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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재 Jul 24. 2018

모로코1일: 판타스틱 박스

딱 이맘때쯤의 모로코

모로코 패턴에 빠졌다. 옥상과 고양이도 손짓했다. 그렇게 얻게 된 21일을 기록해보기로 했다. 시작은 스페인 타리파였다. 




타리파에서 배를 타고 탕헤르에 가는 게 첫날 목표였다. 타리파 해안가에는 승선티켓 판매 업소가 즐비했다. 벌써부터 아랍 글씨가 보였다. 파란 배경에 고래가 그려진 수제 간판들이 눈에 띄었다. 글씨가 새차게 쓰여 있어 바닷바람과도 잘 어울렸다. 물냄새가 짙은 것 치고 소금기나 습기는 덜했다.  


유독 마음에 드는 간판을 보고 들어갔다. 은행 유니폼과 같은 정장을 차려입은 티켓 판매원이 손님을 맞았다. 티켓 가격은 400디람. 5만원도 안됐다. (*모로코 디르함은 UAE디르함과 다르다.) 다른 나라로 건너가는 데 이만큼이면 된다는 게 놀라웠다. 가만히 생각해봤다. 모로코 육지가 육안으로 보일 정도였으니 그럴만도 한가. 


국경을 넘었다.


모로코 첫날을 끄적여 본 그림

 

여행 전 숙지한 게 있었다. 택시 타기 전 가격 흥정이다. 미터기가 있었지만 장식이었다. 야침차게 가격을 외쳤다. 낮춰 불렀다고 생각했는데 흔쾌히 타라고 하니 찜찜했다. 어리둥절 하던 와중에 택시기사가 짐을 뺏어 트렁크에 실었다. 여행이 순탄할 것 같지 않았다.  


숙소 근처 메디나(마을의 중심지)에 도착했다. 작고 단단해보이는 두 청년이 택시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냐고 묻기에 숙소 이름을 말했다. 자기가 그 길을 잘 안다면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음. 이게 뭘까. 라고 생각하는데 짐은 또다시 내 손에서 벗어나 있었다. 


인간은 같은 호구짓을 반복한다


베니스에서 짐을 뺏어 들던 ‘삐끼’의 악몽이 떠올랐다. 매너남 행세를 하다가 코스티투치오네다리를 건너면 곧 ‘5달러! 5달러!’ 거리며 스토커처럼 쫓아다녔던 이태리가이. 아픈 기억이었다. 그들을 향해 손 사래를 쳤다. 대츠 오케이. 캐리어를 도로 가져왔다. 하지만 한번 호구는 영원한 호구. 나는 또 넘어가고 말았다. ‘노 프러블럼. 마 프랜드!’ 친구라는데. 설마. 아직 세상은 내게 너무 아름다웠나보다.  


숙소에 도착하자 구릿빛 오빠들은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여행을 망치기 싫어 지갑을 뒤졌는데. 아직 돈을 안 뽑았다. 돈이 없다고 썩소를 짓고는 숙소 안으로 도망쳤다. 기다리겠다는 아랍식 영어가 양동이에 담겨 뒷통수에 쏟아졌다.  


2층 침대가 빡빡하게 채워진 방에 들어섰다. 그 중 하나에 기어 올랐다. 아니 숨어 들어갔다. 화인지 겁인지 뛰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안경 낀 상냥한 호스트가 준 열쇠를 작은 힙섹에 소중히 넣어뒀다. 쓰고 남은 유로, 그림수첩, 연필, 립스틱, 인공눈물 같은 잡동사니들도 용케 딱 떨어져 들어갔다. 짐을 마저 정리하고 모로코 숙소의 하이라이트인 옥상까지 싹 훑었다. 금발 여행객들이 히피들처럼 옥상 벤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백인 공포증 중증환자였지만 ‘쿨’한 동양인인척 했다. 헬로. 목울대에 힘을 줘야했다. 눈꺼풀이 떨렸고 어깨는 축 쳐졌다. 배를 타기 전 버스에 긴 시간 몸을 담은 탓이었다. 


그래도 첫날이니 나가보자. 하여 숙소를 나섰는데 익숙한 얼굴들이 떡하니 서있었다. 지금까지 기다리다니 정성도 갸륵했다. 그냥 줘버리자. ATM이 어딨는지 아냐고 물었다. 못 알아듣기에 손짓을 동원해 설명했다. ‘머니’, ‘머신’, ‘아웃’. 아는 단어도 총 동원했다.


‘아, 판타스틱 박스!’ 진기하게도 네모난 상자가 돈을 토해내니 마술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인가 보다. 뒤따라가니 GS편의점 구석에서 10년 정도 썩은 듯한 현금인출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경비대처럼 양손을 모으고 내가 ‘판타스틱 카드’를 꺼내는 걸 지켜봤다.  


응? 오류가 있다는 얘긴가. 영어로 되어 있어 알아볼 수 없었다. 돈이 나오지 않았다. 다시 시도해도 돈구멍은 잠잠했다. 진땀이 끈끈하게 등을 적셨다. 두어번 시도 끝에 마침내 현금이 나왔다. (*후에 알고보니 돈이 인출된 걸로 기록되어 있어 20만원 정도를 날렸다. 작동하지 않으면 그냥 다른 기계를 공략해야 한다.) 드디어 혼자다! 돈 쓰는 게 이렇게 행복할 수가. 나는 경호원의 감시망이 촘촘한 저택에서 몰래 탈출한 사고친 재벌 3세처럼 들떴다. 



남은 이야기


벌써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메디나 골목의 한 귀퉁이가 시끌시끌했다. 시장이라도 돌기로 했다. 안좋은 시작은 잊어버리는 게 나았다. 스페인에서 가져온 파스타면이 있으니. 그래. 가지 파스타를 해먹자. 시장에 오색빛깔 올리브와 다양한 크기의 올리브유가 가득했다. 올리브 오일은 숙소에 있겠지. 그래도 모로코인데.  


가지만 사들고 어둑한 골목길을 지나 숙소로 향했다. 옥상 바로 아래층에 있는 부엌에서 영어로 된 안내문을 숙지했다. 그런데 아무리 뒤져도 오일이 없었다. 다시 나갈 힘은 더 없었다. 식용유에 뒤적뒤적 면과 가지를 넣고 볶았다. 완성된 요리는 향도, 색도, 맛도 엉망이었다. 


똥맛 가지오일파스타


하루가 엉망이려면 이렇게 엉망일 수도 있구나. 배는 고프니 음식물 쓰레기를 꾸역꾸역 입구멍에 집어넣었다. 속이 니글니글했지만 도로 뱉을 만큼은 노력을 쏟기도 아까웠다. 대충 씻고 얼른 침대 위에 몸을 뉘였다. 휴. 그래도 침대는 푹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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