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그릇을 만든다는 마음으로
철학이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철학'이라는 근본적인 학문에 뜻을 두고 있는 나에게 끊임없이 다가오지만 쉽사리 답을 낼 수 없는 질문이다. 요즘 철학 그 자체는 현실에서 외면당하고 '실리'가 없는 학문으로 낙인 되고 있다. 아마 인문학 정도만 어느 정도의 '소양'으로 여겨지며 얕게나마 조명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 시대에 살면서 '철학'이 사회에 급진적인 변혁을 가져올 것이라 믿는 이는 없을 것이다. 아마 철학을 조금이나마 공부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하지만 철학이 완전히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라는 생각 또한 옳지 않다. 이 또한 철학을 조금이나마 공부해본 이들은 알 것이다.
내가 경제학, 정치학, 철학 등 여러 학문 중에 철학이란 길을 택한 것처럼 수많은 철학의 세부 학문 중 어떤 문을 열고 들어갈지 많은 고민을 하던 중 어느 순간 난 철학의 존재 이유를 ‘실용’에 두고 현실과 가장 밀접한 '응용 윤리학'에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선택은 점차 나 자신을 논리학, 형이상학, 이론 윤리학 등의 학문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편식의 길로 들어서려는 나에게 제동을 걸어준 것은 어느 교수님의 '아름다움을 찾아서'라는 미학 강연이다. 내가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에서 제공된 프로그램이었는데, 처음에는 그저 환희에 차 강연을 들었다. 철학 교수가 되어 나만의 연구를 해보고, 사람들 앞에서 강연을 하고 싶다는 꿈을 가진 나에게 눈 앞에 있는 교수님은 우상 그 자체였다. 누구보다 집중하며 들은 '아름다움을 찾아서'라는 강연의 내용은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지라 강연의 중반부까진 철학의 분류, 미학의 등장 배경 등 미학에 대한 기초적인 이론적 이해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미학에 대한 역사적, 사회문화적 흐름 이해가 끝난 후, 현대 사회에서 미학이 가지는 의의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자 점차 강연의 내용이 다르게 다가왔다. 근현대 사회의 가치관 변화와 이에 따라 변화되어가는 미학에 대한 관점을 설명하시며, 끊임없이 그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흔한 해결책을 '미학'이란 흔치 않은 학문으로 새로이 접근하셨다. 이론 그 자체를 현실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적용하신 것이다. 사실 현대 응용 윤리학의 시작이 이러한 것이라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접근은, 학문간 경계를 긋고 우물 안에만 빠져 살던 나를 반성하게 만들었다.
나는 얼마 전까지 오로지 응용 윤리학만이 현실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학문이라 생각했었다. 철학의 길을 걷고 싶다는 말을 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잠깐 동안 '다른 철학 학문'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미학이란 '다른 철학 학문'을 통해 현실 사회의 해결책을 제시해보려고 한 그의 강연을 듣고 난 뒤, 잠시 잘못된 길로 가고 있던 나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윤리학만이 현실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응용 윤리학의 기반이 되는 것은 이론 윤리학, 논리학, 형이상학 등의 철학이며 이들은 그 자체로 학제적 성격을 띤다. 철학은 현실 문제의 해결책에 대해 논하며 시작된 학문이기도 하다. 애초에 철학을 공부한다 하며 이를 여러 갈래로 구분하고 한 문만을 열고 들어간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철학은 다른 모든 학문을 담을 수 있는 넓은 그릇이 되어야 한다.
한 없이 넓어야 할 이 그릇을 당장 나누어 채운다는 것은 진정한 채움이 아니다.
나는 아직 철학에 대한 이해가 그리 깊지 않다. 이런 내가 학문 내부에 선을 긋고, 특정 가치만 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해서도 안된다. 앞으로 특정 분야만을 추구하려는 성향은 버리고, 제대로 된 철학을 배우기 전까지는 후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도록 나의 '그릇'을 넓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이것이 철학을 좋아하는 지금의 나, 고등학생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