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내 발가락 골절의 원인은 전봇대였다

by 사육일칠

내 발가락 골절의 원인은 전봇대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뭐 술 처먹고 걸어가다가 전봇대에다 발차기라도 했냐고 물었고, 차라리 그게 나을 거라고 답했다. 사고를 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까진 말이다. 대형 트럭이 전봇대를 박아서 전봇대가 넘어졌고, 급하게 피해 봤지만 발이 깔려서 뼈가 으스러졌다는 이야기를 해 주면 '전봇대가 어떻게 넘어지냐' '전봇대에 깔렸는데 멀쩡할 리가 없다' '술 좀 작작 마셔라' 등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수모를 겪고 나서는 휴대폰에다 당시의 사고 현장을 담은 뉴스 영상을 다운받아놓고는 자 이거 봐, 왜 사람 말을 못 믿냐 하며 보여주곤 했다. 문제는 영상을 보여주는 상황은 보통 3차까지 간 술자리인 데다, 나도 알딸딸해진 상태라 갤러리 속 동영상을 찾기가 쉽지가 않았고, 설사 찾아서 보여줬다 하더라도 취한 친구놈들은 이새끼 구라도 AI로 만들어서 치네 하며 끝까지 믿질 않았다. 그런 일을 여러 번 겪고 나서는 "그러게요. 그래서 요새는 일주일에 딱 한 번만 마시고 있어요" 하고 만다. 참 아쉬운 일이다. 난 전봇대에 내 발이 으스러진 일보다, 그 이후에 있었던 일을 사람들에게 얘기해주고 싶어 안달나있기 때문이다.

그 땐 아마 한 달 전, 오전 11시쯤이었을 것이다. 그 전날에 혼자서 와인 한 병을 비웠다. 리코타 치즈가 너무 많아서 다 없애야 했거든. 덕분에 11시 30분에 수업이 있다는 걸 깜빡 잊고 10시 50분에 간신히 일어났다. 알람 맞출 정신은 당연히 없었다. 무슨 11시 30분에 수업이 있는지. 점심은 언제 어떻게 먹으라는 건지. 여튼 씻을 시간은 당연히 없었고 자다가 입던 옷에다 겉옷에 체육복 바지, 슬리퍼에다가 모자만 쓰고 밖을 나섰다. 그 와중에 이어폰은 꾸역꾸역 챙겨 나갔다. 혼자 밥 먹을 때 주변 소음이 들려서는 안 되니까.

