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난주 마리아(7)

by 최재효







정난주 마리아는 누구인가?




- 생몰년 : 정난주 마리아(1773~ 1838년)






탄생과 결혼>


정난주 마리아는 1773년 양근 땅 마재 양반 가문의 정약현(1752-1821)과 경주 이씨( 1750-1780)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약종 형제들의 이복형이고, 어머니는 이벽의 누이가 된다. 어머니는 난주가 일곱 살이 되던 해 30세로 세상을 떠났다. 난주의 본명은 명련命連이고 세례명은 마리아이다. 남편은 황사영 알렉시오로 1790년 증광시 과거에 16세의 최연소자로 합격하였고 같은 해 혼인하여 한양 아현에서 생활하였다. 1791년경 황사영과 난주는 삼촌인 정약종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더 깊이 배우고 입문하였다. 남편 황사영은 입신양명과 출세의 길을 과감하게 버리고, 천주 신앙에 열렬하게 투신하였으며 난주도 남편과 함께 천주교 신앙 공동체 성장에 적극 동참하였다.

난주 마리아와 사영 알렉시오는 십여 년의 결혼생활 동안 자식을 자주 잃은 것 같다. 그러다가 결혼 후 십년 만인 1800년에 아들 경한을 낳았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듬해 1801년 정조 임금이 죽고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으면서 신유 대박해가 일어나 가혹한 수난과 멸문의 화를 겪게 되었다.





박해와 유배>


1801년 신유 대박해에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체포되어 참혹하게 죽거나 비참한 유배를 당했다. 그러나 황사영은 가까스로 피하여 제천 배론으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조정은 잠적한 황사영을 찾기 위해 혹심한 강압으로 난주를 괴롭혔다. 갓난아기 경한을 양육해야 하고, 아직 황사영의 구체적인 죄목이 드러나지 않은 터라, 직접적인 고문은 어느 정도 모면할 수 있었지만, 어린 아들과 함께 감옥으로 끌려가 갇혀 취조를 집으로 되돌려보내지기 반복하며 고통으로 지냈다. 그러던 중 제천 배론에서 남편이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백서로 인해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1월 5일(양력 12월 10일) 대역죄인 능지처참 형 판결을 받아 순교를 당하였다. 가산은 모두 몰수당했고 한때 명문이었던 가문은 풍비박산되었다. 남편이 대역죄인이므로 가족들도 연좌제가 적용되어 한양에서 가장 먼 곳으로 유배형을 받았다. 시숙부 황석필은 함경도 경흥, 시어머니 이윤혜는 경상도 거제부, 난주는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의 관노비로 각각 유배되었다. 다행히 어린 경한은 너무도 어린 두 살이었던 까닭에 역적의 아들에게 적용되는 죽음의 벌을 받지 않고, 전라도 영암군 추자도의 노비로 정배되었다. 처참한 심경으로 유배지를 향해 떠난 때는 한겨울 추위가 매서운 11월 8일(음)이었다.






생이별>


마리아는 유배형을 받은 뒤부터 ‘아들 경한을 대역죄인의 아들 노비로 살게 해서는 안 되겠다.’라고 생각하였다. 난주는 배가 추자도 가까이 다다를 무렵, 나졸들과 뱃사공들에게 미리 준비한 패물로 애원하여, 관아에 노비로 정식 신고하지 않도록 하였다. “어린 아기는 ”뱃멀미와 겨울 바다 찬 바람에 죽어 바닷물에 던졌다”라고 보고해 주기를 부탁하고, 경한의 옷고름에, “이 아이는 창원 황씨 황진사의 아들 경한이니, 누구든지 이 아이를 살려주면, 어미로서 그 은덕을 어찌 잊으리오!” 라고 적어 경한을 추자도 예초리에 내려놓을 수 있었다. 두 살 어린 아들을 추자도에 내려놓고 떠나면서 난주는 기절했다고 한다. 경한은 고기를 잡고 귀가하던 추자도 예초리 뱃사공 오씨에게 발견되어 길러졌다. 그들은 아기 저고리 동정에서 부모 이름과 아기 이름이 적힌 쪽지를 발견하고 아기 존재와 이름을 그대로 불러 준 덕분에 아기는 황사영의 아들 황경한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최연소 과거시험 합격자로 당대 이름을 날린 천재였으나, 경한은 추자도 외진 섬에서 일자무식으로, 오씨 부부의 양자이자 머슴으로 평생을 가련하게 살아야 했다. 추자도 오씨 집안은 경한을 기른 인연으로 해서 오늘까지도 황 씨와는 혼인하지 않는다고 한다.






