여기 나와서 줄넘기를 해야 한다. 꼭.”이라며 일방적인 약속을 하고는 여전히 방싯거리며 자리를 떴다. 

졸지에 언년이가 된 나는 그다음 날 약속 장소로 나갔다. 오늘은 두 분이 앉아있었다. 인사를 드리고 줄넘기를 시작했다. 내가 줄넘기를 시작하자 어제 그 할머니는 노래를 해보라고 재촉을 했다. 멋쩍었지만 줄넘기를 넘으며 나는 광고 노래를 불렀다.  “들었지? 내 이름이 테레비에 나온다는 겨.” 할머니는 생긋거리며 자랑을 했다. 줄넘기를 멈춘 뒤 나는 언년이가 아니고 그 노랫말도 간난이라는 뜻은 아닐 거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옆에 있던 할머니가 “테레비에 막순이는 안 나오더냐?”라고 묻는 바람에 내가 먼저 그 자리를 떴다. 저녁에 다시 그 광고를 보면서 큰언니한테 다이나믹의 뜻을 물었다. 내가 생각한 대로 간난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다음 날 약속 장소에 나가 가사의 참뜻을 알려드리고 싶었지만, 할머니는 나오지 않았다.     

누구네 할머니였는지 생각은 나지 않지만, 할머니의 여생은 다이내믹했으리라 짐작한다. 아는 게 힘이라고 배웠지만 자라면서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젊을 때는 모르고도 아는 척하는 허영이 있었다면 나이 반백을 넘기다 보니 알고도 모른 체할 때가 종종 있다.  

흑백 TV 시절 언년이의 어떤 날, 몰랐었기에 썩 괜찮았던 간난 할머니의 다이나믹 인생을 옛 추억의 창고에 쌓아놓는다.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23987814

작가의 이전글 죠다쉬와 샤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