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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효 Sep 05. 2023

녹족부인





(2) 사슴이 낳은 여인








을지문덕은 요하에 군사를 배치하여 수나라 군대가 요하를 건너지 못하도록 했다. 요하를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수군의 공방전이 2개월가량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수나라 병사 4만여 명이 고구려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때 용맹하기로 소문난 수나라 좌둔위대장군 맥철장(麥鐵杖)도 고구려군 칼에 목이 떨어졌다. 고구려는 요하(遼河)를 제1 방어선으로 하고, 압록수를 제2 방어선으로 하며, 최종적으로 살수와 *패강(浿江)을 마지막 보루로 삼고 있었다.


수나라 군대가 요하를 건너자 을지문덕 장군은 고구려군을 작전상 요동성(遼東城) 등 주변 산성으로 퇴각시켰다. 고구려군이 퇴각하자 수나라군은 요동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요동 지역에는 요동성 이외에도 19개의 고구려군이 주둔하고 있는 성이 있었다. 양광은 우군에게 요동성을 포위하여 공략하게 하고, 좌군에게는 요동 지역에 산재한 고구려의 성을 공격하게 했다.


한편으로 양광은 좌익위대장군 내호아와 부총관 주법상(周法尙)에게 해군 10만 명과 군선 천여 척을 주고 육군과 연합하여 평양을 공격하라고 명했다. 양광의 군대가 3개월을 허비하고도 요동성을 깨트리지 못했다. 성질 급한 양광은 휘하 장수들을 닦달하였으나 전쟁은 지지부진했다.


그는 군사 30만 5천 명을 선발하여 별동대(別動隊)를 조직하고 우문술과 우중문이 지휘하게 하여 곧바로 평양으로 출격시켰다.


* 패강 - 지금의 대동강


평양으로부터 60리 지점까지 진격한 내호아는 부총관 주법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군사 4만 명을 이끌고 평양성을 향해 진군했으나, 고건무가 이끄는 고구려군에 대패하여 살아남은 수나라 병사는 겨우 수천 명 정도였다. 내호아와 주법상은 할 수 없이 잔여 병력을 이끌고 퇴각했다.


평양 인근 대성산 기슭에 광법사(廣法寺)가 있었다. 이 가람은 광개토태왕 때 창건되었고 평양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즐겨 찾았다. 이 가람에 법력이 출중한 이암대사(利巖大師)란 고승이 있었다.


 광법사 주변 울창한 숲속에 사슴들이 많았는데, 그중 암사슴 한 마리가 이암대사가 법당에 들어 염불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법당 뒤에 숨어 대사의 염불을 엿듣곤 했다.


그렇게 하기를 수년, 암사슴은 어느덧 이암대사를 사모하게 되었다. 짐승으로서 인간을 사모한 일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가람의 불목하니나 사미승들도 이암대사가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할 때 웬 사슴 한 마리가 법당 주변을 맴도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겼다.


암사슴의 지극한 정성을 알게 된 천지신명은 암사슴에게 인간의 영기(靈氣)를 부여하였다. 열 달 후에 암사슴은 광법사 헛간에 사슴이 아닌 여자아기를 출산하고 사라졌다.


이암대사가 소식을 듣고 헛간으로 달려갔다. 대사가 갓난아기를 자세히 살펴보니 여아(女兒)의 발이 사슴의 발처럼 굽이 있고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대사는 여아를 보고 자신과 숙연(宿緣)이 있음을 알고 그 여아를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대사는 여아에게 녹족(鹿足)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즉, 사슴의 발을 가졌다는 뜻이었다.


녹족은 가람에서 자라며 이암대사로부터 불경을 비롯하여 예법을 배우고 무예까지 익히게 되었다. 이암대사는 수나라가 개창되기 전에 진(陳)나라와 북주(北周) 등을 다니며 불법을 연구하고 대륙의 무예를 익힌 바 있었다.


대사는 수나라가 건국되면서 양견이 고구려를 넘보자 제자들에게 무예의 중요함을 설파하여 검술과 치마술(馳馬術) 등을 집중적으로 지도하기도 했다.


이암대사는 녹족에게 특별히 검법을 지도하며, 여인의 몸이지만 장차 나라를 위하여 크게 쓸 인재로 키우고 싶었다. 녹족의 사슴 발은 보통 사람의 그것과 달랐다. 발이 무척 빨랐다.


대사의 제자 중에서는 달리기로 그녀를 추월할 자가 없었다. 또한, 무예도 타인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녀는 이암대사의 무예를 그대로 전승받아 일당백의 무사로 성장하였다.


‘나무 석가모니불. 녹족은 부처님과 삼생의 인연이 있구나. 인상을 보니 여러 자식을 보겠지만, 이별할 수(數)가 있어 많은 고통이 따를 것이다. 하지만 그 고통을 감내하면 나라를 구하고 자식들을 모두 불문(佛門)으로 인도하리라. 그것이 녹족의 운명이니 이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도다.’


이암대사가 열반에 들자 녹족은 가람을 나와 세상을 주유하다가 한 사내를 만나 혼인하였다. 녹족의 나이 열다섯이었다. 부부는 바닷가에 집을 짓고 신혼살림을 시작하였다.


얼마 뒤에 녹족이 임신하였는데, 이상하게도 다른 임산부보다 배가 엄청나게 불러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열 달 만에 출산하였는데 신기하게도 사내아이만 아홉을 낳았다.


그런데 그 아홉 명의 아기들 발이 녹족과 같이 모두 사슴의 발을 가지고 있었다. 부부는 충격을 받았지만, 지극정성으로 아이들을 키웠다. 부부는 아홉 명의 아들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첫째는 일녹(一鹿), 둘째는 이록(二鹿) …… 막내는 구록(九鹿)이었다.


고구려 연안은 해적들이 빈번하게 출몰하여 백성을 죽이거나 식량 등을 약탈해갔다. 때에 따라서는 젊은 사람이나 어린아이들을 납치해가기도 했다. 아홉 명의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녹족 부부는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바닷가에 나가 일해야 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5년쯤 되는 어느 날 부부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아이들이 집에 없었다. 부부는 주변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아이들을 찾을 수 없었다.


녹족 부부는 낮에 바닷가로 일을 나간 사이에 해적들이 마을에 들이닥쳐 어린아이들을 모두 잡아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녹족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대성통곡하였으나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부부는 해적들이 혹시 자식들을 고구려에 팔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구려 전역을 떠돌며 자식들을 찾기로 했다.


부부는 여러 해 동안 온갖 고생을 감수하며 자식들을 찾아다녔으나 어디에서도 자식들을 찾을 수 없었다. 남편은 자식을 잃은 화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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