관노비官奴婢 38년>


난주는 제주도 화북항에 도착하여 약 100여리를 걸어 모슬포 대정현에 이르러, 관노비官奴婢 생활을 시작하였다. 난주가 귀양 온 모슬포는 이승훈 베드로의 동생 이치훈도 귀양을 온 곳이기도 하다. 몸으로 겪는 노비 생활보다 더 쓰라린 고통은, 추자도에 두고 온 어린 아들의 안위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불행 중 천만다행으로 경한이 오 씨 부부의 손에 거두어져 살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모슬포 대정현에는 관아 현령의 자문 격인 김석구 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재혼한 부인이 여덟 살 된 전처 아들 김상집을 잘 돌보지 않자, 난주에게 맡겨 키우며 돌보게 하였다. 난주의 인품과 교양 학식을 높이 산 까닭이다. 기구한 운명으로 친아들을 손수 기를 수 없던 난주는 김상집을 친아들 이상으로 애정을 다해 키웠고, 김상집도 난주를 어머니처럼 따르며 공경했다.


난주는 남편과 가문이 당한 비참한 처지와 고통, 특히 추자도에 아들을 만날 수 없는 고통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였다. 김씨 집안에서는 마리아가 신앙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를 모르는 채 눈감아 주었다. 난주는 김구정 집안에서 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명색이 대역죄인의 아내 관노비의 처지였으므로 아들을 만나러 추자도로 갈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피차 살아남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난주를 부르는 호칭이 모슬포 대정현과 김씨 가문에서 처음에는, “한양 아줌마”로, 후에는, “한양 할머니”로 불렸으며, 사망 후, 김상집이 추자도 황경한에게 보낸 서한에서, ‘’대부인 丁氏“라고 칭하는 것을 보면, 난주는 노비 이상의 존경을 받았던 것이 확실하다. 난주가 노비 생활을 계속하는 사이 사이에 1818년 숙부 정약용이 긴 유배가 풀렸고, 사촌 동생 정하상 바오로는 아버지의 정약종의 유업遺業을 계승하여, 조선교회를 이끌 새로운 성직자를 모시기 위해 밀사로 활약하고 있었다. 1831년에는 드디어 조선교구가 설정되었다. 게다가 남편 황사영 알렉시오가 그토록 소망하던 선교사들이 조선 땅에 입국했다. 교회의 재건 소식들이 제주도 대정현까지 전해졌다면, 그 소식 자체가 난주의 고단한 삶에 대한 보답이 되었으련만.






정난주 마리아의 행적을 찾아서>


난주는 1838년 2월 1일(음력) 병환으로 숨을 거두고 하느님 품에 안겼다. 관노비로 38년 세월이었고, 1838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양아들처럼 키운 김상집은 추자도에 살고 있는 경한에게 서한을 보내 난주의 부고를 알려주었다. 그 서한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난주가 아들처럼 정성을 다해 키운 김상집은 난주의 묘를 김씨 가문의 선산인 한굴 밭에 모시며, 돌봐 줄 것을 유언하여 그 후손들이 정성껏 돌보았다.

