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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자 Aug 19. 2017

Episode 02. Florence (1)

피렌체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노벨라역에서 내리자마자 보인 풍경은 '이곳이 피렌체가 맞나?'싶을 정도로 딱딱한 광장과 건물들이었다. 아침에 로마에서 감탄했던 맑은 하늘 풍경도 어느새 끔직한 뙤약볕으로 뒤덮여 등을 덮은 배낭과 함께 불쾌지수는 급격하게 올라갔다. 숙소도 도보 3~40분 거리에 있어 온몸이 땅으로 흥건해지려는 찰나, 골목 틈 사이로 피렌체의 랜드마크 두오모성당의 붉은 돔이 보이기 시작했다. 붉은 돔에 감탄해 주변을 둘러보던 것도 잠시, 이 무거운 배낭을 맨 상태로는 피렌체를 제대로 느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중심부에서 벗어나 비교적 외각에 있던 숙소로 향했다.

숙소를 찾아 피렌체의 거리를 걷다보니 정말 어느 방면을 바라봐도 아름답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제대로 여행하기 시작한 첫 도시라 그런가. 몇 십 미터 간격으로 보이는 유명 건축물은 물론 그 사이 사이를 채우고 있는 크고 작은 건물들까지 정말 아름다웠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지붕은 다소 짙은 주황색으로, 벽면은 내가 좋아하는 은은한 파스텔톤으로 덮여 있었고 여기에 조금만 고개를 들어도 보이는 새파란 하늘의 색감이 더해지니 이보다 예쁠 수가 없었다. 햇살만 조금 덜 따가웠으면 대만족이었을텐데 왜 이리 더운걸까.

역에서 20분 정도를 걸어 중심부를 나오니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비좁은 골목과 아기자기한 건물, 거대한 성당들이 빽빽하게 가득 차 있던 중심을 벗어나니 탁트인 도로와 큼직한 건물들이 나왔다. 도로변에는 그 흔한 젤라또 가게 하나 안보였고 점심을 먹을 레스토랑 또한 보이지 않았다. 정체모를 가게가 있다고 해도 왠지 모르게 모두 닫혀있었다. 해를 피할 그늘조차 없던 큰 도로를 힘겹게 지나 역 하나를 건너니 주택가에 이르렀고, 마침내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8인실 호스텔에 체크인을 하고 관리인에게 주변에 점심먹을 곳이 없냐 물으니 오늘이 휴일이라 아마 모두 문을 닫았을 거란다. 찾아보니 8월 15일은 성모승천대축일이었고, 호스텔 관리인 말대로 주변에서 문 연 곳은 단 하나도 찾기 힘들었다.


이대로라면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뜨거운 햇볕을 뚫고 피렌체 중심부로 가야됐었는데 도저히 그럴 여력이 없었다. 뭐라도 먹어야겠다는 집념을 바탕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고, 문을 연 곳을 겨우 찾아 제대로 된 첫 끼니를 먹었다. 점심 메뉴는 해산물이 들어간 리조또로, 한 입 먹자마자 토마토 페이스트로 이렇게 짠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아침에 감자튀김 먹을 때부터 수상했는데 이 나라 사람들은 음식을 꽤나 짜게 먹나보다. 무난했던 식사를 마무리하고 주위를 둘러보자 광장이 하나 있었다. 관광객에게는 별로 안알려진 리베르타 광장이란 곳이었는데 커다란 아치도 멋있었고 한 가운데 있었던 분수도, 주위를 둘러 싼 나무 그늘 아래 벤치도 꽤 괜찮았다. 해가 중천에 떠 있어 리베르타의 그늘에서 잠시 쉬다가 본격적인 관광을 위해 발걸음을 뗐다.

처음 향한 곳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있는 아카데미아 미술관이었다. 광장 벤치에서 일어나 어디를 가야 하나 여행 계획표를 보니 내 오늘 오후 계획에는 '자유'라는 두 글자만 떡하니 있었다. 코웃음이 나오는 계획표는 이제 열어보지 않기로 하고, 구글 지도에서 찾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명소인 아카데미아 미술관을 향해 걸어갔다. '자유'라는 두 글자만 떡하니 있던 내 계획표에서 알 수 있듯이 예약한 미술관이나 박물관도 우피치랑 바티칸 빼고 거의 없었다. 아카데미아도 사전 예약을 받는가 본데, 현장 발권을 한 나는 20여분을 건물 밖에서 기다린 끝에 들어갈 수 있었다.


