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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자 Feb 22. 2016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과연?

김민섭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지난 두 달 동안 나름대로 방학이라고 뉴스도 더 많이 보고, 신문도 더 많이 읽고, 더 다양한 경험을 하며 조금 더 넓은 세상을 직간접적으로 맛보려 시도했다. 이렇게 더 많은 정보를 접할수록, 더 다양한 일들을 경험할수록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한 어절로 집약된다.

모르겠다.

  '정보의 홍수'라는 것이 참 무섭다.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그 깊이는 끝이 없었고 당장 지금의 나로서 채울 수 없는 공백이 허무함을 안겨주었다. 더 배우고 경험하고 싶다는 마음과 일단 고3으로서의 나의 본분인 공부란 의무의 충돌, 대학 가서 해도 충분하다는 변명과 고등학생으로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일을 하고픈 욕구의 충돌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를 얻고 싶으면, 하나를 포기하라"라는 한 선배의 조언과 내 무한한 욕심 사이에서 적절히 타협을 봐서 일단 입시에 도움되는, 하고 싶은 것들을 위주로 경험하기로 마음은 먹었다. 하지만 이런 현실에 씁쓸함은 지울 수 없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참으로 무서운, 채우려고 해봐도 끝이 없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날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정보의 해석'을 눌러 싼 많은 이들 의견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너무나도 많은 이들의 생각이 달리 나타난다. 평소에 관심이 있던 분야라면 나만의 가치관이나 원칙이 나름 갖춰져 있어 비판적으로 수용은 할 수 있지만, 세상엔 내가 관심을 갖고 있던 것들보다 그렇지 못한 것들이 더 많지 않던가. 내 시야가 미치는 범위 밖에 있던 것들에 대한 정보를 접할 때면 무엇을 받아들여야  할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참 고민된다.



  이 고민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 바로 '대학', 아니 '대학원'에 대한 것이다. 고등학생이지만 고등학교에 대해서도 완벽히 알지 못하는 나인데 아직은 너무나도 먼 일 같은 '대학원'은 내가 어찌 자세히 알고 있겠는가. 이런 나를 향해 "대학부터 가고 고민해"라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가고 싶은 학과의 선택은 당연 대학원 진학까지 고려하고 결정한 것이라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이 고민의 시발점은 한 권의 책이다. 어쩌면 미래의 나를 소개하고 있는 문장이 되어있을 지도 모르는,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슬로우뉴스', '직썰'등 인터넷에 연재되었던 글이고 지금도 스토리 펀딩에 새롭게 연재되고 있어 굳이 책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접해본 사람은 많을  듯하다. 그래도 아이패드 화면보다는 종이 넘기는 맛이 좋아 난 책으로 사서 읽었다. 저자는 자신이 대학원생으로서, 대학원의 조교로서, 그리고 학부생들을 가르치는 시간강사로서의 자신의 삶을 매우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아무리 부당한 일들일 지라도 담담하게 서술하는 그의 문체에 간혹 코끝이 찡해지는 순간도 몇몇 있었다.

  이 책을 읽고 처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아..." 따위의 짧은 탄식이었다. 내 궁극적인 목표는 교수가 되는 것인지라 남의 일처럼 들리지가 않았다. 그는 교수가 되기 위한 중간 과정이라 볼 수 있는 대학원 생활, 논문 연구, 시간 강의를 하며 살아왔다. 열악한 연구 및 근로 환경과, 몇몇의 부당한 대우 속에서도 그는 학생들과의 소통에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버텨왔다. 이 책만 읽고 나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작은 희망과 행복에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는, 어느 정도 긍정적인 느낌을 받았다.

  그는 말했다.

"누구나 정규직을 원하고, 교수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연구자가 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러한 꿈을 이루기까지는 계속...... 대학에 있을 것이다."

"나는 어제 후회했고, 오늘 후회하고, 내일도 후회할 테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건 내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했기 때문인가 보다."


  하지만 이 책을 출간일보다 한참 지난 뒤에 읽은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대학에서의 삶과 이별했다.

  책을 출간한 뒤 주위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것인지, 대학의 압박이  은연중에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그렇게 혐오하지만, 또 좋아했던 대학을 뛰쳐나왔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은 이후로 오랜만에 책을 읽고 많은 생각을 했다. 대학원에서의 자신의 경험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1부를 읽으며 나는 절망했다. 대학에 대한 나의 환상에 많은 금이 갔다. 그리고 힘든 현실 속에서도 '강의'를 통해 학생과 소통하며 즐거워하는 2부를 읽으면 나는 희망을 얻었다. 소통하며 강의하는 그의 모습이, 또 작은 행복이 내가 꿈꾸는 것과 어느 정도 일치하여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내 꿈인데, 생각하며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나는 오늘 대학을 그만둡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페이스북에 게재한 것을 본 후에는 희망보다 절망의 크기가 조금 더 커졌다. 그는 뜻을 갖고 한 결정일 테지만 결국 이게 현실이구나. '헬조센'스러운 결말이다. 나도 과연 이러한 삶을 살게 될까. 등의 생각이 떠나가질 않았다.



  물론 계속 절망에만 빠져있지는 않았다. 서두에서 언급하였듯 21세기의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사안들 다르게 경험하고, 다르게 바라보고, 다르게 해석한다. 저자의 글에 공감하는 댓글이나 응원,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모든 시간강사가 그런 것은 아니다."나 "당신의 사례를 일반화하지 마라."등의 말로 시작되는 비판과 비난이 하나의 사례이다.

