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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자 Jul 15. 2016

우리는 왜 죽은 시인의 사회에 열광하는가

N.H. 클라인바움 & 피터 위어 '죽은 시인의 사회'

  Carpe Diem : 현재를 즐겨라.


  아마 '죽은 시인의 사회'를 영화나 소설 그 어떠한 수단으로 접한 사람이든 가장 가슴에 남는 구절일 것이다. 모두가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규율 아래에, 같은 수업을 듣는 웰튼 아카데미의 아이들의 잠자고 있던 꿈과 희망을 다시 불타게 만들어준 키팅 선생님의 수많은 말들. 그의 말은 어떻게 소설을 읽는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고, 자극하여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소설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작품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



  첫째, 웰튼 아카데미 학생들과 현대 사회의 우리들은 닮아 있다.

  웰튼의 학생들은 자신들이 명문 사립학교 학생임을 온몸으로 체화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정해진 시간에 매일같이 일어나고, 일과표를 따라 1교시, 2교시, 3교시의 순서대로 국어, 영어, 수학 등의 과목을 배운다. 다 함께 모여 같은 식사를 하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갖기도 하지만 어느새 그들은 다시 '일과표'란 이름의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마냥 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현대인들의 삶 또한 마찬가지이다. 현재 우리 학생들의 모습은 그들의 모습과 거의 일치하니 그렇다 해도, 학생을 벗어나 사회인이 된 어른들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스마트폰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나 지옥같은 출근길을 버티며 회사에 도착하고, 출근 시간을 체크하고 오늘 자신이 해야 할 업무를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하루 종일 이어지는 문서 작성, 업무 보고, 회의, 미팅, 프레젠테이션은 마치 정해진 수업 과목인냥 반복된다, 근로 환경이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점심시간, 혹은 퇴근 후에도 쌓여 있는 업무와 독촉하는 상사, 부담스러운 회식은 그들의 목줄을 옥죈다. 마치 웰튼에 갇혀 있는 아이들처럼 말이다.


  진정으로 문학 작품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면 작가가 설정한 화자나 서술자, 혹은 등장인물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작품 속 인물들의 모습에 '나'를 투영하고 감정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웰튼 학생들의 쳇바퀴같은 삶은 일차적으로 현대 사회의 독자들과 작품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해준다. 어린 학생들은 책 속의 삶과 너무나도 유사한 자신의 삶을 직결시키고, 어른들은 자신의 학창 시절을 회상하거나 그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현재 자신의 삶에 비애감을 느끼면서 말이다. 사립학교, 명문학교, 남학교라는 웰튼의 여러 특성들은 독자들을 작품에 물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 말하는 남학교란 남성과 여성을 성별적 특성으로 구분하기 위한 표현이 아니라 획일적인 성, 즉 '한 성'이 모여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표현이다.

  그들이 학교 내에서 겪는 무한한 '경쟁'도 현재 우리의 삶 속에서 너무나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명문'이라는 수식이 붙은 웰튼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부터 매우 치열하다. 들어가더라도 전국의 수재가 모인 이상 학업 능력으로로 운행되는 먹이사슬의 상부로 올라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동아리 활동을 하고, 숙제를 하며 경쟁을 하는 그들은 경쟁에 대한 피로감과 경쟁을 하며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한 한계 때문에 불공정한 방법을 사용하여 먹이사슬을 뒤흔들기도 한다. 애초에 공정하지 못한 시작점에서 시작하고, 강력한 규율 아래에 허울로 가득한 경쟁을 하는 책 속의 삶은 우리의 모습과 같은 모습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말이 있다. 처음엔 정치권에서만 쓰이던 용어였으나 최근들어 시작부터 불평등한 사회권력관계를 통칭하는 말이 되었다. 웰튼은 어찌보면 '기울어진 운동장'의 솟아오른 상부의 극단에 위치한 학교이다. 우리들은 우리가 기울어진 경사면을 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정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맹목적으로 상부의 뒤를 좇는다.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끊임 없이 자기 계발과 스펙 쌓기를 하며 위로 오르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아직은 모르는 사실이 있다. 우리가 우리 사회의 상부, 즉 '웰튼'과 같은 곳에 도달한다 해도 그곳에도 또 다른 '기울어진 바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알려준다. 사회의 99%는 1%의 삶을 경험해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 소설에 담긴 이들은 1% 중에서도 다시 1%이다. 우리는 경험해 볼 수 없었던 '그들'의 삶을 이 소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체험하면서 한 가지 깨달음을 얻는다.

