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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자 Aug 22. 2017

Episode 05. Verona

이탈리아 올 땐 베로나


이번 여행에서 난 총 6번의 도시 이동을 한다. 불가피하게 로마에서 하룻밤 자고 피렌체로 이동한 첫 이동을 제외하고 모두 오후에 출발하여 저녁 때 쯤 도착하는 기차를 예매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저녁 노을 때문이다. 머무르는 도시의 첫인상을 부드러운 색감의 저녁 노을과 함께 하고 싶었다. 베로나에 도착한 시간도 오후 6시 정도였다. 이탈리아는 해가 늦게 져서 아직 하늘에 노을빛은 드리우지 않았었지만, 배낭을 내려놓고 노을을 볼 좋은 장소를 찾아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베로나에서의 1박은 계획에 없던 것이었다. 원래 밀라노에서 이틀밤을 보낸 다음 베니스로 이동하는 중간에 4-5시간 정도 들러서 구경을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인이 보내준 베로나의 저녁 풍경에 매혹된 나는 여행 이틀 전에 숙소를 예약하고 기차 시간을 바꾸어버렸다. 이렇게 급하게 예약한 숙소라 걱정이 앞섰지만 문을 여는 순간 천국이 펼쳐졌다. 최대한 싸게 구하기 위해 숙박 사이트에 들어가서 최저가로 정렬을 하고 중심지에서 가까운 곳으로 아무거나 예약을 한 것인데 킹사이즈 침대에 주방까지 딸려있는 고급진 아파트였다. 시원한 에어컨과 푹신한 침대는 저녁 하늘 따위 버리고 시원한 방에서 영화나 보며 휴식을 취할까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들었다. 정말 이대로 체크아웃까지 방 안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런 생각도 잠시, 시원한 방은 밤 몇 시에 들어와도 그대로일테지만 노을빛은 금방 지나가버린다는 생각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밖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가니 따스한 오후의 태양이 거리를 감싸고 있었다. 무거운 배낭을 매고 힘겹게 숙소를 찾느라 주위를 둘러보지 못했었는데, 베로나는 그동안 갔던 도시보다 훨씬 여유가 있어보였다. 피렌체처럼 건물이 비좁게 붙어있지도, 로마처럼 거리가 지저분하지도 않았다. 건물 사이로 햇살이 들어올 여유도 있었고 건물의 색감도 방문한 도시 중 제일 예뻤다. 밖으로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간단하게 장을 본 다음, 버스를 타고 노을을 볼만한 곳으로 향했다. 역에서 숙소로 오는 버스에 눈여겨 둔 곳이 하나 있었다.


눈여겨 둔 곳은 당연히 강가였다. 아르노강에서 보았던 노을이 끝내줬었기에 강에 있는 버스 정류소 이름을 하나 기억해두었다가 내렸다. 하지만 처음으로 내렸던 장소에 노을빛 태양은 온데간데 없고 뿌연 하늘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도를 확인해보니 베로나의 강은 도시 한 가운데를 S자로 흐르고 있어 어느 강변에서나 노을이 잘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숙소에서 꾸물거리느라 시간은 한참 많이 흘러버렸고, 이대로 있다간 노을을 놓칠 것 같았다. 스마트폰으로 노을보기 좋은 곳을 검색해보려다 그냥 집어넣고, 건물 틈 사이로 보이던 희미한 붉은 빛을 따라 무작정 걸어갔다.

이곳 저곳을 두리번거리다 마침내 노을지는 강가에 도착했다. 지도를 보지 않고 발이 이끄는 대로 찾아온 것이라 서 있는 다리의 이름도, 저 멀리 성당의 이름도 몰랐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저녁 노을을 등지고 있는 어두운 윤곽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는 것. 사진을 몇 장 찍어보다 제대로 담기지 않아 카메라는 집어 넣었다. 나만 보기 아까운 이 순간을 인스타그램 라이브로 잠시 공유한 다음, 그대로 앞만 보고 서 있었다. 주변 다른 풍경을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눈 앞의 노을은 금방 사라져버릴테니.

한참을 다리 위에서 서 있다가 노을에 좀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 강가 옆 길을 따라 걸어갔다. 점차 붉은 기운은 흐릿한 지평선 뒤로 사라져가고, 새파란 보라빛이 하늘을 덮어가고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더 바라보기 위해 노을빛을 좇았다. 따라간다고 해서 잡히는 것도 아니고, 노을이 지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하늘을 바라보며 걷고 싶었다. 참 아름다웠던 순간들이다.

정처없이 걷다보니 꽤나 멀리 와 있었다. 도심에 있으려고 역 근처에 숙소를 잡았건만 또다시 도심 밖 주택가에 와 있었다. 길 왼편에는 은은한 빛을 품고 있던 가로등과 주차된 차들, 오른편에는 일렬로 세워진 건물들과 이따금 공원에서 물장구치는 아이들이 보였다.

참 오랜만에 느낀 평화로움이었다. 로마의 첫 날 밤은 밤에 돌아다니는 것이 두려워 일찍 숙소에 들어오고, 피렌체에서 본 노을은 투어 시간 때문에 끝까지 함께하지 못하고, 밀라노 역시 피곤에 찌들어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베로나에서 맞은 저녁은 조금 달랐다. 몸을 감싸고 도는 시원한 저녁 공기, 길을 안내해주는 강의 물줄기와 가로등, 공원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까지 온몸으로 만끽하며 베로나를 걸었다.

