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폴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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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난 달력에 그려진
똑같은 하루를 의식도 못한 채로
그냥 숨만 쉬고 있는 걸
아마 이 가사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삶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구절일 것이다. 현대인들은 좋은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소위 말하는 '인서울'인 대학교를 입학하고, 수많은 스펙과 높은 학점으로 대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한 가정의 가장이 되는 삶을 이상적인 삶, 성공한 삶으로 여긴다.
인간에게 개성이 갖는 의미는 꽃에 있어서 향기가 갖는 의미와 같다.
인간은 그 어떠한 생물보다 개개인의 고유한 '개성'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존재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갖는 일은 뒷전으로 한 채 사회적 통념에 갇혀 앞서 말한 '이상적인 삶'을 향해 달려간다. 과연 우리가 '이상적인 삶'이라 여기는 삶이 과연 진정한 이상적인 삶이라 볼 수 있을까? 향기 없는 조화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난 이 두 질문의 답을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사상으로 채워보려 한다.
그렇다면 왜 굳이 수많은 철학자와 철학 이론 중 사르트르와 그의 실존주의가 현대인들의 삶에 필요할까? 이 질문의 대답을 대체할 수 있는 유명한 문구가 하나 있다.
인생은 B와 D사이의 C이다.
인문학 강연 등에서 누구나 한번 쯤은 들어봤을만한 이 문구가 바로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한 말이다. 현대인들 중 진정한 자신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거나 이에 대해 명확히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저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외적 가치만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이제 시선을 자신의 내면으로 돌려 인간 본연으로서의 자신의 모습, 자신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본질을 자각하여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해답을 만들어가는 과정, 이를 가장 잘 도와줄 수 있는 사상이 인간의 주체적 선택과 책임을 강조하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의 철학에서 답을 찾아본다.
사르트르 철학을 알기 위해선 먼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는 핵심 명제를 이해하여 존재와 본질의 개념을 구분해야한다. 본질은 존재의 이유와 목적을, 존재는 '있음'그 자체를 의미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지금 당장 당신의 눈 앞에 있는 '스마트폰'을 예로 들어보자. 스마트폰은 존재로서는 '스마트폰'이며 본질로서는 '휴대전화에서 컴퓨터 기능을 사용하기 위함'따위 이다. 이러한 스마트폰은 존재가 형성되기전 만들어지는 목적, 즉 본질이 먼저 주어지고 이에 따라 존재가 형성되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은 실존에 앞선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사물과 다르게 본질이 규정되지 않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다. 그 누구도 구체적인 삶의 방향이 정해진 채로 태어나지 않는다. 이는 곧 인간에게는 본질이 없으며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이 자유로움 속에서 자신의 미래 가능성을 스스로 선택하고 본질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주어진 본질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실존적 성질, 결단을 통해 끝없는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존재이며 이 가능성이 곧 실존적 성질이다.
인간의 자유와 선택, 주체성에 대한 이야기는 사르트르만의 것이 아니다. 사르트르에게 많은 영향을 준, 그리고 사르트르 본인은 실존주의자라 분류하는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을 가두고 있는 담벼락으로 유일한 것, 완전한 것, 자기 충족적인 것, 불멸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인간의 본성은 결정되어 있어서 바뀔 수 없다는 생각이 인간을 체념적이고 수동적으로 만든다고도 말한다. 자신을 구속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주체적인 선택을 하라는 사르트르의 말과 언뜻 유사하게 들린다.
유신론적 실존주의자 키에르케고르도 감각적 쾌락만을 좇는 삶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을 내리며 이에 따른 책임을 지는 삶으로 나아가라 말한다. 실존주의자라 불리기 싫어하는 하이데거도 스스로 자신의 삶을 기획하고 창조해 가는 능동적인 존재자가 되어 실존을 회복할 것을 강조한다. 근대 철학자 칸트도 행동에 대한 자율적 선택과 책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물론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이들 철학의 시작점이나 결론 모두 다르다. 니체는 '영원회귀'를 깨달을 것을, 키에르케고르는 스스로 선택하는 삶을 넘어 궁극적으로 신과 단독으로 대면하는 삶으로 나아가라 말한다. 칸트는 누가봐도 '이성'일 것이다.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근현대 철학의 인간의 주체적인 선택에 대해 관심은 사르트르의 철학이 갖는 의의를 뒷받침해준다.
지금까지 교과서적인 지식과 사르트르에 대한 나의 어설픈 이해를 바탕으로 실존주의 철학의 철학사적 의미와 사르트르 철학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알아보았다. 이어지는 글에선 그의 사상, 특히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명제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현대인들을 위한 몇 가지 조언에 대해 소개한다.
첫째, 자신의 본질이
주어진 것이 아님을 자각하라.
사람들의 고유한 개성, 성격, 가치관 등은 처음부터 ‘나’라는 존재와 함께 형성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직접 만들어가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먼저 자신이 아무 이유 없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상태가 바로 그가 말하는 '자유'이다. 자신에 대해 원래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자신을 구속하는 일체의 것'으로부터 벗어나면 비로소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갈 준비가 된 것이다.
둘째, 자신의 본질을
만들기 위한 주체적인 선택을 하라.
첫번째 단계에서 자신이 무의미한 존재임을 자각하라 한 것은 허무주의의 '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미리 주어진 본질이 없다는 것,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의 본질을 만들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미래의 가능성을 절대자 혹은 타인에 의해서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인생의 매 순간마다 찾아오는 수많은 기회들은 인간을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만들고 이 선택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간다. 선택은 자유로부터 온다.
셋째, 자신이 하는
선택에 따른 책임을 져라.
자유 속에서 인간은 선택을 할 수 있고 이 선택은 당연히 책임을 요구한다. 자신이 선택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란 가치는 무의미해진다. 자유는 독립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타인들 자유와 연관 속에 주어지는 것이라 자신 뿐만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책임을 포괄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선택이 타인과도 연관된 것임을 깨달으면 인간은 선택에 대한 책임감으로 불안을 느끼게 되는데 이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도피하게 된다면 서두에 말한 개성없는 삶,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란 가치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그 무한함 속에서 나온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까지 스스로 짊어질때 비로소 온전한 본질이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인들은 살아가는 순간 순간에 해야하는 일들에 몰두하고 메달리느라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깊게 생각해보기 쉽지 않다. 우리는 평생 '나는 ( ) 이다.' 라는 한 줄의 괄호를 채우지 못한채 살아간다. 사르트르는 그런 우리의 삶을 비판하는 것이다. 인간은 각 개인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성격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우리만의 고유성과 개성을 실현하면서 살지 못한다. 모두가 가는 길이기에 자연스레 따라가고, 스스로 선택하고 그것에 대해 책임지기 두려워하기에 참된 '나'를 찾지 못하며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서두에 "이러한 현대인들의 삶에 왜 하필 사르트르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의 답을 '인생은 B(탄생)와 D(죽음) 사이의 C(선택)이다'란 격언으로 대체했다. 인생은 탄생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다. 우리의 삶은 연속적인 선택의 집합체이고 수많은 선택들이 곧 '나는 ( ) 이다.'라는 문장 속 괄호를 채워준다.
나는 ( )이다.
왼 괄호는 탄생, 오른 괄호는 죽음이다.
사르트르는 사람들이 이 왼 괄호와 오른 괄호 사이의 여백, 탄생과 죽음 사이의 인생을 수동적인 선택으로 채워나가는 것보다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며 살아가기를 바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르트르가 우리에게 건내는 메시지이다.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며
나만의 길을 걸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