미술관에 들어가니 이탈리아답게 카톨릭 관련 그림들로 가득했다. 사실 다비드상이 있다는 것도 까먹은 채로 뭐라도 보자는 마음에 들어온 미술관이라 무교인 내 눈에는 거기서 거기인 종교 그림들에 그리 감흥이 크지는 않았다. 비싼 돈 주고 괜히 들어왔나 후회를 하려던 찰나 한 코너에 들어서자 조각품이 몇 개 보이기 시작했고, 코너를 돌고 나니 무수한 인파 한 가운데 다비드상이 우뚝 서 있었다. 정말 소름이 쫙 돋았다. 첫 번째로 생각했던 것보다 굉장히 큰 다비드상의 스케일에 입이 떡 벌어졌고, 그의 발밑을 둘러싸고 하나같이 같은 자세로 사진을 찍고 있는 관람객들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마치 그를 우러러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 틈에서 나도 어느샌가 그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그동안 내가 사진을 통해 본 다비드상은 정면 모습밖에 없었는데, 실제로 보니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끝내주는 자태를 갖추고 있었다. 다비드상을 본 다음 다른 조각품들을 보니 비교가 안되더라. 사람들이 미술품을 실물로 보려하는 이유를 체감했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멀리 보이는 붉은 돔을 따라 조금만 걸어가면 피렌체 대성당, 조토의 종탑, 산 조반니 세례당의 세 건축물이 모여있다. 피렌체에 도착하여 지나가는 길에 골목 틈 사이로만 바라보다가 바로 앞에 서서 전체를 바라보니 그 웅장함에 압도당했다. 피렌체 건물들이 큼직큼직 해서 큰 스케일에 어느정도 적응이 되어가고 있었는데, 두오모 성당은 상상할 수도 없던 스케일이었다. 심지어 바로 옆에 있는 조토의 종탑은 더 컸다. 피렌체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 조토의 종탑과 랜드마크인 두오모 성당 역시 미리 예약하면 줄을 서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는데, 난 예약도 안했으면서 줄을 설 생각은 안하고 주위만 빙빙 돌았다. 들어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오래 감상하고 싶은 끝내주는 외관이었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주변을 돌아다니다 줄을 서서 성당 내부에 들어갔는데 외관만큼 화려하지는 않았다. 조토의 종탑도 그냥 안들어갔는데, 전경을 볼 수 있는 더 좋은 곳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 다음 일정은 다행히도 내 여행 계획표에 나와있었다. 바로 미켈란젤로 언덕에 올라가 노을을 보는 것. 생각보다 이탈리아의 해가 길어서 노을이 질 때까지는 꽤나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지만 천천히 주변 구경이나 하려고 일찍 출발 했다. 대성당 주변을 떠나 언덕으로 가는 길, 끝내주는 풍경이 내 발목을 잡았다. 비좁은 골목길을 걷다보니 탁 트인 강이 하나 펼쳐졌는데 피렌체의 중심부를 흐르고 있는 아르노 강이었다. 건물들이 높지 않아 어디서나 푸른 하늘이 보이는 피렌체였지만, 다소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시야가 비좁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강변으로 나오니 이런 아쉬움이 싹 사라졌다. 사진을 찍은 이 스팟에서도 발걸음을 멈춘채 2-30분은 있었던 것 같다. 피렌체의 골목길에 들어서자마자 아름답게 느껴졌던 파스텔 톤의 벽, 붉은 주홍빛 지붕, 푸른 하늘의 세 조합이 탁 트인 곳에서 어우러지고 여기에 아르노강의 잔잔한 물살과 새하얀 구름까지 더해지니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찍어도 풍경의 절반도 안담기는 카메라를 보며 광각렌즈를 안챙겨온 내가 너무도 원망스러워졌다.


딱 이 시점에서 내 여행의 컨셉이 정해졌다. 아무리 웅장한 건물을 코 앞에서 보고 유명한 미술품을 실제로 본다고 해도 끝내주는 풍경이 최고다. (이 이후로 어느 도시를 가든 1순위로 찾는 곳은 강변, 2순위로 찾는 곳은 주변 높은 언덕이라고 한다.)

그라치에 다리 위에서 한참을 서있다 보니 저녁 시간이 다되었다. 원래 계획대로 끝내주는 저녁 노을을 보고자 서둘로 미켈란젤로 언덕으로 향했다. 안그래도 하루 종일 걸어다녀서 발이 부서질 것 같았는데 언덕을 오르는 길을 꽤나 가파랐다. 힘든 것도 정말 잠시, 언덕에 다 올라 뒤를 딱 돌아보는 순간 또 한번 탄식이 나왔다. 저 멀리 오늘 그토록 주위를 맴돌아 다녔던 베키오 궁전, 조토의 종탑, 두오모 성당이 우뚝 서 있었고 그 앞엔 내 피렌체 베스트 플레이스 아르노강이 올곧게 흐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영화에서만 보던 장면이 내 눈 앞에 있었다. 해가 다 지고 내일 아침이 찾아올 때까지 여기에서 피렌체 전경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있었다.

