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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자 Aug 17. 2017

Episode 01. Rome (1)

테르미니역의 밤과 아침

8월 14일의 월요일은 정말로 긴 하루였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내내 볼 수 있었던 푸른 하늘은 로마까지 이어졌다. 로마에 도착한 시간은 현지 시간으로 오후 6시 경으로 저녁 때였지만, 비행기에서 내리고 공항으로 들어서며 잠깐 마주한 하늘은 동화같이 푸르렀다. 맑은 하늘을 보며 설렜던 순간의 감정은 퉁명스런 로마인 2명으로 인해 잠시 가라앉았다. 한 명은 내 여권을 내던지다시피한 공항 직원, 또 한 명 역시 유심을 내던지다시피한 통신사 직원이다. 피곤해서 그런지 사소한 것조차 언짢았고, 빨리 이들을 잊고자 서둘러 테르미니 행 기차를 탔다. 아직까지는 같은 비행기를 탔던 한국인들이 많이 보이기도 했고, 처음 만난 사람들의 퉁명스러움 때문인지 유럽에 온 것에 대한 별 다른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비행기와 공항철도의 창문을 통해 슬쩍 엿보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로마를 마주한 것은 테르미니역을 나오면서부터이다. 공항철도를 끝으로 한국인들은 각자의 길로 흩어졌고, 비로소 혼자가 된 나는 점차 유럽에 왔음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처음 내 눈에 들어온 역 주변은 다소 탁한 느낌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이 도시 외각에 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 푸르렀던 평온함과는 달리 테르미니역은 좀 더 짙고 혼잡했다. 역 바로 앞에 숙소를 잡아 가는 길이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밀려드는 엄청난 유동 인구와 무질서한 길거리 상인들, 도로변에 있는 쓰레기들을 보며 몸과 마음의 피로는 배가 되었다. 카메라를 꺼내들어 풍경을 몇 장 담아보았지만 생각만큼 잘 나오지는 않았다.

호스텔에 체크인을 하고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으니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겼다. 호스텔도 생각하던 것보다 열악한 시설이었고 아직 씻지도 않아 피로는 그대로였지만, 이대로 있으면 이탈리아에서의 첫 날을 숙소에서만 보내게 될까 두려워 무작정 나왔다. 호스텔에 들어갔다 나오니 어느새 해가 지며 노을이 지고 있었다. 밖으로 나와 첫 번째로 한 일은 목을 축이기 위해 아무 기념품집에 들어가 생수 한 병을 산 것이다. 그러나 웬걸, 탄산수였다. 몇 주 전 밀라노와 베로나를 갔다온 지용이형이 물을 살때 꼭 'still water'를 달라고 말하라 한 것을 흘려들은 죄이다. 이탈리아인들은 탄산수도 그냥 물처럼 마시나보다. 뭐, 한국에서 우리가 종종 마시는 트레비나 슈웹스 같은 음료와 달리 정말 적은 탄산이 들어가있어 식수로 써도 괜찮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긴 했다. (그 후로 반드시 no bubble을 반드시 확인하고 샀다고 한다.)

두 번째로 한 일은 이탈리아 오면 매일 사먹으리라 다짐했던 젤라또 시식, 세 번째로 한 일은 슈퍼마켓 구경이다. 젤라또는 워낙 기대가 컸던 지라 무난하게 맛있었고, 더 놀라웠던 것은 슈퍼마켓 풍경이다. 정말로 평범한 작은 마트였는데 이탈리아답게 각종 피자와 치즈, 스파게티로 진열대가 가득 차 있었다. 현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계속해서 냉동 피자와 스파게티를 집어가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먹기에도 꽤나 맛있나보다. 정말 다양한 형태와 종류의 치즈도 있었는데, 전부 이탈리아어로 되어있고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나중에 알아보고 다시 사기로 하고, 물이랑 과자만 사서 나왔다. 다음주에 지낼 숙소도 이 근처인 것 같던데 꼭 다시 들러 종류 별로 치즈를 먹어보리라.

