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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효 May 08. 2023

교산 허균 웅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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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교산 허균 웅비하다

                         







 중년 사내의  양손, 양다리가 밧줄로 단단히 묶였다. 밧줄 네 가닥은 육중한 소가 끄는 수레에 매어지고 형졸들은 사형집행관의 명령을 기다렸다. 산발한 사내는 두려움에 몸을 부르르 떨기도 하고 뭐라고 웅얼거리며 항거도 했지만, 형졸들은 실실 웃으며 신경 쓰지 않았다. 해가 중천에 오를 즈음이었다.      


    

 아침부터 한양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군기시(軍器寺) 앞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몰려든 사람들은 조선 사회에서 천덕꾸러기로 박대받는 서얼(庶孼)들과 하층민으로 분류된 기생, 중, 노비, 백정들이었다. 집행관은 백성들 앞으로 나가더니 죄인의 죄상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무오년(1618년) 무렵에 여진족의 침범이 있자 명국에서 군사를 동원하였다. 조선이 여진의 본고장인 건주(建州)에서 가까워 혹시 있을지도 모를 여진의 침략으로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는데 죄인은 긴급히 알리는 변방의 보고서를 거짓으로 만들고 또 익명서를 만들어 ‘아무 곳에 역적이 있어 아무 날에는 꼭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면서 도성 안 백성들을 공갈하였다.     



 죄인은 밤마다 사람을 시켜 남산에 올라가서 부르짖기를 ‘서쪽의 적은 벌써 압록강을 건넜으며, 유구국(琉球國) 사람은 바다 섬 속에 와서 매복하였으니, 도성 안의 사람은 나가서 피해야 죽음을 면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밖에도 죄인은 노래를 지어 ‘성은 들판보다 못하고, 들판은 강을 건너니만 못하다’ 하였다.


    

 소나무 사이에 등불을 달아놓고 부르짖기를 ‘살고자 하는 사람은 나가 피하라.’고 하니, 민심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아침저녁으로 안심할 수 없어 도성 안의 민가 열 집 가운데 여덟아홉 집은 텅 비게 되었다. 이밖에도 김윤황을 사주해서 격문을 화살에 매어 경운궁 가운데 던지게 한 것, 남대문에 붙여진 격문이 등이 모두 죄인의 짓이다.]     



 사지가 밧줄에 묶인 사내는 몸을 비틀며 판결문에 불복하였지만, 입에 재갈이 채워진 상태에서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판결문 낭독이 끝나자 집행관의 수신호와 동시에 ‘이럇!’ 소리가 들렸다. 순간 사내는 허공에 붕 뜬 채 고개를 들고 온몸에 힘을 주고 버둥거렸다. 팽팽해진 육신이 사방에서 잡아당기는 힘을 더는 당해내지 못했다.          



 사내 입에 재갈이 물려졌지만 처절한 비명은 몰려든 사람들 귀에 분명히 전달되고 있었다. 형졸들은 소들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주춤거리자 날카로운 쇠갈퀴로 소의 허벅지며 등을 내리찍었다. 놀란 소들이 사방으로 달아났다.



 사내의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가 몸통에서 찢겨 나갔다. 백성들은 ‘우우우’ 소리를 내며 거인의 능지형(陵遲刑)을 지켜보며 속으로 통곡하였다. 피가 사방으로 튀면서 저잣거리 바닥은 금방 핏물로 촉촉이 젖었다.          



 형졸들이 또 한 번 세차게 쇠갈퀴를 소 잔등에 내리꽂자 소들은 거품을 물며 사방으로 내달렸다. 오른쪽 팔과 왼쪽 다리가 찢어지면서 핏물과 함께 내장이 쏟아져 내렸다. 사내의 머리는 몸통에 겨우 매달려 있는데 두 눈을 부릅뜬 채 재갈이 풀려 혀를 길게 빼내어 깨물고 있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사내의 육신은 고깃덩어리가 되어 저잣거리에 방치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서얼들은 울분을 참지 못해 땅을 치며 통곡하였고 여인들은 두 눈을 가리며 흐느꼈다.