강의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횡단보도의 신호 운이 좋아야 한다. 일단은 뛴다. 뛰어 봐야 운동화 신은 사람에 비해선 한참 느리지만 뛴다. 망할 아스팔트 조각이 발바닥과 슬리퍼 사이로 들어가는 순간에, 지금 뛰면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음을 확인한다. 땅을 강하게 박차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순간 그대로 돌조각이 와득, 하고 발에 박힌다. 얼굴을 찡그리며 발바닥을 확인해 보니 돌 모양 그대로 피부가 파였다. 피가 나진 않는다. 횡단보도 신호는 빨간색으로 바뀐 지 오래다. 기다려야 하는 시간도 나온다. 98초. 에라이, 노래 반절은 듣겠네. 이어폰을 꺼내서 귓구멍에 집어넣는다. 삐빅삐빅. 배터리가 부족하다는 신호음이 귀에 때려 박힌다. 아오, 오늘따라 왜 이러는지. 태양은 왜 이리 높이 떠있어서 사람을 눈부시게 하는지. 급하게 나오느라 선크림도 안 발랐는데.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그늘을 찾기 시작한다. 다행히도 태양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이 딱 하나 있었다. 전봇대. 옳다구나, 하고 그늘에 쏙 숨었다. 숨은 다음 옆을 보았다. 불쌍하게 태양에 타들어가는 사람들. 안타깝지만 이 전봇대의 그림자에 숨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입니다. 죄송하게 됐네요. 기다리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돌아가며 바라보는데, 뒤쪽 대각선쯤에 서 있던 딱 한 남자가 이상했다. 정확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폰을 보지도 않았다. 이어폰도 끼지 않고 있었다. 횡단보도 신호의 남은 시간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태양빛을 손으로 가리고 있지도 않았다. 확실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만 돌린 게 아니라, 몸통 전체가 나를 향한 상태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 그를 봤을 땐 뭐, 길 가다가 하루에 한 번쯤은 마주치는 이상한 사람이겠지. 신호나 기다리자, 하며 정면을 응시했다. 그렇지만 시선이 계속해서 느껴졌다. 곁눈질로 흘끔흘끔 쳐다봤지만, 그 남자는 내게 원한이라도 있는 듯 요지부동으로 나를 뜨겁게 응시하고 있었다. 태양이 뜨거워 아스파트로 된 길이 끓어가는 날씨였지만 소름이 우수수 돋았다.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38초. 제발. 빨리... 남은 시간을 알려주는 저 신호등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아니, 저 남자의 뜨거운 시선만은 정확히 느껴졌다. 노래도 거의 끝나가고 이어폰 배터리도 거의 운명하기 직전이다. 태양빛을 맞아도 좋으니 빨리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싶다. 벗어나야만 한다. 드디어 12초, 11,10,9,8,7,6초, 신호등이 시야에서 팍 사라진다. 어째서? 무슨 일이지... 하고 주변을 살펴볼 새도 없이 콰광. 굉음이 이어폰 음악 소리를 가볍게 뚫고 귀 속을 파고든다. 저기요!!!!!!! 한쪽 이어폰을 빼고는, 네? 대답하니, 전봇대가 덮쳐오고 있었고 대형 트럭에 타 있는 사람이 정수리에서 피를 흘린 채 기절해 있었다. 피하려는 순간 스텝이 꼬여 넘어졌고, 그땐 이미 전봇대가 지면과 45도를 이룬 채로 더 빠르게 나를 향해 덮쳐오는 시점이었으며, 팔근육을 써서라도 벗어나려 노력했으나 결국 내 발을 망가뜨리고 말았다. 순간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벙쪄 있었지만, 엄지발가락의 끝과 중지 발가락의 끝이 맞닿은 채로 발이 피범벅이 된 걸 확인하고는 그때부터 이성을 잃고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내 겨드랑이 사이로 낯선 사람의 팔이 들어왔다. 으차, 하며 온 힘을 다해 날 끌어내기 시작했다. 가장 짜증 났던 건 분명 내 발이 아작이 나서 아파하고 있는데, 내 고통은 아랑곳 않고 있는 힘껏 잡아당겨 날 빼냈다는 거다. 그 자식만 아니었다면 내 발톱은 그 순간 떨어져 나가지 않고 멀쩡했을 것을....내 발이 완전히 전봇대에서 벗어나자, 바로 내 겨드랑이에서 팔을 빼서 바닥에 내팽개쳤다. 뼈가 뒤틀리는 느낌이 들어 도저히 발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쳐다보는 순간 고통이 더 심해질게 분명했다. 날 끌어낸 놈의 얼굴이라도 보자. 망할, 그 남자였다. 내가 전봇대에 숨어 있자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던 그 남자. 하지만 지금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전봇대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럼 아까 나를 보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그때도 전봇대를 보고 있었다는 건가? 근데 지금은 사람이 다쳤다. 119라도 부르던가 날 업고 병원이라도 가던가 해야 할 마당에, 지금 도대체 어딜 보는 거지? 그때 딱 한번 그의 시선이 움직였는데, 전봇대의 끝을 향하는 것 같았다. 전봇대의 끝이 돌 무더기에 걸쳐져 있었다. 저것 때문에 발이 곤죽이 된 건 면한 건가. "도와주세요!!!" 외쳤다. 그 남자 뒤에 있던 사람들은 모든 상황을 지켜보다가 드디어 내게 다가와 그제야 괜찮냐고 물어봤다. 119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젠 내가 그 남자를 노려볼 차례였다. 도대체 뭐 하는 놈이란 말인가. 기껏 구해놓고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다니. 눈을 부라리며 남자를 쳐다봤지만 그는 여전히 전봇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구급차에 실려서 "환자분 지금 상태 어떠세요?" 하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