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묵자 Sep 12. 2019

당신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나요?

앤디 무스키에티 “그것: 두 번째 이야기(It Chapter Two)”

누구나 잊고 싶은 기억과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이 있다. 잊고 싶은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고, 오래 남겨두고 싶은 기억은 곧 잘 희미해진다. 잊지 못했으나 잊었다고 착각하는 기억도 있다. 데리를 떠난 루저클럽 아이들에게 손바닥에 남아있는 상처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 것처럼. 그러나 잊혀지지 않은 기억은 언젠가 소환된다. 27년 만에 걸려온 마이크의 전화 한 통은 무의식 속에 잠들어있던 공동의 트라우마를 자극한다. ‘공포’라는 감정을 입 밖으로 내뱉지도 못하게 된, 지금은 어른이 된 일곱 아이들의 이야기. ‘그것: 두 번째 이야기’는 이들의 ‘기억’에 관한 영화이다.

그것의 첫 번째 이야기는 괜찮은 성장 영화였다. 불안정한 청소년기를 지나고 있는 인물들이 페니와이즈로 형상화되는 극도의 공포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이 영화의 핵심이었다. 가장 좋았던 점은 일곱 아이들의 서사가 균등한 비중으로 다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들은 일명 ‘루저클럽’이다.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동네에서 놀림을 받고, 가정 폭력에 시달린다. 일곱 아이들이 함께하게 되는 과정은 물론 각자의 공포를 대면하고 극복해가는 과정이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비중 있게 다루어진 점이 ‘루저’를 내세운 영화로서 손색없었다.

두 번째 이야기의 러닝타임 169분이 걱정되지 않았던 것도 전작의 이런 특징 때문이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루저클럽이 27년 만에 데리로 모이는 과정, 데리를 거닐며 잠자고 있던 기억을 소환해내는 과정, 다시 한번 페니와이즈를 극복하는 과정을 자세하게 그려낸다. 성인 배우들의 싱크로율이 아주 뛰어날뿐더러, 27년 전 루저클럽과 현재 루저클럽의 모습이 교차되는 장면이 영화 전반에 사용돼서 인물에 대한 몰입도는 최고였다. 어렸을 적의 기억을 소환함과 동시에, 그때의 공포를 다시 대면하게 되는 장면이 반복되는데, 어른의 모습임에도 전혀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속편이 아니라 확장판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1편을 잘 녹여냈고, 긴 러닝타임을 투자한 것이 전혀 아깝지 않은 연출이었다.

*이어지는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장면이 많아 보는 내내 고통스럽기도 했다. 데리를 떠난 아이들은 기억을 못 한다고 착각하지만, 27년 전의 일은 어른이 된 그들 모두의 무의식에 남았다. 베벌리와 에디는 자신이 싫어하던 부모의 모습을 가진 파트너와 결혼했다. 성추행과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를 두었던 베벌리는 똑같은 모습의 남편과, 거대한 체구의 어머니로 놀림을 받고 자란 에디는 비슷한 체형의 아내와 결혼했다. 어린 동생의 죽음을 겪은 빌리는 작가가 되었지만 해피엔딩은 상상하지 못하고 끔찍한 결말 만을 만들게 된다.
 

가장 안타까웠던 캐릭터는 리치이다. 전작에서 어땠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리치는 두 번째 이야기에서 동성애자로 그려진다. 어른이 된 리치가 떠올린 공포의 시작은 오락실에서의 기억이다. 같이 게임을 하던 친구를 붙잡던 리치는, 동네 양아치 헨리에게 게이라고 놀림을 받으며 공원으로 도망쳐 나온다. 공원에서 마주친 공포는 미국의 남성성을 대표하는 거인 ‘폴 버니언’ 동상이었다. 자신에 관심 없는 주변 사람 속에서, 도끼를 휘두르는 동상을 피하던 리치의 모습은 당시 미국 북부에서 동성애자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보여준다.  

오프닝 시퀀스에 나오는 게이 커플의 모습은 영화의 끝에서 리치와 에디의 모습에 완벽하게 투영된다. 천식 호흡기를 사용하던 모습에서 죽은 인물과 에디가 은근하게 겹쳐진다 싶었는데, 에디의 죽음을 겪은 리치의 모습을 보니 확신하게 되었다. 루저클럽에게 친구의 죽음은 결코 작은 충격이 아니었지만, 다른 인물에 비해 리치가 보이는 반응은 달랐다. 에디의 죽음을 부정하고, 시체를 놓지 못하고, 혼이 빠져 무너지는 동굴에서 거의 끌려 나온다. 호수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에디의 눈물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의 것이었다. 영화는 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가장 퀴어프렌들리할 것 같은 21세기의 LA에서 코미디언으로 살고 있지만, 벽장 속에서 나오지 못하는 리치의 아픔이 더욱 쓰라리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1편에서도 그랬지만 결말은 조금 아쉬우면서도, 최선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페니와이즈 자체가 유형의 괴물이라기보다는 무형의 공포를 형상화한 것이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이 그를 물리치는 방법이 뭐가 또 있겠는가. 그래도 아쉬움을 떨칠 수 없는 부분은 마이크의 이야기이다. 사실 왜 그만이 데리에 남아 페니와이즈를 연구했는지, 마을 변방의 원주민은 어떻게 만났고 의식은 또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서사가 부족했다. 물론 그것이 메인인 영화는 아니지만, 마이크의 인생을 페니와이즈와 데리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그려놓고 설명이 부족하니 조금 맥이 빠지기도 했다. 그에 관한 이야기가 더 있었다면 마지막에 책을 덮고 도서관을 떠나는 마이크의 모습에 더 큰 희열을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공포를 극복한 줄 알았지만, 각자의 무의식 속에 트라우마로 남아 27년을 보낸 루저클럽. 앞으로 행복한 기억만 가질 수는 없겠지만, 서로에게 서로가 있었음을 기억하며 데리에서의 기억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얽히지 못한 사랑의 잔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