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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실 Jan 10. 2024

천상에서 컵라면을

컵라면은 알프스 정상에서

마침내 케이블카가 슝슝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 기계가 『잭과 콩나무』의 콩나무가 되어 오래전부터 꿈꾸어 오던 저 높은 세상으로 나를 데려다줄 것이다.              
  

스위스 중부 최고봉 티틀리스를 오르는 날이었다. 티틀리스는 알프스산맥의 일부로 해발 3,020m의 산이다. 기대 반 두려움 반이었다. 3,020m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높이였다. 우리 동네 아차산보다 높고 서울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인 백운대보다도 높았다. 지리산보다도 백두산보다도 훨씬 높은 곳이다. 아차산에 올랐을 때 현기증으로 정신을 잃었던 적이 있었던 나로서는 두려움이 컸다. 그렇지만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새하얀 설국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내 가슴은 잔뜩 부풀어 있었다. 한여름에도 녹지 않는 만년설이 하얗게 펼쳐지는 설산이라더라. 아직은 4월이니 눈꽃빙수처럼 소복이 쌓인 눈이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의 영롱함으로 나를 반겨주리라.   


케이블카가 움직이자 원두막에서 수박밭을 지키던 커다란 눈망울의 아이가 떠올랐다. 원두막 위에서 여름방학 책을 펼쳐놓고 아이가 숙제를 하고 있을 때였다. 진초록 수박밭 저 끝에서 더운 바람과 함께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소낙비는 흡사 성난 파도처럼 울컥울컥 원두막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초록 비는 수박밭을 삼키고 원두막을 삼키고 아이를 삼킬 것만 같았다. 한바탕 퍼붓던 비가 그치자 먼 하늘 끝자락에서 파란 하늘이 쏘옥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아이는 멀찌감치서 파랗게 열리는 하늘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분명 저 하늘 위에는 우리 동네보다 훨씬 멋있는 마을이 있을 거야. 춥지도 덥지도 않고 꽃들은 아름답고 바람결이 고우며 숙제가 없고 수박밭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마을이. 내가 머리에 이고 사는 하늘을 땅으로 삼고 무지갯빛 또 다른 하늘이 머리 위에 펼쳐지는 세상이. 잠자리 날개 같은 옷을 입은 선녀가 커다란 부채를 들고 미스코리아 언니처럼 폼 잡고 왔다 갔다만 하는 하늘나라가.’ 

얼마 전에 읽은 『잭과 콩나무』를 기억해 낸 아이의 상상은 자꾸자꾸 커져만 갔다. 어른이 되면 기필코 저 하늘 꼭대기에 올라가 보리라. 동화 속 주인공 잭처럼.       

어느새 케이블카는 목적지 티틀리스 정상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평소의 두 배로 뛰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펼쳐져 있는 설경에 마음을 뺏긴 나는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려대며 엉덩이까지 들썩거렸다. 이쪽 자루에는 무엇을 담아 올까. 저쪽 자루에는 무엇을 담지? 정상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특별한 뭔가가 있을 거야. 동화 속 잭도 아니면서 나는 막연하게 마음속 자루를 준비했었나 보다.     

드디어 케이블카의 문이 열렸다. 첫발을 내디뎠다. 상상했던 대로 세상은 눈 천지였다. 달나라에 첫발을 내디뎠던 암스트롱의 기분이 이랬을까. 진짜 암스트롱이라도 되는 양, 나는 눈 위를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톡 건드리기만 해도 쨍하고 금이 갈 것 같은 파란 하늘, 눈이 부셔서 선글라스를 끼지 않고는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환상의 은빛 세상. 어디가 땅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도무지 분간되지 않았다. 발그레한 얼굴로 보드나 스키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은 사진엽서에서 보았던 그대로였다. 발아래서 하얀 눈을 덮어쓰고 울뚝불뚝 솟아오른 알프스산맥의 봉우리들은 달력에서 보았던 멋진 풍광 그 자체였다. 양팔을 벌려 이 세상을 온몸으로 느끼고 바람을 맞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세차게 두근거리던 심장박동이 차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가슴 깊숙이 바람을 들이마셔 보았다. 심심했다. 다시 한번 있는 힘껏 들이마셨다. 밍밍한 바람 맛이 코를 지나 입 안에 머물렀다. 