  저자의 말이 옳은 것인지, 댓글을 단 다른 사람들의 말이 옳은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관심을 가져오던 사안이 아닐뿐더러 직접 경험해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 댓글들은 저자에게는 비판이지만, 나에게는 희망이었다. 반박의 말을 더 믿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자신의 대학은 그렇지 않다는 말들이, 또 비겁하게도 '지방대'라 그런 것이라는 조롱 섞인 말들이 말이다.

그래, 저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그러나 너무 희망만 갖기에는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 저자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아무리 대학의 좋은 측면을 보여준다 해도 이 책을 읽으며 느낀 전반적인 분위기가 너무 강렬했다. 그래도 벌써 절망하고, 회의적으로 바라보기엔 너무 이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내 꿈은 그대로이다. 대신 한 번 되돌아봤다.

나는 왜 하필 교수란
직업을 갖고 싶은가?


  사실 '교수'라는 단어는 내가 좋아하는, 하고 싶은 일들의 총체이다. 그 일들을 간략하게 나눠보자면 이렇다.

  나는 공부를 하고 싶다. 지금까지 발행한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더 넓은, 그리고 깊이 있는 공부에 대한 열망이 크다. 지금 내 눈 앞에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에 아쉽다는 말도 많이 했다. 고등학교 생활을 하며 가장 의미 있던 '공부'를 꼽으라면 내가 직접 구상하고 진행한 정치참여 관련 소논문의 작성과 윤리 토론 수업이다. 그리고 '열린 연단'에 올라온 강연과 독서를 통한 얕은 철학 공부이다. 하지만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나는 이와 비슷한 것들을 더 많이, 지속적으로 하고 싶다. 이 세상에 대해 더 알아가고 싶다.

  나는 토론, 토의, 강연 등을 통한 '소통'을 하고 싶다.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만큼 재미있는 것이 없다. SNS에 길고 짧은 글을 남기는 것, 친구들과 가벼운 담소를 나누고 가끔은 깊은 고민 상담을 해주는 것, 사회적 문제에 대해 뜨겁게 토론해보는 것, 서로의 의견을 수렴하가 위해 토의하는 것, 그리고 어찌 보면 책 읽기도 작가와의 대화로, 이들 모두 사람과 사람 간의 '소통'이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소통만큼 내게 큰 영향을 미치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것이 없는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도 사람들과의 소통이다. 작년 한 해 '불통'의 아픔을 뼈저리게 겪은 지라 더욱 소통에 대한 집착과 욕망이 크다. 어떠한 방식이든 좋다. 특히 좋아하는 건 토론과 토의이다.

  나는 글을 쓰고 싶다. 지금은 SNS나 이런 블로그, 그리고 학교의 교지와 자율 동아리의 칼럼지에 내 글을 싣고 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이라면 한  번쯤은 생각해 본, 그리고 브런치에서도 홍보 문구로 사용하고 있는 '나만의 책'을 만드는 것에 대한 열망은 항상 갖고 있다. 이렇게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든, 혹은 훌륭한 학자가 되어 발행하는 전문 서적이든, 멋진 강사가 되어 쓰는 누군가를 위한 자기 계발서든 뭐든 하고 싶다. 신문이나 잡지에도 내 의견을 듬은 칼럼을 게재하고 싶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도서관을 자주 가고, 요즘 들어선 신문을 많이 봐서 그런지 '글 쓰는 이'에 대한 동경을 항상 가슴에 품고 있다.




  이전 글들에서 나는 왜 정치철학을 선택하였고, 철학이 왜 좋은 지 설명했지만 그 답이 '교수'인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이 일들을 전문성을 갖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은 교수라는 사람들이다. 강단에서 강연하며 학생들과 열띤 토론을 펼치고, 연구실에서 읽고 싶은 책과 논문을 마음껏 읽고, 어떤 종류의 글이든 꾸준히 집필 활동을 하며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매일 꿈꾸고 있다.


  실제로 이런 삶을 향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는 자세히 모른다. 또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둘러싼 논쟁에서 볼 수 있듯이 현실이 정말 이를 허락하는지, 아니면 막연한 꿈에 불과한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공부, 소통, 집필' 이 세 가지 일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하고 있을 나의 모습을 그려볼 때마다 항상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번진다.


내가 꿈꾸는 세 가지 중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하고 산다면 행복할 것 같다.
단순한 직업 이름이 나를 옥죄고, 진정한 '꿈'들에 앞선다면 불행할 것 같다.


  사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읽은 지는 꽤 되었다. 이에 대한 글을 쓰기로 맘먹고, 정말 많은 문구와 문단들을 쓰고 지웠다.  읽자마자 감정적으로 쓴 글은 현실에 대한 회의가 대부분이었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쓴 글은 자신의 일을 일반화하는 저자에 대한 비판이었다. 지금 새로 쓴 글은 나의 이야기이다. 지금까지 발행한 글들 중 제일 전개 과정이 엉망이지만, 쓰고 지운 세 글들 중에서 단연 제일 마음에 든다.

  나중에 내가 이 글을 읽었을 때 허심탄회하게 웃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1장 나는 왜 정치철학을 공부하고 싶은가 (완)

#1 작은 철학자가 꿈꾸는 큰 이상

#2 철학, 후회할 것이 분명하다

#3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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