해가 진 다음 깜깜한 밤이 찾아오기 전 새파란 저녁 하늘도 참 좋다. 다른 도시에서도 이런 하늘을 볼 수 있었지만 보다 여유로웠던 베로나의 건물들은 더 아름답게 하늘과 어우러졌다. 이렇게 산책할 맛이 나는 거리도 참 오랜만이었다. 올해 했던 산책이라고 해봤자 학기 초에 갔던 북서울 꿈의 숲 출사를 제외하고는 밤 늦게 술을 마시거나 영화를 보고 딱딱한 빌딩 숲 속 보도블럭 위를 걸은 기억 밖에 없다. 저녁 노을을 본 다리에서부터 베로나 아레나가 있는 도심까지 걸었던 한 두시간이 참 좋았다.

무엇보다 해맑은 미소를 띄며 근심걱정 없이 마냥 걷기만 하던 내 모습이.

감성으로 가득 찬 산책을 마치고 로마의 콜로세움과 같은 원형 경기장인 베로나 아레나가 있는 번화가에 도착했다. 산책을 했던 거리와는 다르게 사람들로 가득했다. 잠이 들지 않는 도시라고 불리는 이유를 슬슬 알 것 같았다. 지금은 오페라 공연장으로 쓰이는 베로나 아레나에서는 매일 밤 공연이 펼쳐지는데, 미리 예매를 안 한 사람도 계단에 앉아 멀리서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여기서 또 새벽 한 시까지 공연을 볼까, 아니면 여유롭게 주변 구경을 하다 숙소에서 쉴까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어제의 나였으면 전자를 택했을테지만 한껏 여유로움의 맛을 본 베로나의 나는 후자를 택했다. 사람으로 가득찬 광장과 은은한 조명으로 빛나는 아레나가 보이는 레스토랑에 앉아 천천히 식사를 즐겼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치고 광장의 사람들에 섞여 베로나의 밤 분위기를 즐기다가 푹신푹신한 침대를 떠올리고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던 길에 사람이 많이 몰려있는 곳이 하나 있었다. 밤에는 문이 닫혀 있었던 줄리엣의 집이었다. 이때 베로나가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란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원래 이 때문에 알게 되어 방문한 도시인데 풍경 감상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흔적은 다음 날 찾아보기로 하고 그냥 지나쳤다.

베로나의 가로등은 건물과 건물 사이 한 가운데 매달려 있었다. 양 측의 건물 모두에 달려 있는 가로등, 혹은 한쪽에서만 밝게 빛나는 가로등보다 마음에 들었다. 정중앙에서 거리 전체를 은은하게 조명하는 불빛의 느낌이 참 따스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포근한 마음으로 숙소에 들어가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기차 시간 전까지 어디어디를 둘러볼까 베로나 관광 코스를 짰다. 인터넷에서 발견한 어떤 여행사의 베로나 투어를 참고했는데, 그들 투어의 마지막에 '산피에트로성'이란 곳이 있었다. 어제밤에는 이걸 왜 못봤을까 한탄하며 베로나의 전경을 보기 위해 곧바로 산피에트로성으로 향했다.

가는 길도 역시 아디제강을 따라 걷기 위해 조금 돌아갔다. 유럽의 강 풍경에 정말 너무 빠져버린 것 같다. 강 자체도 좋지만 그 위에 있는 소박한 다리, 건너편의 알록달록한 건물들과 삐죽 솟은 성당 하나, 그리고 그 뒤로 펼쳐진 맑은 하늘과의 조합이 참 좋다. 한국가서도 운치 좋은 강변 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런 조화로움을 찾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피에트로성은 괜히 성이 아니었다. 미켈란젤로 언덕도 생각보다 가파른 언덕이라 당황스러웠는데, 산피에트로성도 꽤나 높은 곳에 위치했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도시 전경에 빠지니까 등산 여행이 되더라. 계단 양 옆의 풍경을 위안으로 삼으며 힘겹게 성에 올랐다.

역시나 끝내주는 경치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와서 카메라를 살펴보니 똑같은 사진만 얼마나 찍었는지 모르겠다. 얼핏 보면 붉은 지붕의 건물들로 가득한 것이 피렌체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본 것과 비슷한데,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일단 산 피에트로성은 좀 더 높은 산에 위치하여 주변 공기 자체가 달랐고, 도시와 좀 더 가까이 있어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다. 또 피렌체와 달리 전망 뒤로 산이 없어서 희미하게 지평선과 하늘이 만나는 것도 더 마음에 들었다. 군데군데 나무가 심어져 있는 모습도 더 좋았고, 보면 볼 수록 아름다웠다. 성 위에서 바라보면 별다른 랜드마크나 특별한 건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뭐 하나 빠지지 않고 자연까지 품은 베로나가 아직까지 내게 최고로 남아있다.

그대로 오랫동안 베로나를 내려다보고 싶어서 성 바로 밑에 있던 카페에서 죽치고 앉아있었다. 아침에 계획했던 투어 목록을 보면서 이 곳들을 가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밀린 여행 에세이도 있고 해서 카페에 앉아 키보드를 잡았다. 물 한 모금 마시고 경치를 바라고보고, 글 한 단락 쓰고 또 경치를 바라보다보니 두세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버렸다. 조금만 더 있다가는 시내 구경은 하나도 못하고 떠나야 할 시간이었지만 상관 없었다. 어떤 관광지에 가도 이 위에서 바라본 도시 전경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결국 너무 여유를 부리다가 기차를 놓치고, 겨우 겨우 다음 기차를 타고 베니스로 이동했다. 어떻게 보면 밀라노보다 딱히 한 것도, 본 것도 없이 지나온 베로나지만 훨씬 더 알찬 시간을 보냈다는 생각이 든다.

베로나를 기점으로 내 짧은 이탈리아 여행이 전환되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 어설픈 관광을 다녔다면 베로나부터는 완벽한 힐링 휴양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여행에 작은 여유를 만들어준 도시, 베로나를 정말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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