경쟁에 끝은 없다.


  우리가 끊임없이 노력하고, 정진하다고 해도 경쟁이란 단어는 우리의 삶 속에서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1%를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언젠가 이 고통도 끝나겠지.', '언젠가 경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겠지"하며 기대를 하고는 한다. 하지만 현실은 소설과 그리 다르지 않다. '경쟁'이란 단어 앞에는 언제나 '무한'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죽은 시인의 사회'와 우리 현대 사회 사이의 장벽을 허물어주는 또 하나의 매개체이다.


  강력하게 통제된 삶 또한 소설과 현실을 이어준다. 소설 속 학생들은 엄격한 교내 규칙과 기숙사 규칙으로 인해 교사와 학교로부터 끊임없이 행동을 규제당하고, 생각마저 자유로이 할 수 없다. 물론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들처럼 물리적으로 강한 제약을 받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에겐 어쩌면 물리적 제약보다 무서울 수 있는 '감시자'가 있다. 바로 인터넷이다. 산업화 시대를 지나 정보화 사회로, 또 정보 사회로 정착하며 우리는 표면적으로는 우리의 사생활이 더 보호되고, 개인적인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증가한 듯 보인다. 사실은 그렇지 않는데 말이다. 24시간 돌아가는 감시 카메라, 어디서 누가 추적하고 있을 지 모르는 나의 위치 정보, 헐값에 넘어가는 개인정보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인터넷 속 나의 기록은 어찌보면 과거의 강력한 '법'들 보다도 두려운 대상이다. 항상 네트워크망으로 연결되어 있어 누군가 나의 정보를 입수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을 수 있다는 속박감과 통제감을, 현대인들은 웰튼 학생들의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키팅 선생님의 메시지는 극도로 실존주의적이다.

  앞서 '죽은 시인의 사회'와 현대 사회를 이어주는 매개체로 '틀에 박힌 일상', '무한한 경쟁', '강력한 통제'를 꼽았다. 이를 통해 현대인들은 자신의 일상적 삶의 모습을 소설과 연관지을 수 있었고 소설 속 인물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감정을 이입하는 데에 성공했다. 만약 여기서 이 소설이 끝이 났다면 지금과 같은 명성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 작품이 위대한 작품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주체적인 존재이다.

  당연하게 생각되면서도 정작 내면화하여 살아가기는 어려운 문장이다. 키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하는 모든 수업과 말들은 '인간의 주체성'이란 가치로 수렴된다. 그가 첫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교과서를 찢으라 하는 것도, 단상 위에 올라서며 수업을 하는 것도, 또 학생들에게 시 낭송을 시키는 것도 모두 '인간의 주체성'에 관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이다. 키팅 선생님은 작품 안에서 완벽한 '실존주의자'이다.



  '실존주의자'는 무엇이고, '실존주의적 메시지'란 무엇인가? 앞서 인용한 문장의 의미를 탐구하는 철학 정도로 봐도 무방하다. 실존주의는 틀에 박힌 삶,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삶, 사회적 분위기를 좇으며 주체성을 상실한 삶을 거부한다. 또 자신의 본질을 규정지으며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삶을 거부한다. 소설 속 이야기를 통해 쉽게 그 의미를 파악해 볼 수 있다.

  웰튼의 학생들은 앞서 말했듯이 틀에 박힌 삶,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사는 삶, '명문대'라는 사회적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한 삶을 살아간다.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좋아하는 지도 모른 채, 아니면 무엇을 좋아하는 지 알고 있어도 사회적인 억압에 의해 짓눌린 채 수동적인 삶을 살아간다. 키팅 선생님은 과감하게 이들의 삶에 도전장을 내민다.