신유 박해 후 100여 년이 지나도록 난주와 경한은 세상과 교회에서 잊혀진 사람이 이었다. 그러다가 1909년에 제주 본당(현 중앙 주교좌)의 2대 주임 라크루( (Rev. Marcel Lacrouts. M.E.P. 1871~1929) 신부가 사목활동을 위해 추자도를 왕래하던 중, 황경한의 아들과 손자를 만나 이러한 사연을 듣게 되었다. 라크루 신부는 곧 파리의 샤르즈뵈프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순교자 황사영의 아들 경한과 그 후손들의 비참한 생활을 알렸고, 샤르즈뵈프 신부는 이를 전교 잡지에 소개하였다. 그 후 라크루 신부는 프랑스 은인들의 후원금으로 경한의 손자에게 집과 약간의 농토를 사주었다. (라크루 신부는 제주 본당 2대 신부로 1900년부터 1915년까지 15년간 활동하며, 초기 제주 천주교회의 기반을 다졌다. 현재 '하느님의 종' 품위에 올라 있다.) 라크루 신부는 이때 난주가 유배 생활 중에 아들에게 보낸 서한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난주의 삶도 교회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백색 순교를 기리며>


1970년대 중반 천주교 제주교구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장 현임종은 교회사 연구를 하는 최석우 신부님과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최석우 신부는 난주 유배 후 삶에 대해 대정현 유배까지만 알고 있었기에 난주 마리아의 행적을 조사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현임종 회장이 우연히 저녁식사를 함께한 지인에게서 이러한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지인은 대정읍 출신이며 남제주군 군수를 역임한 제주 축산진흥원장으로 있는 김서연(당시는 천주교 신자가 아님)씨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집안에서 성도, 이름도 모르는 그냥 ‘한양 할머니’라고만 부르는 분의 묘를 관리하고 있는데, 그게 이상하네, 조상 대대로 한양 할머니 묘 벌초 관리를 하고 있다네.“ 라는 말이었다. 현임종 회장은 이 예사롭지 않은 말을 듣고 즉시 제주교구 모슬포성당 김병준 신부님과 연락하여 확인한 끝에 최석우 신부에게 보고했고, 최 신부님은 서울에서 한달음에 내려와 난주의 행적 조사를 착수했다. (제주교구에서 대정의 정난주 마리아 묘지를 성지로 성역화하는 행사 때, 황사영의 후손들을 초대했는데 그들은 천주교를 알지 못하는 관계로 어리둥절해 하였다.)


난주의 행적조사에는 이러한 정보도 있다. 1970년 황사영의 4대손 황찬수가 대구교구 교회 사학자 김구정 이냐시오를 찾아와 관련 자료를 전했다. 3년 뒤인 1973년 김구정은 김병준 신부의 도움으로 난주의 묘를 확인했다. 이 무덤은 1977년에 순교자 묘역으로 단장되었고, 이후 ‘대정 성지’로 조성되었다.

1994년 9월 5일 제주교구 순교자 현양 대회 강론에서 김창렬 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신앙의 탓으로 이 고장에 유배된 유일한 증거자인 정 마리아 난주님을 순교자라고 말씀드리는 것에 대해 놀라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 보편 교회도 피 흘려 순교하지 않은 이들 중에서 어떤 분들은 순교자로 공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주의 신자들은 난주 마리아를 '백색(白色) 순교자'로 공경해 오고 있다. 제주교구는 ‘백색 순교자’인 난주의 모범을 본받기 위해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묘소를 새롭게 단장하고 성역화했다.





- 자료 참고: 정난주 마리아, 굿뉴;천진암자료; 차기진신부;김병준 이냐시오;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현임종.

- 출처 : https://cafe.daum.net/seongok1903/DAF2/71?q=%EC%A0%95%EB%82%9C%EC%A3%BC&re=1/











_()_ 끝까지 읽어주신 님에게 진심으로 고개숙여 고마움을 전합니다.

곧 다른 작품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저자 최재효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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