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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자 Jul 05. 2017

공허한 아름다움만이 남았다

루카 그아다그니노 '아이 엠 러브(I Am Love)'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나 '설국열차', '나니아 연대기', '닥터 스트레인지' 속 틸다 스윈튼은 변신의 귀재였다. 독특한 분장을 하고 매번 새로운 모습을 연기하던 그녀는 마치 환경에 따라 몸의 색을 바꾸는 카멜레온 같았다. 하지만 얼마전 '케빈에 대하여'를 보고 난 후, 그녀가 서로 다른 작품 간 색다른 캐릭터를 통해서만 변신을 보여주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특별한 분장이 없어도, 영화 속 한 캐릭터 만으로도 굉장히 다양한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배우였다. 대사 없이 흘러가는 정적 속에서도 표정과 작은 떨림만으로 자유자제로 감정을 절제하고 분출하는, 누구보다 인간 본연의 감정을 연기하는데 충실한 배우였다.



'아이엠러브'는 틸다 스윈튼의 감각적인 연기를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작품이다. 모자 관계로 에즈라 밀러와 대결 양상이 그려지던 '케빈에 대하여'보다 틸다 스윈튼 개인의 연기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흥미진진한 서사를 갖고 있지도, 그리 화려하지도 않은 이 영화는 틸다 스윈튼의 감정 연기와 투박한 아름다움에 의존한다. 화려한 도시 밀라노에서 누군가의 아내, 며느리, 엄마로 살아가고 있는, 하지만 겉모습만큼 화려하지 않던 한 여성의 삶에 다가온 변화를 그리는 영화이다.


비슷한 소재를 한국 드라마에서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서사 자체의 매력도은 떨어졌다. 젊은 시절부터 재벌 가문에 시집을 와서 평생을 살아온 '엠마'는 어느날 삶의 큰 변화를 맞닥뜨린다. 재벌 가문의 후계자 선정, 하나 둘 자신을 떠나 독립하는 자식들, 그리고 자신의 삶에 찾아온 새로운 사랑. 시아버지의 생일 파티에서 처음 본 아들의 친구인 '안토니오'와의 사랑은 로맨틱한 설렘보다 격정적인 끌림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영화는 두 사람 간 사랑의 구체적인 과정을 기술하기보다는, 이를 과감히 생략하며 엠마 개인과 그녀를 중심으로 한 변화에 집중을 한다. 영화 초반에는 액자 속 과거 사진도 보여주며 한 가정의 엄마이자 아내로 기능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후반으로 갈 수록 평범했던 삶에 찾아온 변화들과 함께 잃어버렸던 자아를 자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가족 앞에 맨발로 우뚝 선 엠마의 모습은 전형적인 사모님의 외형을 지닌 영화 초반 모습과 대비되어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다소 진부했던 스토리와는 달리 영화의 오브제와 연출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ASMR을 연상시킬 정도의 음향 효과와 특징적인 색감이 표현된 영상은 시청각뿐만이 아니라 오감 모두를 자극했다. 특히 엠마가 안토니오의 새우 요리를 천천히 음미하는 장면은 몇 번을 돌려보고 싶을 정도로 독특한 장면이었다. 붉은 새우 요리를 음미하는 새빨간 드레스 속 엠마의 모습은 의미심장한 배경음악, 접시와 칼이 부딛히는 소리, 칼에 새우가 잘리는 소리 등과 어우러지며 괴기스러운 느낌까지 자아낸다. 안토니오에 흠뻑 빠진 엠마의 심리를 표현하듯 레스토랑의 조명은 새우 요리와 엠마만을 비추었고, 천천히 음미하는 엠마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자 야릇한 느낌도 흠씬 풍겼다. 안토니오의 직업이 셰프라 그런지 첫 만남부터 케이크를 주고 받으며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음식은 영화 전반에 있어 매우 중요한 기능을 했다. 음식을 통해 두 사람은 사랑을 느끼기도, 서로를 도발하기도, 또 그들만의 사랑의 징표로서 다른 누군가를 자극하기도 하며 극의 클라이막스를 촉발하기도 했다.



음식을 사용한 장면 이외에도, 새소리와 빗소리, 기차소리와 벌레소리 등의 음향 요소가 여느 영화보다 섬세하세 표현되어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연출에도 불구하고 재벌 가문의 여성이라는 소재로 인해 진부함은 피하지 못했으며 스토리보다 인물의 변화에 초점을 두었음에도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장면 장면마다 틸다 스윈튼의 감정 연기는 매우 훌륭했다. 하지만 영화의 전체 흐름과 한께 몰입하여 감정선을 따라기는 다소 힘들다는 느낌을 계속 받았다. 다양한 감각적인 욕구는 충족시켜 주었으나 감성을 충분히 자극하는데 실패한, 공허한 아름다움만이 남은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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