      


 1618년 8월 24일 한양 군기시 앞. 간신배들에 의해 억울하게 대역죄인으로 몰린 허균(許筠)이 처형되었다. 형 집행이 끝나자 맑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면서 뇌성벽력이 쳤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늘이 노했다고 쑤군거렸다. 조선 풍운아의 처참한 시신을 아무도 거두지 못했다.           



 멀리서 아버지의 능지형을 바라보던 아들과 딸, 사위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조선을 저주하였다. 자신들의 죄상을 숨기기 위해 허균에게 죄를 덮어씌운 간신배들에게도 욕설을 퍼부었다. 멀리서 임의 시신을 감시하던 포졸들이 겁에 질린 시선으로 행여 폭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운 시선으로 군중들을 바라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며칠이 지나도록 기린아 허균의 시신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한여름이라 시신에 구더기가 들끓고 파리들이 윙윙거리며 온종일 시신 근처를 맴돌았다. 개들이 시신 주변을 배회하면 임을 추종하던 서얼들과 천민들이 차례로 번을 서가며 임의 시신이 훼손되거나 탈취되는 것을 방지했다.



 어떤 의리 있는 무리는 며칠 밤낮을 임의 처참한 시신이 방치된 저잣거리를 떠나지 못하고 방성대곡하며 분루를 삼키기도 했다.      


    

 보셨는지요? 조선이 임을 능지하던 날의 슬픈 광경입니다. 임에게 자초지종을 들어보지도 않고 임금과 간신배들은 서둘러 형을 집행하였답니다. 임조차도 차마 능지형이 내려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임이 원통하게 가신 이후 위정자들은 임을 만고역적으로 몰아세웠답니다. 간악한 자들의 시기와 질투가 빚어내 거대한 음모였습니다. 임은 조선을 배신한 적도 없었고, 배신할 마음도 품고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평등과 민주라는 두 가지 목적의식으로 우물 안의 개구리들을 교화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어디서부터 임의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지 너무나 치가 떨리고 분기탱천한 일이라 감히 입 열기가 두렵습니다.



 임의 가솔괴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져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할 때까지 숨죽이고 사람들 눈을 피해 살아야 했습니다. 아무리 무지막지한 조선이지만 어찌 변론할 기회도 주지 않고 임을 그리도 처참하게 처형해야 했는지요.           



 허균은 1569년(선조 3년) 음력 11월 3일에 초당 허엽(許曄)의 삼남 삼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허균은 아버지 초당 허엽의 둘째 부인인 강릉 김 씨 예조참판 김광철(金光轍)의 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아들이다.


 그의 부친 초당 허엽은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동인의 영수가 되었던 인물로, 그의 나이 12세인 1580년(선조 13년)에 부친 허엽이 상주의 객관에서 별세하였다.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배우다가 나중에 둘째 형의 친구인 손곡 이달(李達)에게서 배웠다. 서자로 출세가 어려웠던 스승 이달의 처지에 비애를 느끼고 홍길동전을 지었다. 그의 나이 17세 때인 1585년(선조 18년) 초시에 급제하고, 김대섭의 차녀와 결혼을 한다. 21세 때인 1589년 생원시에 급제한다.     


      

 24세 때인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을 피해 피난 중이던 부인 김 씨가 함경도 단천에서 첫아들을 낳고 사망한다. 허균은 강릉에 있는 외가 애일당(愛日堂) 뒷산의 이름을 따서 교산(蛟山)이라는 호를 사용하게 된다.          



 1615년에도 문신정시에서 1등을 하고, 정2품 가정대부에 올라 동지 겸 진주 부사가 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다. 1616년 광해군 8년에 정2품의 형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1617년에는 길주에 유배됐다가 다시 정2품 좌참찬에 오른다.


 1618년 기준격(奇俊格)이 허균이 왕의 신임을 얻은 것을 시기해 반란을 계획한다고 탄핵하였다. 이에 허균이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처형당한다.