  그가 학생들에게 교과서의 페이지를 찢으라는 이유는 틀에 박힌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의미이다. '교과서'는 전형성의 상징이다. 학생들은 미리 누군가에 의해 쓰여진 지식을 통해 세상의 규범과 법칙들을 내면화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학습하고 사고한다 생각하지만 모두 '교과서'라는 정형화된 틀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나중에 아무리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고 해도, 자신이 배운 지식이 틀린 것임을 알게 된다고 해도 오랜 시간 동안 '교과서'라는 획일적인 가치관으로 교육받은 우리들은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교과서를 찢어라'라는 학생들을 향한 그의 말은 학생들이 획일적인 기준과 정해진 규칙에서 탈피하여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기를 바람을 담고 있다.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선, 또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선 자유로운 사고 가능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첫 수업에서 그가 이를 제시한 이유는 '자유'가 바로 실존주의적 삶의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그가 단상 위에 올라가 수업을 하는 이유도, 문학 시간이지만 운동장에 나가 축구를 하는 것도 위와 같은 맥락이다. 정해진 수업 방식으로부터의 탈피. 그의 이런 행위들을 함축하는 구절이다. 전형성의 탈피를 통해 그는 학생들이 유연하고,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해진 학생들이 다음으로 배워야 할 것은 '주체성'이었다.

  키팅이 '주체성'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한 방식은 '시 낭송'이었다. 그냥 시가 아니다. 자신이 직접 쓴 시를 낭송하는 것이었다. 물론 기존의 교육 방식으로만 학습한 이들이라면 스스로 창작을 하고 직접 말하는 행위는 너무나도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키팅으로부터 '자유로움'을 배운 학생들은 대부분 성공해낼 수 있었다. 몇몇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시 낭송'이라는 행위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고민한 그 과정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학생들은 키팅 선생님으로부터 '자유로움'과 '주체성'을 배웠다. 앞서 인용된 실존주의 명제의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을 지는 것'은 이제 학생들의 몫이었다.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던 학생들이 키팅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변화하는 과정을 모두 지켜본 독자들 스스로의 몫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우리가 그들의 삶에 공감하여 자연스레 작품과 함께 녹아들 수 있게 만들었고, 두 가지 깨달음을 주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이 메시지들을 어떤 작품보다도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그들이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한 방식, 마지막으로 소개할 이 소설의 '장치'이다.



  셋째, 우리는 이 모든 메시지를 '시'를 통해 전달받았다.

  그렇다. 키팅 선생님은 문학 선생님이었다. 그의 수업, 그의 말, 그의 행동은 모두 그가 '시'라는 갈래로부터 배운 것이었고, 자신이 시로부터 배운 것을 '시'를 통해 전달했다. 그리고 학생들은 다시금 '시'를 나누며 서로의 감정을 공유한다.

  '시'는 함축의 문학이다. 시인은 자신이 느낀 많은 감정과 하고 싶은 말들을 절제된 표현을 통해 짧은 글로 함축한다. 독자들은 그 의미가 무엇일지,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일지 스스로 생각하며 추론한다. 어쩌면 '시'라는 문학의 갈래조차도 굉장히 실존주의적이다. 우리는 아무런 주어진 조건 없이 우리 앞에 놓인 시 한편을 그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다. 작가가 '키팅'을 '시'로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설정한 것도, 학생들이 갖는 작은 모임을 '죽은 시인의 사회'로 설정한 것도 어찌보면 작품 전반에 나타나는 실존주의적 메시지를 무의식적으로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라.' '시'의 장르적 특성 또한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를 건네고 있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이렇게 현대인들이 자신의 삶을 소설 속의 이야기와 강하게 유착키길 수 있는 흡입력, 그 속에서 듣는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하라는 주체적이고 강렬한 메시지, '시'라는 갈래의 주체적 사유 과정이 묘하게 어우러져 우리게 큰 여운을 준다. 이 모두를 다시금 한 번 더 함축하고 있는 한 문장인 'Carpe Diem : 현재를 즐겨라.' 이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실천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독자들 몫이다.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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