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녹족 9형제
녹족도 식음을 전폐하고 두문불출하며 집에만 있다가 결심한 게 있어서 남장하고 집을 떠났다. 그녀는 조의선인 집단의 일원이 되어 자식과 남편의 원수를 갚고자 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고 수나라 해적들이 자식들을 납치해갔다고 결론을 내렸다.
고구려의 젊은이들은 조의선인 집단에 들어가 출세하는 것이 가장 큰 희망이었다. 고관대작이 되기 위해서는 출신성분이 중요했다. 고구려는 5부 연맹체로 출발한 나라여서 초기에는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桂婁部) 등 5부족 출신의 이름있는 가문이 아니면 출세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조의선인이 되면 출세가 보장되었다. 평범한 가문의 자제들이 출세하는 방법은 큰 공을 세우거나 조의선인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녹족은 출세가 아니라, 남편의 원한을 갚고 자식들을 찾기 위해 조의선인이 되려고 했다. 그러나 여자는 조의선인이 될 수 없었다. 녹족은 이름을 웅록(雄鹿)이라 개명하고 완벽한 남자로 거듭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광법사 인근에 산막을 짓고 예전에 이암대사에게 배운 무예를 혼자 연습하며 기량을 회복하려고 애를 썼다. 온 힘을 기울여 정진한 덕분에 웅록은 예전의 기량을 되찾을 수 있었다.
웅록은 조의선인 집단에 들어가기 위해서 나이를 열 살이나 적게 하였다. 외모가 워낙 어려 보였기 때문에 그녀는 무사히 시험에 통과하였고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마친 웅록은 조의선인들 중에서 뛰어난 실력을 뽐냈다.
웅록이 훈련을 마치고 조의선인 집단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매진하며, 기량을 닦고 있을 즈음에 수나라가 두 번째로 고구려를 침범했다. 조의선인들은 대부분 전선에 투입되었고 웅록도 전선으로 갈 것을 원했다.
“이름이 웅록이고, 올해 스물다섯이라? 자네가 지난번에 배출된 조의선인들 중에서 무예가 가장 뛰어나다고 들었다. 마침, 을지문덕 장군 휘하에 있던 부관(副官)이 승진하는 바람에 그 자리가 공석이다. 자네가 그 자리로 가면 자네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가겠느냐?”
“*중리대형(中裏大兄)님, 고맙습니다. 목숨 바쳐 을지 장군을 보필하겠나이다.”
녹족은 너무 기뻐서 중리대형에게 넙죽 절을 하였다. 을지문덕은 그녀가 평소에도 존경해온 장군이었다.
“을지문덕 장군은 지금 고구려 정예군대를 지휘하며, 압록수를 사이에 두고 수나라 별동대를 맞아 싸우고 있다. 즉시, 장군의 휘하로 가서 나라를 위하여 수나라 오랑캐들과 싸워라.”
웅록은 12관등의 조의선인으로 을지문덕의 부관으로 임명되어 을지문덕의 군영(軍營)으로 찾아갔다.
고구려군의 사기는 높았다. 이미 양광의 아비 양견이 고구려를 우습게 보고 쳐들어왔다가 박살 난 적이 있었기에 고구려 병사들은 수나라 군대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병영 안에 군 막사들이 질서정연하게 설치되어 있었고, 병사들의 행동에도 절도가 있었고 얼굴에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 중리대형 – 관리의 임명, 해임과 관련된 일을 하는 관직
“장군, 소관은 웅록이라 합니다.”
을지문덕은 웅록이 내민 임명장을 읽어보고 나서 그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음-, 생김새와 체구는 사내라기보다 여인에 가깝다. 웅록이란 자에 대하여 이미 들은 바가 있다. 이번에 배출된 조의선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사람을 외모만 보고 평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조정에서 천거한 자이니 일단 믿고 일을 맡겨보자.’
을지문덕은 웅록을 인자한 시선으로 맞았다. 마치 아버지가 시집간 딸이 친정에 왔을 때 대하는 모습이었다.
“자네가 검술, 궁술, 치마술이 뛰어나고 게다가 병법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들었다. 나와 인연이 되었으니 의기투합하여 수나라 오랑캐를 격퇴하는데 전력을 다하자. 부관은 다양한 능력이 요구되는 어려운 자리다.
나를 주야로 보좌하고 수시로 전장의 상황을 조정에 보고해야 하며, 병사들의 사기와 군량, 병장기의 수급 실태 등을 그때그때 파악하여 나에게 알려줘야 한다. 또한, 모자라면 채우고, 남으면 적절하게 배분해야 한다. 자신 있는가?”
“장군님, 소관을 믿고 맡겨보십시오.”
웅록이 자신 있게 대답하자 을지문덕이 그의 등을 다독거렸다.
“좋아. 자네의 인상과 언행이 마음에 든다. 잠시 후에 작전 회의가 있을 것이다. 부관도 참석하여 의견을 개진해주기 바란다.”
을지문덕 휘하에 열 명의 장수들이 있는데 모두 출중한 무예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전사들이었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가 요하를 건너오자 고구려 군대를 요동 지역에 있는 요동성을 위시하여 안시성, 신성 등 여러 산성에 분산하여 주둔시키고, 압록수 이남에 있는 병력을 모아 압록수에서 별동대와 대치하는 중이었다.
요동 지역에서 두 달 가까이 고구려군과 접전을 벌이며 대치하던 수나라 군대의 일부가 별동대를 편성하여 평양으로 직행하자 을지문덕은 그들을 막거나 진격을 늦춰야 했다. 을지문덕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요동 지역에서부터 청야전술(淸野戰術)을 구사하며 계속해서 후퇴를 거듭하는 상황이었다. 잠시 후에 을지문덕 주재로 작전 회의가 열렸다.
“그동안 우리 군은 정말로 잘 싸웠습니다. 수나라 군대는 우리 고구려군 보다 훨씬 우위에 있습니다. 일단 아군을 요동 지역 각 성에 배치해 지구전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압록수까지 우리는 작전상 후퇴를 하였지만, 더 후퇴하게 되면 도성이 있는 평양이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이에, 나는 여러분들의 고견을 듣고 장차 우리 군이 어떻게 수나라 군대를 상대로 싸워야 하는지 방향을 정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고견을 말씀하세요.”
을지문덕이 중소 지휘관들의 의견을 듣고 싶어 했지만, 선뜻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만 막사 안에 가득했다. 좌중의 눈치를 보던 비장(裨將)이 입을 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