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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실 Jan 13. 2024

네모난 풍경 하나

가을 은행잎 즈려밟기

                                             

10년이 넘도록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그건 마치 잘 찍은 사진처럼 머릿속에 선명하게 보관되어 있다. 
  

버스를 타고 다소 늦은 출근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차 안은 적당히 붐벼 나는 손잡이를 잡고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창 밖은 무르익을 대로 익은 풍경에 걸맞게 노란 은행잎이 땅으로 떨어지던 조금은 쓸쓸한 듯한 가을날이었다. 차에서 내려다본 길에는 미화원 아저씨가 자신이 쓸어 모아놓은 은행잎 무더기를 노란 리어카에 실어 담고 있었다. 이미 차가 지나온 뒤쪽 길은 말끔했고 지나갈 앞쪽 길 위에는 노란 양탄자를 펼쳐놓은 듯 은행잎들이 매끄럽게 깔려있었다. 이 아저씨가 맡은 구간의 시작점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끝은 저기 앞 교차로일 거라고 나름대로 짐작했다. 

거기까지는 거리가 꽤 많이 남아있었다. 도로는 아직도 혼잡 상태라 차는 몇 바퀴 굴러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한 줄기 갈바람이 불었나 보다. 갑자기 하늘에서 반짝이 종이 별처럼 금빛 은행잎이 와르르 떨어져 내렸다. 아름다운 광경에 나를 비롯해 차 안에 있던 사람들은 와- 하고 일시에 탄성을 내질렀다. 바람이 밀었을까. 버스는 앞 교차로 쪽으로 몇 발짝 더 나아가 있었다. 그 바람에 아저씨는 버스 뒤쪽으로 물러나 버렸다. 나는 버스 뒤쪽을 돌아다보았다. 아저씨가 쓸어 말끔해졌던 길 위로 바람은 나뭇가지를 흔들어 노란 양탄자 길을 다시 만들어 버렸다. 어쩌면 아저씨는 이른 아침부터 이렇게 쓸어 모으고 담기를 계속했을지 모른다. 그는 모아 담고 바람은 연신 흔들어 대고…. 남자의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까치발까지 하고 고개를 길게 빼 뒤쪽 창 너머로 시선을 건넸다. 이제 남자는 아예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러곤 잠시 후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노란 리어카를 옆에 세워놓고 빗자루를 내팽개친 남자는 굵은 담배 연기를 하늘로 ‘후-’ 올려보냈다. 리어카 옆에 서있는 나무에서 고단한 그의 어깨 위로 은행잎이 하나둘 소리 없이 떨어져 내렸다. 남자가 길게 뿜어낸 담배 연기는 시리도록 파란 빈 하늘 위로 새털구름처럼 하얗게 흩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독히 아름다웠던 가을의 어떤 날, 버스 뒤쪽 네모난 유리창 틀을 프레임으로 삼은, 마냥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는 반듯한 가을 풍경 하나가 전설처럼 내게 남겨지게 되었다.  
  

담배를 피워 물던 남자도 든든하고 존경받는 누군가의 아버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다 아는 가을 정취를 이 남자라고 몰랐을까. 남들처럼 양탄자 깔린 노란 길을 지르밟으며 걷고 싶은 마음이 그 가슴속엔들 설마 없었을까.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남자는 엉덩이에 붙은 은행잎을 털고 일어나 빗자루를 다시 들었으리라.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간 남자는 아마도 아무런 내색도 없이 아내 앞에 붕어빵 한 봉지를 툭 내려놓았을 것이다.   

“웬 거유? 얘들아, 아부지가 붕어빵 사 왔다. 얼른 나와서 식기 전에 먹어.” 자식밖에 모르는 아내의 물음에 침묵으로 답을 한 남자는 저녁 뉴스를 보기 위해 여느 때처럼 조용히 TV를 켰으리라. 아내는 구수한 붕어빵 냄새로 어엿한 대학생이 된 자식들을 상 앞으로 불러 앉혔으리라. 철없는 아내와 멋을 잔뜩 부린 아이들이 맛있게 붕어빵 먹는 광경을 보며 그는 아랫목에 고단한 허리를 누그려 폈을 것이다.             
  

지난가을 은행잎이 유난스레 떨어져 내리던 날이었다. 가로수 길을 걷고 있는 내 옆쪽으로 큰 차 한 대가 쉬이익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커다란 청소차는 길가에 모아놓은 은행잎을 집어삼키며 내 옆을 서서히 지나갔다. 청소차가 지나간 도로는 깨끗했다. 

은행잎 떨어지는 가을이면 조금은 무거워졌던 내 마음속이 그날만은 바람 따라 공중으로 올라가는 낱장 은행잎처럼 가벼웠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지금쯤 그 남자의 가슴속에도 묵혀두었던 가을 낭만이 서서히 차오르면 좋겠다는 생각에 하염없이 떨어지는 노란 은행잎이 그렇게 밉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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