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동해선 배차 간격 덕에 달리기 실력이 늘었다. 보통 부산 지하철은 다음 열차가 5분 뒤에 있어서, 놓치더라도 아무런 미련 없이 다음을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동해선은 다르다. 차를 한 번 놓치면 2~30분을 기다려야 한다. 특히 한겨울에 열심히 일하고 퇴근했는데 칼바람 같은 추위에 벌벌 떨면서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건 정말 고역이기에, "퇴근해, 고생했다" 직장 상사님이 말씀하시는 순간 타임 어택이 시작된다. 퇴근하는 동료도 타임 어택에 나도 그만 신나버려서 그 게임을 즐기게 된다. 롯데월드에서 오시리아역까지 도보로 최소 10분은 걸리는데, 롯데월드 근무복을 사복으로 갈아입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총 20분은 걸린다. 20분이 걸리는 일을 몇 분 안에 끝내야 하는지는 동해선 배차 간격에 따라 달라진다. 어떨 때는 촉박하게 준비해야 하고 어떨 때는 여유를 즐길 수도 있다.
동해선 기장님은 정말 칼 같이 시간 약속을 지키신다. 20시 22분 차라고 하면, 20시 21분 57초,58초,59초, 20시 22분 00초. 땡! 하고 문이 텅 닫히고 열차가 출발한다. 이 때문에 시간이 촉박할 경우엔 오시리아 역 승강장에 발을 디디기 전까지는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아마 기장님께선 손목 시계의 초침을 유심히 보고 계시다가 정시가 되면 엑셀(?)을 밟으시는게 아닐까. 조금 매정하다 싶어도 어쩌겠는가. 난 동해선을 이용해야만 하는 입장이니.
동해선 열차 출발 시간이 18시 24분인 날. 18시 17분에 퇴근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20분 걸리는 일을 7분 안에 끝내야 하는데,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다 보니 도전 정신이 불타올랐다. 롯데월드 파크에서 사무실로 곧장 뛰어간다. 뛰면서 한 손으로 파란색 가디건의 단추를 풀고, 이어서 노란색 와이셔츠의 단추도 푼다. 단추가 하나라도 풀리지 않으면 끝장이다. 손이 꼬이는 순간 시간이 지체되고 차를 놓치게 된다. 단추를 다 풀고 나서 무전기 전원도 미리 꺼 놓는다. 사무실 문을 급박히 연 뒤, 출퇴근 기록부에 알아 볼 수는 있을 정도로 이름을 빠르게 작성한다.
사무실에서 해야 하는 건 다 했다. 다음은 탈의실이다. 사복으로 갈아입으며 옷 소매에 반쯤 가려진 갤럭시 워치 화면으로 시간을 확인한다. 18시 20분.급히 신발을 신는데, 양말이 살짝 벗겨졌는지 발 뒷꿈치 살이 계속 신발 뒷부분에 쓸린다. 조금 따갑지만 어쩔 수 없다. 계단을 내려가고, 출구를 지키고 계신 직원분께 인사를 드리는 동시에 출입 관리 기계에 지문을 인식한다. 유리 미닫이 문을 쿵 하고 몸통 박치기로 여니 저 멀리 오시리아 역 간판이 반짝이는 게 보인다. 시간을 다시 확인. 18시 21분이다. 뛰어라! 마스크는 뛸 때 호흡에 방해되니 벗어버린다. 미친듯이 뛰면서 마스크가 이리저리 날리다 보니 안쪽 물기가 뽀송뽀송하게 마른다.육교 계단을 타고 올라가서,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타고 내려간다. 숨이 넘어갈 듯한 고통을 견디며 조금 더 뛰니 역 입구에 도착한다. 18시 24분. 제발. 기장님이 18시 24분 00초에 즉각 출발하시는 분이 아니시길 간절히 빌며, 카드를 찍고 에스컬레이터를 겅중겅중 큰 보폭으로 타고 올라간다. 에스컬레이터 계단을 2개 정도 남겨놓으니 드디어 승강장이 차츰차츰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열차가 올 만한 낌새도 전혀 보이질 않는다. 왼쪽 멀리를 쳐다보니 저만치 기차가 멀어져 가고 있다. 타임 어택에 실패했다. 다시 쓴 마스크에는 세차게 내뱉는 숨 때문에 다시 물기가 촉촉히 맺히기 시작한다.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고 옷 안쪽은 땀 덕분에 축축하다. 뛰어 오느라 가쁘게 내쉬었던 숨을 고르는 동안 여유롭게 걸어 온 듯한 사람들이 승강장으로 들어오는데, 아마 내 모습을 보고는 단 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아 이 사람, 방금 열차 놓쳤구나. 많이 아쉽겠네, 하고.