  


 그 많은 시문(詩文) 중에 홍길동전에 은연중 임의 사상과 시대를 앞서간 혜안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찬탄케 합니다. 자신을 낳아준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는 조선 시대 서얼들 처지를 대변하면서 한편으로 적서차별이 없고 인간사회에 계급이 없는 지극히 인간적이면서 무릉도원 같은 이상향을 꿈꾸셨습니다. 임의 꿈은 곧 임의 누이 난설헌 초희(楚姬)의 꿈이기도 했으며 민초들의 갈망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조선의 대부분 상민 이하 백성들의 꿈이기도 했습니다. 임을 비롯한 임의 형제들은 너무 일찍 태어난 것이 탈이었습니다. 지금쯤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만약 4백 년 후에 이승에 나오셨다면 임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 임의 누이 난설헌 님과 중형이신 봉(葑)이 요절하는 양천허씨 가문의 비극은 없었을 테죠. 임을 비롯한 형제자매의 요절은 조선 사회 큰 파문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만년을 두고 가슴 칠 원통한 일이랍니다.          



 임이 천수를 다 누렸다면 이 땅에 민주주의는 훨씬 더 일찍 정착되었을 테고 물 건너 왜인들에게 핍박을 받지도 않았을 겁니다. 한번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놓기 싫어하지요. 수백 년을 앞서간 임께서는 정저지와(井底之蛙)처럼 봉건주의 사상을 진리인 양 고집하는 아둔한 소인배들과 어울리셨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황당했겠습니까.        


  

 재주가 있든 없든 한번 벼슬한 자가 대를 이어 벼슬을 하며 국가의 녹을 먹는 불합리한 세태에 대하여 임은 위정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유재론(遺才論)을 지어서 크게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의 간담이 서늘했을 겁니다. 임의 말씀에 그들도 공감하면서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차마 포기하기 싫었던 게지요. 일부 가문의 영광이 조선 전체를 눈뜬장님으로 만들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임금과 더불어 하늘이 준 직분을 행하는 것이니 재능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늘이 인재를 내는 것은 본디 한 시대의 쓰임을 위해서이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는 귀한 집 자식이라고 하여 풍족하게 주고 천한 집 자식이라 하여 인색하게 주지 않는다.



 그래서 옛날의 어진 임금은 이런 것을 알고 인재를 가끔 초야에서도 구하고 더러 항복한 오랑캐 장수 중에서도 뽑았으며, 도둑 중에서도 끌어올리고, 창고지기를 등용하기도 했다. 이들은 다 알맞은 자리에 등용되어 재능을 한껏 펼쳤다.     


     

 나라가 복을 받고 치적이 날로 융성케 된 것은 이 방법을 썼기 때문이다. 중국같이 나라도 인재를 빠뜨릴까 걱정하여 늘 그 일을 생각한다. 잠자리에서도 생각하고 밥 먹을 때에도 탄식한다. 어찌하여 숲 속과 연못가에서 살면서 큰 보배를 품고도 팔지 못하는 자가 수두룩하고 영걸찬 인재가 하급 구실아치 속에 파묻혀서 끝내 그 포부를 펴지 못하는가?      



 정말 인재를 모두 얻기도 어렵거니와 모두 거두어 쓰기도 또한 어렵다. 우리나라는 땅덩이가 좁고 인재가 드물게 나서 예부터 걱정거리였다. 더구나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인재 등용의 길이 더 좁아져서 명망 있는 집 자식이 아니면 좋은 벼슬자리를 얻지 못하고 바위 구멍과 띠풀 지붕 밑에 사는 선비는 비록 뛰어난 재주가 있어도 억울하게도 등용되지 못했다.      



 과거에 합격하지 않으면 높은 지위를 얻지 못하고, 비록 훌륭해도 과거를 보지 않으면 재상(宰相)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 하늘은 재주를 고르게 주는데 이것을 명문의 집과 과거로써 제한하니 인재가 모자라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동서고금에 첩이 낳은 아들의 재주를 쓰지 않는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조선만이 천한 어미를 가진 자손이나 재혼한 여인의 자손을 벼슬길에 끼지 못하게 했다.        


  

 임이 유재론(遺才論)에서 설파하신 내용입니다. 천만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임의 금과옥조 같은 말씀이 4백 년이 지난 지금도 지켜지지 않으니 어찌해야 할까요. 그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뒤지지 않을 듯합니다. 현세는 유전무죄라는 해괴망측한 말도 생겨났답니다.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가졌더라도 뒤를 봐주는 배경이 없으면 뜻을 펴지 못하며, 아무리 큰 죄를 지었더라도 황금만 가지고 있으면 아무런 흉이 되지 않는 이상한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답니다. 임께서 살던 조선 시대나 작금이 하나도 변한 것이 없으니 앞으로 후세들에게 무슨 변명을 해야 하나요.     


