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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자 Sep 05. 2019

사랑하는 줄 알았다. 사랑한다고 믿고 싶었다.

잉마르 베리만 "가을소나타(AUTUMN SONATA, 1978)"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말년 영화인 ‘가을소나타’는 여느 베리만의 영화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베리만만큼 원초적인 인간의 심리와 관계에 관한 묘사에 탁월했던 감독도 드물다. 베리만의 세계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재능이라고는 전혀 없다.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래서 고통받으면서도 상황을 바꾸지 못하는 무능력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인 것이다. 


“어느 가을날 에바는 유명 피아니스트로서 전세계 순회공연 중인 어머니 샬롯(잉그리드 버그만)을 집으로 초대한다. 7년 만에 만난 모녀는 서로를 아끼고 애틋한 듯 보이지만, 에바가 숨겨두었던 속내와 사정을 하나씩 꺼내면서 갈등은 시작된다. 어머니에 대한 애증을 숨기지 않는 에바와 그런 딸이 두렵게 느껴지는 샬롯. 서로를 원하는 만큼 각자 자신의 아픔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상대가 원망스러운 두 사람의 다툼은 평행선을 달리고, 급기야 샬롯은 에바로부터 다시 도망친다.”                                      
- <시네21> 영화 줄거리 발췌 -

관객을 바라보며 자신의 아내를 소개하는 남편의 시선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직업을 가졌었고 그녀와 어떻게 만났는지 등을 말한다. 오랜만에 만나게 될 엄마에게 쓸 편지를 남편에게 읽어주며 영화는 시작된다. 다시 영화는, 엄마에게 보낼 편지를 읽으며 끝난다. 달라진게 있다면 엄마 샬롯은 도망치듯이 에바를 떠났고, 그 편지는 떠나간 엄마에게 보내는 화해의 편지이다. 두 편지 사이에서 흘러가는 영화는 사랑과 증오로 점철된 모녀 관계를 그린다. 


사랑하는 줄 알았다. 사랑한다고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에바와 샬롯은 얼굴을 보자마자 밀려오는 마음 속 깊은 곳의 증오감에 금새 불편해진다. 7년만에 본 얼굴에 대한 반가움은 모녀 관계와는 관련이 없었다. 장애를 가진 또 다른 딸, 헬레나가 건너편 방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 얼굴을 굳히는 샬롯의 모성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영화가 시작 될 때 남편이 아내를 설명한 것과는 상반되게, 이 영화에는 에바의 인생도, 남편의 대사도 없다. 에바는 그저 엄마와의 뒤틀린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엄마를 존경하고, 사랑해서, 인정받고 싶던 평범한 딸이었지만 언제나 엄마는 자신의 삶에만 몰두한다. 잘못된 것을 깨닫고 사랑을 쏟으려 해도 왜곡된 표현의 방식은 딸의 인생에 가장 큰 상처를 남겼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자신의 삶, 에바의 엄마가 아닌 엄마로서의 샬롯의 삶에만 몰두한 이기적인 인간상은 보는 것만으로 구토가 나온다. 


7년 만에 재회한 엄마와 딸의 대화는 결코 엄마와 딸의 입으로 발화되지 않는다. 그저 이기적인 인간상의 거친 마찰일 뿐이다. 멀리 떨어져 있었던 시간의 공백보다는 서로가 함께였을 때의 골이 더 깊다. 하루 밤 동안 더욱 깊게 패였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사랑을 웃음 짓던 에바와 샬롯의 가면은 증오로 붉게 솟아오른다. 헬레나의 절규는 결국 소리를 잃는다. 밀려오는 혐오감에 다시 등을 돌리고, 애초에 사랑은 없었다는 듯 검은 화면이 시야를 가린다. 절제된 고통의 표현에 공허한 감정만 남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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