18시 25분, 오시리아 역에서 동해선을 놓치고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 땀 흘려가며 뛰어왔을까. 집에 기다리는 고양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급한 약속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반드시 제 시간에 해야 하는 업무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날씨도 그렇게 춥지 않았기에 2~30분 정도는 충분히 기다릴 만 하다. 그냥 출발 시간이 가장 이른 열차를 타서 빨리 가는게 이득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왜 가장 이른 열차를 타야 하는지는 나 자신에게 묻지도 않고 냅다 뛰었던 것이다.
결국 20분 정도를 기다려 새 열차를 탔다. 차 안에 발을 디디고 1분 정도 서 있으니 피곤이 와르르 몰려오기 시작한다. 다리에 힘이 자꾸 풀려서 서 있기도 힘든데, 설상가상으로 앉을 자리도 없다. 그냥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문 앞에 주저앉아, 차가운 바닥과 옆에 있는 쇠 기둥에 의지한 채 기절하듯이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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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건드리는 느낌이 든다. 간신히 눈을 반 쯤 떠서 고개를 든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시다.
"학생... 너무 피곤해 보이는디 내가 앉아있던 자리에 앉어."
"아 저 정말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어르신께 정중한 거절을 표한 뒤, 내릴 역이 되자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표하고는 열차에서 벗어난다. 2호선으로 환승하려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간다. 보통은 가만히 있지 않고 빠르게 걸어서 에스컬레이터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데, 도저히 그럴 힘이 없어서 탈 것에 실려가는 짐처럼 가만히 서 있는다. 두터운 검정색 패딩을 입고 있었는데, 가만히 서 있는 내 옆으로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내려가는 사람의 오른쪽 팔이 내 왼쪽 팔에 스윽 소리를 내며 스친다. 한 명이 스치고, 두 명이 스치고, 세 명, 네 명이 스쳐 지나간다. 에스컬레이터에 나 혼자 남아 네 명이 앞으로 걸어 내려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순간, '나도 빨리 걸어 내려가야 하나?' 하는 충동이 들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다리에 정말 힘이 없어서 계단을 한 칸 씩 올라가는 것도 벅찼을 뿐더러, 열차를 급하게 뛰어서 타야만 하는 이유가 나 자신에게 없었다는 사실을 동해선을 놓친 뒤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동해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는 길에 무빙워크가 있는데, 무빙워크에서도 걷지 않았다. 그냥 우두커니 서서 레일에 내 몸을 맡겼다. 사람들이 나를 조금씩 건드리며 지나가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정지 상태를 지켰다. 새로운 열차로 갈아탔고, 자리에 편안히 앉아서 10분 정도를 졸았더니 내려야 하는 역을 지나칠 뻔 했다.
동해선 열차를 잡으려다 보니 달리기 실력이 늘었고 덩달아 체력도 조금 늘었지만, 땀에 젖은 채로 지하철을 타는 건 그닥 내키지 않는다. 나에겐 달리기 실력이 느는 것보다 퇴근 후에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는 게 더 좋다. 앞으로도 퇴근하면 동해선 배차 간격에 상관 없이 천천히 걸어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