‘이게 뭐야? 이게 다야?’ 땅 위에서 느꼈던 바람 맛과 그다지 다르지 않음에 실망감도 함께 입 안에 머물렀다. 그토록 원했던 높디높은 은빛 세상에 내가 서있는데, 어릴 적 원두막 너머에서 열렸던 하늘보다 더 진한 파란색 하늘을 마주했는데 허한 밋밋함이라니. 지구와는 다른 세상에 첫발을 디딘 기쁨도 잠시, ‘그래도 혹시?’라는 기대를 깨부수겠다는 듯 짐작대로 계수나무도 없고 떡방아 찧는 옥토끼도 없는 달 위에서 암스트롱도 이처럼 허망했을까. 나는 한동안 멍하니 그렇게 서있었다. 하얀 눈밭과 파란 하늘 아래서 허한 입맛만 쩝쩝 다셨을 뿐이었다. 귀가 먹먹해지면서 현기증이 일어났다.     
  

주어졌던 자유 시간 2시간 중 반도 넘기지 못하고 그만 휴게실 의자에 털썩 앉았다. 분명 고산병 증세와는 다른 헛헛함에 머릿속이 멍하고 속이 메스꺼웠다. 가방을 열고 준비해 온 매운 컵라면을 꺼냈다. 김이 펄펄 나는 뜨거운 물을 사서 뚜껑을 반쯤 연 컵 안에 붓고 기다렸다. 라면이 익을 동안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평화만 계속되는 낙원은 권태롭다고 누군가가 말했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말이 밍밍한 머릿속을 가르며 별똥별처럼 빗금을 긋고 지나갔다. 다시 한번 어렸을 적부터 꿈꾸어 온 천상을 그려보았다. 신선놀음에 꽃 타령도 하루 이틀이지 기다림도 설렘도 애달픔도 모자람도 없는 천상 생활은 정말로 권태로울 것 같았다. 

잠시 후 컵라면 뚜껑을 열었다. 라면은 꼬들꼬들하니 딱 알맞게 익어있었다. 호호 불어가며 라면 한 젓가락을 들어 입에 넣었다. 라면은 기분 좋게 뜨겁고 짜릿하게 매웠다. 입 안에 머물렀던 밍밍함이 단번에 사라졌다. 평소 매운 걸 잘 먹지 못하던 나였는데 이번에는 국물까지 완전히 마셔버렸다. 매운맛과 뜨거움에 입 안이 얼얼했다. 얼굴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고 메스꺼웠던 속도 진정되었다. 

‘그래, 이거야 이거! 이봐, 암스트롱. 자네도 달나라에 갈 때는 매운 컵라면을 꼭 가지고 가라구.’ 이런 우스운 생각이 어지러운 머릿속을 헤집고 끼어들었다. 흐릿했던 머릿속이 순간 맑아졌다.  

천상에서 컵라면을

윙윙 케이블카는 내려오기 시작했다. 조금씩 내가 사는 땅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 멀리 사람 사는 집들이 보였다. 검은 눈동자, 파란 눈동자, 영어, 이탈리아어, 중국어…. 때가 되면 피고 때가 되면 지는 꽃들. 어제는 미웠다가 오늘은 예뻐 보이는 직장 동료들. 담장 넘어 들려오는 옆집 아기의 울음소리. 달그락 덜그럭 투덜거리며 하는 설거지 소리. 갯버들강아지가 벌써 피었다고 전해오는 친구의 들뜬 목소리. 굽은 허리를 펴지도 못하면서 차 조심하라는 말을 입가에 달고 사는 엄마의 잔소리…. 자잘한 걱정과 욕심거리가 파란 희망으로 뭉쳐지는 우리네 일상. 연둣빛 여린 잎이 녹음을 만들다 나목 되어가는 삶. 이런저런 어수선함이 기쁨으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케이블카의 문이 다시 열렸다. 컵라면을 먹다가 데인 입천장의 꺼끌꺼끌함이 기분 좋게 혀끝에 닿았다. 맵고 뜨겁고 껄끄러운 일상을 마음속 자루에 소중히 담아 드디어 나는 사람 사는 세상에 안전하게 착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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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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