내가 이러려고 유럽에 왔다.


도저히 미켈란젤로 언덕을 그냥 떠날 수가 없었다. 이 뷰를 그대로 앉아서 감상할 수 있는 레스토랑에서 비싼 돈 주고 한 시간 반동안 스테이크를 썰었다. 꽃등심 스테이크로도 사치의 극치였는데, 풍경 감상에 빠져 기분이 좋아 웨이터가 시키라는 와인, 사이드디쉬, 디저트 다 시켰더니 다음주에 로마에서 슈퍼마켓 피자만 먹어야 할 정도로 돈을 많이 써버렸다. 허나 당연히 후회보다는 만족감이 훨씬 더 컸다. 언제 또 영화같은 뷰를 보며 사치를 부려보겠는가. (이러고 또 베로나에서 레스토랑을 갔다고 한다.)


식사를 마친 다음, 8시부터 스투비플래너를 통해 예약한 현지 투어가 예정되어 있어 언덕을 내려왔다. 언덕에서 내려와 아까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데 또 한번 미친듯이 끝내주는 풍경이 내 발목을 잡았다. 아까 그토록 맑고 푸르렀던 아르노강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원래 미켈라젤로 언덕에서 노을을 보려했는데 생각보다 해가 늦게 저서 언덕을 내려오니 슬슬 노을빛이 하늘에 드리우고 있었다. 아르노강의 노을은 강가에서 바라보는 이상적인 저녁 노을 그 자체였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내 사진 기술이 참 원망스러웠다.

그대로 다리 위에서 서서 저녁 노을을 끝까지 바라볼까, 아니면 계획대로 현지 투어를 갈까 정말 많이 고민하다 이렇게 생각없이 다니다간 너무 무식한 여행이 될 것 같아 현지 투어 미팅 장소로 향했다. '피렌체 야경 투어'란 이름의 투어였는데, 두오모 성당과 조토의 종탑, 우피치 미술관, 레푸블리카 광장 등의 중요 명소를 돌았다. 아직 밤에 혼자다니기 껄끄러웠는데 안전하게 밤에 돌아다닐 수 있던 것이 첫 번째로 좋았고 주요 명소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도 들을 수 있어서 낮에 볼 때보다 다른 것들이 많이 보여서 또 좋았다. 현지에 사는 가이드와 함께 피렌체 골목길을 구석구석 다니며 그 분위기를 느낀 것이 제일 좋았다. 골목길에 숨어있던 단테 박물관이나 꽃 모양 젤라또 가게도 알게 되어 바로 내일 일정에 추가하기도 했다.

야경 투어는 우피치 미술관 앞 계단에 앉아서 성모승천일을 기념하는 오케스트라 버스킹을 보며 마무리되었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투어에 혼자 여행하는 사람들보다는 가족이나 친구끼리 온 사람이 많아 대화를 나눠본 사람은 없지만 가이드의 설명을 들은 것만으로 꽤나 만족스러웠다. 계단에 앉아 가이드가 준비해 온 샴페인을 마시며 투어가 끝났고 다시 내 발걸음은 미술관 바로 옆에 있던 아르노 강으로 향했다. 역시나 그 끝내주는 경치는 밤낮이 바뀌어도 변치 않고 있었다. 낮에는 멀리서만 바라보았던 베키오 다리는 밤이 되니 주변 조명으로 인해 더욱 아름다운 모습을 띄고 있었고 반대편 건물들도 가로등 불빛으로 옅게 빛나고 있었다. 나중에 베네치아에서 아시시로 가는 길에 피렌체에서 환승을 할텐데 짧은 시간이지만 무조건 아르노강에 다시 오리라 다짐했다. 더 이상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지겨울 정도로 끝내주는 야경이었다.

해는 한참 전에 졌고 이미 11시가 넘은 늦은 시간, 겁도 없이 40분 거리에 있던 숙소를 뚜벅뚜벅 걸어갔다. 우버 택시를 부를까 생각하다가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이어지는 은은한 골목길 풍경에 그냥 걸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행이도 무사히 숙소에 도착해서 글을 정리하고 있다.

피렌체의 밤은 낮보다 아름다웠다.

2017.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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