 

 임께서 후손들의 작태를 보시고 기가 막히시겠지요. 임은 또 호민론(豪民論)에서 나라님과 위정자들의 방약무인한 태도에 대하여도 질타하는 목소리를 내셨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틀림이 없는 말씀이십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나라를 운영하는 일부 고위 정치인 중에 눈이 없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백성을 무서워하는 척하다가 얼마 지나면 백성들을 종 부리듯 하려 듭니다. 나라는 백성이 기본입니다. 사람 없는 영토에 무슨 나라를 세우고 정치를 하겠습니까.



 행여 호랑이나 여우 늑대를 모아 놓고 정치를 한다면 모르지만, 만물의 영장인 소위 인간을 다스리는 일은 만만하지 않지요. 짐승들은 먹이만 제때 주면 되지만 인간은 먹을 것만 준다고 다스려지나요.     


     

 ‘천하에 두려워할 만한 자는 오직 백성뿐이다 백성은 물·불·범·표범보다도 더 두렵다. 그런데도 윗자리에 있는 자들은 백성들을 제멋대로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는다. 도대체 어찌 그러한가.



 무릇 이루어진 일이나 함께 기뻐하면서 늘 보이는 것이 얽매인 자, 시키는 대로 법을 받들고 윗사람에게 부림을 받는 자는 항민(恒民 : 온순한 백성)이다. 이들 항민은 두려워할 만한 존재가 아니다.      


     

 모질게 착취당하며 살갗겨지고 뼈가 뒤틀리며, 집에 들어온 것과 논밭에서 난 것을 다 가져다 끝없는 요구에 바치면서도 걱정하고 탄식하되 중얼중얼 윗사람을 원망하거나 하는 자는 원민(怨民 : 원한을 품은 백성)이다.



 이들 원민도 반드시 두려운 존재는 아니다. 자기 모습을 푸줏간에 감추고 남모르게 딴마음 품고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엿보다가, 때를 만나면 자기의 소원을 풀어보려는 자가 호민(豪民 : 살림살이가 넉넉하고 세력 있는 백성)이다.           



 이들 호민이야말로 두려운 존재이다. 호민은 나라의 틈을 엿보다가 일이 이루어질 만할 때를 노려서, 팔뚝을 걷어붙이고 밭이랑 위에서 한 차례 크게 소리를 외친다. 그러면 저 원민들이 소리만 듣고도 모여드는데, 함께 의논하지 않았어도 그들과 같은 소리를 외친다. 항민들도 또한 살길을 찾아 어쩔 수 없이 호밋자루와 창 자루를 들고 따라와서 무도한 놈들을 죽인다.      


    

 진나라가 망한 것은 진승과 오광 때문이고, 한나라가 어지러워진 것도 황건적 때문이다. 당나라 때에도 왕선지와 황소(黃巢)가 기회를 탔었는데, 끝내는 이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



 이 모두 백성을 모질게 착취해서 제 배만 불렸기 때문이니, 호민들이 그 틈을 탄 것이다. 하늘이 사목(司牧)을 세운 까닭은 백성을 기르려고 했기 때문이지, 한 사람이 위에 앉아서 방자하게 흘겨보며 골짜기 같은 욕심이나 채우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즉 그러한 짓을 저지른 진·한 이래의 나라들이 화를 입은 것은 마땅한 일이었지 불행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윗사람들은 태평스럽게 두려워할 줄 모르고, 우리나라에는 호민이 없다, 고 말한다. 불행히도 견훤(甄萱)이나 궁예(弓裔) 같은 사람이 나와서 몽둥이를 휘두르면, 근심과 원망에 가득 찬 민중들이 따라가지 않는다고 어찌 보장하겠는가.‘          



 상술한 임의 호민론을 음미해 보면 피가 끓고 뼈마디가 부서질 것 같습니다. 비단 저뿐만 그렇겠습니까. 임의 유재론과 호민론을 적절히 섞어 임의 원대한 포부를 드러낸 홍길동이라는 호민은 바로 임자신 아니던가요?       


