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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03. Not 회피형 인간, But 느린 인간

클언니의 일상다반사

by Christie

누구나 싫은 소리는 하기 어렵다. 미안한 말, 불편한 감정이 드는 말등은 전달하기 어려운 탓에 피하고 싶기 마련이다. 그나마 직장에서 일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은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지만, 사적 인간관계에서는 피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언제부터인가 "회피형 인간"이란 말이 자주 들렸다. 특히 연인 관계에서 더욱 그랬던듯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이 나이까지 연애를 해오면서 언제부턴가 내가 되뇌는 말은 "비겁한 사람은 싫다."였다. 지금식 표현으론 딱 "회피형 사람"인듯하다. 관계에 문제가 있어도 모른척하고, 상대가 문제를 제기해도 일단 피한다. 관계가 끝나감을 느껴도 마지막을 말하지 않는 상태, 이런 것들을 회피한다고 표현하는 게 아닐까..?


회피하는 사람들 너무 싫어..라고 하다가, 문득 나도 회피형 인간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과연 모든 순간, 모든 관계에 정면으로 대하며 살고 있을까? "회피"라는 말은 결국 돌아서 피한다는 뜻이다.

돌아보면, 난 나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걸 피해왔던 것 같다. 20,30대 때는 그냥 주어진 삶만 살아도 하루하루 나쁘지 않았다. 내 삶을 위해 뭔가 고민해야 된다고,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지만 생각은 거기서 끝나고 다시 외면하고 살아간다.

그러면서 매해 새해 계획은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겨도 일단은 해결할 방법보단 그냥 흘러가는 대로, 아니면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살아도 큰 문제가 없었기에 그런 삶의 방식에 익숙했다. 그리고 정체됐다. 내가 정체돼 있다는 걸 마흔이 넘어가며 느꼈다. 불안해졌다. 살아가야 할 날은 아직도 너무 많으니 말이다. 내가 외면했던, 회피했던 것들은 결국 문제가 안 생겨 다행인 것이 아니라, 뒤늦게 문제로 닥쳐왔다. 불편한 감정이 쌓여있던 인간관계도, 어느 정도의 끝이 보이는 직장 생활도, 싱글로 살아가게 될 미래에 대한 준비도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고민들을 계속 미뤄왔던 것이다. 40대가 되어버린 나는 더 이상은 미룰 시간이 없다는 걸 알아버렸다.


또 하나,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회피라고 느꼈다. 작지 않은 나이이다 보니, 내가 살아온 방식과 다른 새로운 흐름이나 변화를 인지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 속도가 꽤 느리다. 변화나 위기가 다가옴을 인정하면 내가 대응해야 하는데, 그 결과의 불확실함이 두려운 탓이다. 우연히 작년 말 때쯤 "누가 내 치즈를 옮겼나?"라는 책을 읽게 됐다. '아! 딱 나 같네..' 변화를 인지하면서도 대비하거나 행동을 계획하지 않는다. 불행이 닥쳤을 때 인정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고, 이유를 찾으며 해결할 시간을 지연시킨다. 이건 일이든, 연애든, 투자든 다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게 피해지는 게 아닌, '그때 결정 했었어야..' 하는 후회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피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이다. 모든 문제나 관계를 정면돌파하자거나 결론을 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단 상황을 똑바로 보고,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제대로 인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최대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고 자신에게 솔직해지자. 그걸 토대로 행동할지, 덮어둘지, 피할지 결정하면 된다. 그건 회피가 아닌 나의 선택이 된다. 회피는 책임을 면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나와있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회피는 결국 내 책임이 된다.


회피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카펫 아래 죽은 바퀴벌레"가 떠올랐다. 5년 전쯤 읽었던 자기 계발서였에서 나온 내용이다. 우리 집 카펫 밑에 죽은 바퀴벌레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다는 것, 그래서 찜찜하고 신경 쓰인다는 내용이다.


'맞아.. 치워야지.. 뭐.. 모른 척 한건 아니다. 잠시 깜빡한 거지..'


재작년에 내 20년간의 콤플렉스를 극복했다. 극복에 작지 않은 비용과 결심이 필요했다. 작년엔 10년 정도의 지병(?)을 치료했다. 올해 초엔 한 2년 외면하던 불편함을 해소했다. 마지막 남자 친구의 맘 떠난 행동에 내가 먼저 관계를 정리했다. 말하고 보니 많이 부끄럽지만 점점 빨라지고 있다. 이렇게 정면대응 할 때마다 그동안 그렇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을 느낀다. 하지만 그보다 변화된 내가 너무 만족스럽다. 그래서 다음에 느껴지는 불편한 문제를 직면하고 싶어 진다. 직면해서 변화하면 더 좋다는 걸 경험하고 있으니 말이다.


난 느린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여태 40년까지의 속도보다는 엄청 빠르다.

남들이 볼 때 내가 회피형 인간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난 나를, 내 삶을 회피하지 않는 조금은 느린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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