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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자 Aug 22. 2017

Episode 04. Milano

피로만 쌓여가네

밀라노 중앙역을 나오자마자 눈에 보인 것은 두 채의 거대한 빌딩이다. 피렌체와 다르게 확실히 도시 느낌이 많이 났다. 주변을 훑어보니 내가 같은 나라 안에서 이동한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사뭇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풍경 감상도 잠시, 더 늦기 전에 역으로부터 엄청 멀리 있었던 숙소로 이동하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도시 간 이동을 제외하고 뚜벅이 여행을 고집하다 밀라노에서 처음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교통카드 한 장으로 어디든 이동 가능한 우리나라와 달리 이탈리아의 지하철은 도시별로 이용권을 구매해야 한다. 1회권, 1일권, 2일권 등 사용 기간 별로 요금이 책정되는데, 밀라노는 하룻밤만 묵을 것이어서 1회권을 구매해 이용했다. 원래 밀라노에서 2박을 하고 다음에 방문할 도시인 베로나를 당일치기로 빠르게 본 후 베니스로 이동하려는 게 내 계획이었지만, 이 계획을 본 지인이 무조건 베로나에서는 1박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가 보낸 사진 몇 장을 보고 냉큼 기차 시간을 바꿔버렸는데, 이게 불과 출국 이틀 전 얘기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 그래도 여유가 부족한 여행인데 밀라노는 밤에 도착해서 대낮에 떠나는 기차를 예매해서 정말로 뭘 볼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밀라노에 대해 많이 공부하고 온 것도 아니라 굳이 오래 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별 기대도 환상도 없는 채로 도시에 도착했다. 이번 숙소도 피렌체처럼 도심에서 벗어난 주택가에 위치한 숙소였다. 검푸른 저녁 하늘과 가로등이 조화를 이룬 밀라노의 거리는 꽤나 예뻤지만, 피렌체에서 온몸을 혹사시키고 와서 그런지 감상은 커녕 빨리 숙소에 가서 쓰러지고 싶었다.

예약할 때 가장 걱정했던 숙소가 밀라노의 숙소인데 걱정과는 다르게 지금까지 묵었던 두 숙소보다 훨씬 괜찮았다. 체크인을 하자마자 관리인이 숙소에서 시내로 갈 수 있는 교통편을 설명해주고, 지도 한 장을 꺼내들어 괜찮은 관광지는 물론 내일 내가 가야 할 기차역에 가는 방법까지 알려주었다. 방 시설도 끔찍하게 더웠던 피렌체의 8인실보다 괜찮은 6인실이었고, 따뜻한 물도 잘 나와 피곤함도 어느정도 덜어낼 수 있었다. 방 안에는 나보다 먼저 와있던 부자 여행객이 있었는데 혼자 여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지 말은 못붙여봤다. 피렌체에서도 방에 들어갔더니 커플 한 쌍이 누워있어 그냥 바로 잔 기억이 있는데, 여기서 내 호스텔 다인실 로망은 끝나버렸다.

여행 혼자다.

밀라노에서 맞은 아침도 상당히 이른 시간이었다. 부스럭대는 소리에 침대 옆을 보니 어제 밤에는 못봤던 인도 아저씨가 한 분 계셨다. 내가 자는 사이에 온 듯 했다. 내게 아침으로 먹을만한 비스킷 몇 개를 건네준 그는 밀라노에서 특히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며 걱정어린 미소를 보내줬다. 누구를 만나든 소매치기 걱정을 참 많이 해주시는데 다행스럽게도 난 아직 한 번위 위협도 느껴보지 못했다.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기분좋게 숙소를 떠날 수 있었다.



밀라노에서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최후의 만찬이 전시되어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이다. 원래 예약을 해야 볼 수 있는 최후의 만찬이지만 운좋으면 아침 일찍 현장 예약도 가능하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비교적 이른 시간에 성당 매표소를 찾아서 그런지 관람을 할 수 있는 시간대는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예약 가능 시간은 오후 5시로 이미 밀라노를 떠나고 있을 시간이었다. 잠깐 동안 기차 시간을 미루고 최후의 만찬을 볼 지 고민했지만, 베로나의 저녁 분위기를 놓칠 수 없어 그만 뒀다. 최후의 만찬을 못보게 되니 성당에 대한 흥미도 떨어져 사진 몇 장 남기고 자리를 옮겼다.


어디 갈 곳 없나 구글 맵스를 뒤적이다 성당에 오기 전에 지나쳤던 지하철역 앞에서 오래된 성을 하나 발견했다. 15세기에 지어진 스포르체스코란 이름의 성이었는데, 지금은 박물관과 미술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박물관이란 것을 알았으면 가지도 않았을테지만 외관이 멋있어서 무작정 갔다가 여러 전시관이 있던 걸 알게 된 것이다. 성 내부는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산책만을 하려다가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작품이 전시되어있다는 글귀를 읽고 내부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전시관은 생각보다 다채로웠다. 입구 근처에는 주로 고미술품들만 전시되어있지만 고미술품 뿐만이 아니라 중세 갑옷, 각종 공예품, 가구, 악기, 종교 그림 등 종합 역사 박물관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특히나 우피치 미술관에서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던 매너리즘 시기의 그림들을 더욱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고, 관현악 악기들의 변천사도 볼 수 있어 신기했다. 그냥 정원 산책하려고 들어온 성인데 내부 박물관의 볼 거리가 다채로워 두 시간 정도나 관람한 것 같다. 시간만 있으면 더 관람했을테지만 밀라노에 온 이상 밀라노 대성당은 보고 가야할 것 같아서 미켈란젤로의 조각품까지 보고 성을 나섰다.

두오모역에서 내려 지하철 출구를 나오자마자 우뚝 서 있는 밀라노 대성당을 볼 수 있었다. 피렌체의 둥근 돔과 다르게 뾰족하게 하늘을 찌르던 밀라노 대성당에겐 '눈을 뗄 수가 없다'라는 표현이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주위에 다른 볼 거리가 없나 기웃거려봐도 계속 뒤돌아 성당의 웅장함에 감탄하게 되었다. 카메라를 보니 참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사진들이 많더라. 역 계단을 힘겹게 걸어올라오다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한 찰나의 순간이 가장 아름다웠는데 사진으로 못남겨서 참 아쉽다.

성당의 바로 옆에는 쇼핑의 성지 밀라노답게 구찌, 루이비똥과 같은 명품 브랜드로 가득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라는 쇼핑몰이 하나 있었고 쇼핑몰을 지나면 미술관과 스칼라좌라는 오페라 극장이 있는 등 밀라노의 정중앙 답게 명소들이 가득했는데, 오페라를 볼 여유는 없었고 성당 내부도 그렇게 끌리지 않아 쇼핑몰에서 점심만 먹고 밀라노 관광은 끝냈다.

짧았던 밀라노에서 건진 게 있다면 누군가 밀라노를 간다 했을 때 차라리 다른 곳을 가라고 말해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만약 고집해서 간다고 하면 여유롭게 스포체스코성을 둘러보라 추천해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대도 없어서 실망도 없었던 밀라노를 가벼운 마음으로 정리하고,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 베로나 행 기차에 올랐다.

2017.08.1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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