    

 임은 비록 서얼 출신은 아니지만 박응서, 심우영, 서양갑, 박치의, 박치인, 이경준, 허홍인 등 7명의 서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벼슬아치들과 호랑이 같은 양반들에 대항하려 했던 혁명적 행동에 대하여 큰 박수를 보냅니다. 비록 임의 뜻은 소설로서 전해지게 되었지만 임의 그 정신은 조선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때까지 면면히 이어졌답니다.          



 홍길동전은 이 땅의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소설이 아니고 역성혁명이고, 계급타파이며, 아래로부터의 개혁입니다. 또한, 해외개척이며, 권선징악의 모범이기도 합니다.



 4백 년 전 임께서 꿈꾸신 사회가 비록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근접하였나이다. 그러나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는 여전히 골치 아픈 일이랍니다. 법이 물러서 그렇겠지요. 법이 올바로 서 있다면 어찌 오리들이 생겨나며, 무전유죄라는 뼈아픈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가진 자들은 배를 두드려가며 세월이 빠르다고 한탄하고 빈손들은 여기저기 떠돌면 한탕을 노리고 있지요. 가진 자들 손에 든 것은 가지지 못한 자들의 몫이 포함된 것 아닌지요.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한 들 무엇하리오. 인간의 욕심이 제어되지 못하는 한 똑같은 역사는 반복되는 것을요.         


  

 천지신명께서는 지상의 모든 인걸에게 태어날 때 제가 먹고, 입고, 살 물건들을 다 챙겨주신다지요. 그러나 사악한 자들의 못된 짓으로 잠잘 곳이 없어 떠도는 불쌍한 이웃들도 상당합니다. 집 한 채 있으면 충분한 것을 수십 채, 수 백 채도 모자라 강산에 금을 그어가며 땅따먹기에 혈안이 된 자들을 어찌해야 하나요?


      

 인륜은 간데없고 패륜만 설치는 동물농장이 되어가고 있답니다. 마음 같아서는 임의 분신처럼 현대판 활빈당을 만들어 인두겁을 쓰고 사람 행세하는 금수강산의 모든 귀신과 도깨비들을 잡아다 저 율도국 앞바다에 수장시키고 싶습니다. 하오나 그들도 윗대로 올라가 보면 같은 배에서 나온 무리라 차마 그리할 수 없는 것이 더욱 가슴을 칠 일이랍니다.          



 임이시어, 이제 긴 잠에서 깨어나소서. 간신배들의 모함에 빠져 48세에 이승을 버리셨지만, 임의 숭고한 정신은 반도(半島)의 많은 후세 가슴에 활활 타오르고 있답니다.



 역사는 진정한 승자 아닌 승자 편에서 날조되고 변형되어 기록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임께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 하고 싶었던 말이나, 조선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서 했던 뜻을 알고 있답니다.           



 임께서는 저 은하수 중간 어디쯤 제2의 이상향(理想鄕)인 율도국을 만들어 영원한 제왕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봅니다. 임의 곁에는 이승에서 못다 한 꿈을 접고 스물 일곱 송이 부용화로 져야 했던 누이 난설헌 초희 님과 중형 봉(葑), 임에게 역사의 부당함을 알려준 스승이신 손곡 이달(李達)님을 비롯하여 수많은 지인들이 함께 있을 테지요.           



 게다가 곁에는 임과 이승에 있을 때 정신적 사랑을 나눈 부안의 명기 이향금(李香今 - 梅窓)이 섬섬옥수로 임에게 유하주를 따르며 배시시 웃고 있을 테지요. 혹 임의 이승에서 지우였던 사명당께서도 함께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저 역시 임의 율도국에서 평범한 문인으로 살기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임은 결코 비운의 이무기가 아니랍니다. 강릉에는 이무기가 태어날 지세(地勢)가 아닌걸요. 할 일 없는 일부 호사가들이 쓸데없이 놀리는 세 치 혀에 가슴 아파하지 마소서.           



 백두에서 기원한 반도의 기운이 이곳 강릉에 잠재하고 있답니다. 제가 오늘도 임이 태어나신 강릉 초당동 생가를 찾은 이유는 임과 임의 누이 난설헌에 대한 단심이 변함없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며, 행여 정진하는 자세가 나태해질까 두렵기 때문이기도 하답니다.


