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모어 '유토피아'
초승달 모양의 섬 유토피아는 같은 말과 비슷한 풍습, 시설, 법률을 가진 54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그곳의 시민들에게는 빈곤도 없고 사치나 낭비도 없다. 유토피아의 성인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생산적 노동에 종사한다. 노동은 매일 6시간으로 제한되고, 8시간 잠자고 남은 시간은 정신적 오락이나 연구에 사용한다. 집집마다 열쇠를 채우거나 빗장을 거는 일이 절대로 없다. 왜냐하면 집 안에 들어간들 어느 개인의 소유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10년마다 제비를 뽑아 집을 교환한다.
어디에도 없는 곳이자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인 유토피아
널리 알려진 '유토피아 섬'의 모습이다. '이상 사회'를 지칭하는 대명사가 된 유토피아(Utopia)는 영국의 정치가인 토마스 모어가 만든 단어로 원래 '현실에서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유토피아'는 모어가 당시 영국 사회의 모습에 부조리를 느껴 이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쓰인 책이다. 1부에선 등장인물 3명이 담화를 나누며 영국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모순점을 비판한다. 2부는 '라파엘'이란 인물이 유토피아 섬을 여행한 후 그 모습을 자세히 기술한 일종의 '여행기'로, 모든 사람이 경제적으로 평등하고, 차별 없이 풍요롭고 행복하게 사는 이상 사회의 모습을 제시하며 경제적으로 불평등하고, 사회적 차별 속에서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을 묘하게 풍자한다.
이상 사회라는 제목을 가진 책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으며 계속 떠오른 질문은 "유토피아가 정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상향인가?"등의 회의적인 의문이었다. 완전 평등 사회라고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책을 직접 읽어보니 유토피아 사회에는 노예 제도가 존재했고, 그들의 형사 제도, 사법 제도, 결혼 제도 등 유토피아 사회의 여러 모습에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꽤 많았다. 이상적인 사회라고 보기엔 수많은 '비'이상적인, 디스토피아적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저자는 이를 묘하게 합리화시키며 독자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유토피아 섬의 법, 제도, 관습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한 2부를 읽으며 내가 가장 많이 눈여겨본 점은 유토피아의 사회를 비판하기 위한 '지양 점'이었다.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본받아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 어떤 제도가 우리의 사회에도 필요한 지 등의 고민은 이미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오로지 비난의 여지가 있는 부분만이 눈에 들어왔다.
한 손으로 책을 붙잡고, 다른 한 손엔 펜을 쥐고 열심히 노트에 메모하며 책장을 넘기다 금세 난 2부의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랐다. 정신없이 책을 읽던 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며 순간 멈칫했다.
라파엘 씨가 이야기를 마쳤을 때 그가 설명한 유토피아의 관습과 법 가운데 적지 않은 것들이 아주 부조리하게 보였다. (중략) … 이런 문제들에 대한 반대의견에 대답을 잘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더구나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대해 비난할 점들을 찾아내야만 자신이 현명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대해 그가 비판한 것이 머리에 떠오르자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토피아의 모습에 대한 설명이 끝난 후 이어지는 작가의 말에 따르면 라파엘은 유토피아 사회의 모습을 설명하던 도중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대해 비난할 점들을 찾아내야만 자신이 현명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대해 비판했다고 한다. 하지만 난 어디에 그러한 구절이 있었는지, 그러한 구절을 읽은 적이 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까기 위한' 부분만에 초점을 두느라 다른 구절들은 대충 읽으며 넘어간 것이 분명했다.
라파엘의 날 선 비판은
마치 나를 향한 것처럼 느껴졌다.
책장을 덮은 후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보았다.
책을 읽으며, 글을 쓰며,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며
그동안 내가 가져왔던 태도에 대해 잠시 되돌아보았다.
나는 줄곧 비판적인 글을 쓰는 것을 즐겨왔다. 주로 실질적인 효과를 내지 못하는 국가 정책이나 현실과 멀어져만 가는 학문들, 혹은 수많은 모순점을 만들어내고 있는 몇몇 사회사상 등이 나의 주된 비판 대상이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비판, 아니 거의 '비난'하는 글을 쓰며 어쩌면 난 이런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남들과는 다른 지식인인 양 행동했을 지도 모른다. 글을 읽는 독자들의 가독성이나 이해도를 고려한 글보다는 나 조차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어려운 용어들을 사용하며 온갖 '척'은 다했다. 마치 자랑거리 인양 과시하면서 말이다.
특정 대상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만을 갖고 수많은 글을 쓰다 보니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주류의 흐름을 거스르는, 흔히 '비주류'라 불리는 것들에 많이 잠식되었다. 너무 날카로운 글은 지양하자 마음먹은 터라 색채가 조금씩 바뀌고 있긴 하나 전부 지워지지는 않았다. 최근 들어 내가 관심 갖던 이슈들, 읽던 책들, 토론할 때 내가 취한 입장 들을 쭉 나열해놓고 훑어보면 정말 사회에 불만만 가득한 사람처럼 보인다. 대부분이 기존의 것들에 반하는 입장이었다.
물론 '비주류'나 '소수'에 대한 나의 애착을 버릴 생각은 없다.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하는 글도 당연히 계속 쓸 것이다. 문제는 요즘 들어 점점 그것들이 나의 전부가 되어간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난 항상 주류의 흐름의, 지배적인 사상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라파엘의 비판에 멈칫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한 번 생각해보았다.
혹시 나도 라파엘이 말한
부류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아직 확실한 답은 얻지 못했다.
'나 자신'을 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물론 얼마 전까지의 나는 이 부류에 속했다 확신한다. 줄곧 비판적인 글만을 써왔고, 부정적인 시각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쓴 글들을 돌아보면 글의 90%가 어설픈 논리에 기반한 사실상의 '욕'이었고 해결책을 제시한 것은 10%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있어보이고 싶었나 보다. 어딘가에 기고한 글은 모두 그랬다. 라파엘이 말한 부류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확실한 것은 지금의 나는 변화하려 노력하는 중이라는 것이다. 다른 이들에 대한 비판에 치중하기보다는 내가 생각하는 대안점, 이상향에 초점을 두며 조금 더 '나만'의 생각을 표현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잘 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판만 하다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면 지나치게 주류를 배척하고, 멀리하는 것은 절대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꿈을 밀고 나가는 힘은 이성이 아니라 희망이며 두뇌가 아니라 심장이라 하지만 반대로 현실을 밀고 나가는 힘은 이성과 두뇌이다. 지금 이 사회에서 급진적인 변화는 기대할 수도, 일어날 수도 없으니 가슴에 품은 이상을 위해선 어느 정도 현실과의 타협이 필요하다. 이상만을 꿈꾸며 마음에 안 드는 현실에 불만만 하는 것보다는 현실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방안을 생각하는 것이 더 '희망적'이라 느껴진다.
물음의 답은 명확하게 내릴 수 없었지만, '유토피아'라는 거울에 나의 태도를 비추어 보며 조금 더 넓은 시각으로 너그럽게 세상을 바라봐야겠다는 다짐 하나를 품게 되었다.
2장 넓은 그릇을 만든다는 마음으로
#2 조금 더 너그럽게 세상을 바라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