슈퍼마켓까지 들어갔다 나오니까 완전 캄캄한 밤이 되어 있었고, 해가 지기 전까지는 몰라봤던 아름다운 성당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테르미니역 주위 유명 성당인 산타마리아 마조레와 달리 그리 많은 관광객이 많이 찾지는 않는 산타 프라세데이다. 이탈리아에서 맞이하는 첫 밤인지라 숙소에서 더 멀리 가기는 아직 겁이 났기에 비교적 가까웠던 프라세데 앞 광장에 한참을 서 있었다. 이탈리아 성당하면 떠오르는 둥근 돔이 아니라 뾰족한 첨탑을 갖고 있는 이 성당의 모습은 길었던 하루의 피로감을 말 그대로 싹 씻겨주었다. 체크인을 하고 바로 잘 예정이었던 원래 계획을 취소하게 만든 허름한 호스텔의 주인에게 감사하다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한참을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다 거의 밤 10시가 다 되었음을 깨달은 나는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는 2인실이었지만 아직도 다른 한 사람은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낯선 곳으로 처음 떠나온 여행에서 낯선 사람과 처음 맞는 밤이 기대되기도, 두렵기도 했다. 어느 나라 사람이 들어올 지, 들어온다면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볼지, 아니면 묵묵하게 각자의 시간을 보내게 될 지 궁금했다. 비행기에서 쓰던 프롤로그를 퇴고하다 보니 어느새 오후 11시, 드디어 룸메이트가 들어왔다. 22살의 그는 브라질 사람이었다.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고 그동안 거의 20여개에 이르는 국가를 여행한 그는 내가 생각했던 여행자의 전형이었다. 늦은 시간에 들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진 못했지만,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짧게 스쳐간 그의 표정이 참 좋았다. 아침 일찍 떠나야했던 그와 서로를 깨워주기로 약속하고 잠이 들었고, 약속대로 우리는 이른 아침 일어나 각자의 길을 떠났다. 짧지만 기분 좋은 만남이었다.

1분 1초가 아까운 짧은 여행인지라 서둘러 체크아웃을 하고, 곧장 주변 산책이라도 나섰다. 당장 오늘 갈 피렌체에서 무엇을 볼 지도 못 정한 로마에서 어디 갈 지를 생각해 놓았을리는 없었고, 피렌체행 기차가 10시에 출발하여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최고의 여행 가이드인 구글 맵스를 켜고 역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산책을 하다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길래 우리나라의 김밥천국 같아보이는 곳에 들어가 메뉴판을 훑어보았다. 어제는 하루종일 기내식만 먹어서 오늘부터 이탈리아스러운 것을 좀 먹어보고자 리조또를 하나 주문했지만, 주인 아저씨가 아침이라 리조또는 안된다며 '영국식' 아침 메뉴를 추천해주셔서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친 후 내 건너편에서 식사를 하던 아저씨를 따라 카푸치노를 한 잔 주문했다. 카푸치노를 마시며 어디서 왔냐, 여자친구는 없냐 등의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는데, 대화를 하며 자신만을 쳐다보고 있는 나를 본 그는 내 뒤에 널브러져 있던 카메라 가방과 배낭을 가리키며 로마에서는 절대로 짐에서 눈을 떼면 안된다 경고해주셨다. 식당엔 우리 둘 뿐이어서 그리 걱정되지 않아 뒤를 돌아 있던 것이지만, 다시 경계심을 갖고 짐을 훑어본 다음 감사의 인사를 남겼다. 그러며 다시 고개를 돌리자 그는 절대 눈을 돌리지 말라고 한 차례 더 말했고, 그가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있음에 기분이 좋아졌다. 주인 아저씨와 눈을 마추지고 내개 로마 사람들 착하지 않나며 껄껄 웃던 그의 모습에 어제 만난 사람들로 인한 부정적인 감정은 사르르 녹아내렸다. 다음주에 로마에서의 아침 식사는 무조건 여기서 하기로 마음 먹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로마의 하늘이 너무 좋았다. 숙소에서 나와 산책을 하던 길도, 식사를 하고 나와 다시 방문한 프라세데 광장의 하늘도 ㅑ어제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서 봤던 하늘처럼 참 맑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날씨도 선선했고 또 한 번 어제 그 자리에 서서 몇 차례 셔터를 눌러보았다. 푸른 하늘과 예쁜 성당의 조화에 매료되어 정신없이 사진만 찍던 찰나, 어제 밤과 달리 성당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몇몇 보았다. 여행 동선을 짜며 피렌체에서 처음 성당을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계획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커다란 배낭을 맨 채 곧바로 들어가버렸다.

교회에 들어가 고개를 든 순간 내가 유럽에 왔음을 정말 실감했다. 양옆과 앞뒤, 심지어 바닥을 보아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참 아름다웠다. 처음 방문한 성당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나 싶을 정도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침에 조금만 더 늦게 일어났으면, 혹은 조금 더 빠른 기차를 예매했다면 보지 못했을 장면인지라 더욱 더 감동이 컸나보다. 왜 관광객들이 방문하지 않는지 의문도 들었고, 이 성당이 별로 유명하지 않은 성당이라면 다른 곳은 얼마나 더 아름다울지 기대도 되었다. 비종교인이라 각각의 그림이나 조각이 암시하는 내용은 정확히 몰랐지만 아름다운 색감만으로도 성당에 반하기는 충분했다.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비친 부분과 바로 그 아래 그림자로 가려진 어두운 부분 모두 매력을 뿜어냈다. 이 성당 역시 다음주에 로마에 돌아오면 여유를 갖고 천천히 둘러봐야겠다.

본격적인 여행은 지금 가고 있는 피렌체에서부터 시작이다.
무사히 도착할 수 있기를.

2017.08.14-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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