      

 임이 소설 속에서 개척하신 율도국은 범인(凡人)들이 아련하게 환상적으로 생각하는 섬나라가 아닌 우리 한민족의 선조들께서 실제 살면서 일정 기간 통치했던 나라였습니다.



 지금은 왜인들이 다스리며 충승[] 또는 유구제도(琉球諸島)라 부르고 있답니다. 임께서 화려하게 부활하는 날 율도국은 조국의 막내가 돼야 합니다. 현재 오키나와 하테루마시마에는 "오야케 아카하치(オヤケ赤蜂)"라는 영웅 기념비가 세워져 있답니다.

      


 임의 소설 속 주인공인 홍길동은 바로 1400년 조선에서 태어나 의적(義敵) 활동하다 유구국으로 옮겨 간 실존 인물 홍길동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답니다.



 오야케 아카하치는 율도국에서 별칭이 ‘홍가와라[洪家王], 즉, '홍 씨 성을 가진 왕'이라 하였습니다. 임께서 홍길동전에 은연중 나타내고 있는 해외개척 정신은 이미 백제나 신라, 고구려 때 있었고 시베리아나 몽골 중국 산둥반도에도 그 흔적이 있나이다.     

 


 백제는 산둥반도 일부를, 고구려는 만주와 몽골, 시베리아를 복속시키고 통치했습니다. 호태왕이나 임 같은 분이 다시 나타나면 지금은 비록 오랑캐들이 다스리고 있지만, 우리가 찾아와야 할 영토인 셈이지요.



 한반도의 국운이 용트림하며 웅비하는 날 사해(四海)는 우리 동방예의지국에 머리를 조아리며 사대하려 들 테죠. 홍길동전에 나타난 민주주의 정신은 조국이 창성하는데 향도가 되리라 믿습니다.     

 


 대관령에서 불어온 눈보라가 나그네 옷깃을 저미게 합니다. 임의 아버지 허엽 님이 지으신 고성해산정(高城海山亭)’, 백형 허성(許筬) 님의 야등남루(夜登南樓), 중형 허봉(許篈) 님의 난하(灤河)’ 누님이신 난설헌 허초희 님의 ‘죽지사(竹枝詞) 3’ 임의 호정(湖亭)’이 새겨진 뜨거운 시비들은 차례로 껴안아 봅니다. 청사에 빛날 양천 허씨 5 문장의 시비들이 이 영하의 날씨에도 뜨겁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혈혈단신으로 조선이라는 거대한 바위를 막아보려고 온 힘을 쏟았던 임. 임은 진정 민족의 선각자이시며, 조국뿐만 아니라 세계만방에 밝은 횃불로 영원히 타오를 것을 후손들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가슴에 불덩이를 지니고 태어나신 임. 그 불덩이는 잠시 꺼졌지만, 완전히 꺼진 불이 아니랍니다.      


     

 이제부터 서서히 임의 불길을 피워 올려 자손만대에 그 광휘를 물려줘야 합니다. 양천 허씨 5 문장의 정신이 이렇듯 거대 암석에 다시 새겨져 세워졌으니 이는 백두산 마루가 닳도록 가문의 영광이며, 임의 형제자매를 사모하는 모든 이의 승리입니다. 긴 세월 쉬셨으니 이제 항룡(亢龍)으로 웅비하소서.     


      

   煙嵐交翠蕩湖光 (연람교취탕호광)  연기 안개 푸른 데 호수빛 넘실거려

   細踏秋花入竹房 (세답추화입죽방)  가을꽃 밟고서 대나무 방에 들어가네

   頭白八年重到此 (두백팔년중도차)  머리 희고 팔 년 만에 다시 돌아와 보니    

   畫船無意載紅粧 (화선무의재홍장)  그림배에 붉은 단장 싣고 갈 뜻이 없구나   


  

 임의 절구 호정을 천천히 읊조리며 해조음 맑게 들리는 경포대를 향하렵니다. 백설을 하얗게 뒤집어쓰고 먼 남녘 하늘을 응시하는 난설헌 님 동상과 임의 부친과 형제들의 시비에서 풍기는 시향이 눈물샘을 자극하여 나그네의 무거운 발걸음을 잡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 강릉 초당동 허균 생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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