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의 좋은 기억
이민 생활의 현실과 그 의미
좋은 기억이라... 없네... 없구나. 왜 없지? 내 기억의 서랍을 샅샅이 뒤져 봐도 딱히 없는 것 같다. 우리 가족이 미국을 떠난 이유는 '자식 교육'이라는 뚜렷한 목표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과정이 어땠든 결과만이 중요했다. 그 결과 그 세월은 낭만이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척박한 현실이었다.
갑자기 든 생각은 좋게 받아들이지 못한 나의 잘못일까 아니면 좋게 받아들이지 못할 상황 때문일까...
세상이 바뀌어 미국 유학은 더 이상 환상이 아니게 되었고 부모라도 자식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내던질 만큼 무모한 모험을 떠나는 시대는 지나갔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무언가 대단한 게 있을 것처럼 크나큰 꿈을 안고 떠났지만 돌아보면 크게 의미는 없는 선택이었다.
원래부터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은 소중하다. 부모라도 부모 인생이 자식의 인생만큼 중요하다. 우리의 부모 세대는 자식에 대한 헌신과 사랑이 남다른 것 같긴 하다. 우리 세대는 사실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부모의 희생 덕에 무언가를 얻었지만 그 희생의 대가는 알 수 없는 물음표가 되었다.
미국에서의 좋은 기억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맛있는 음식? 좋은 사람들? 값진 배움? 다양한 경험? 우리는 여행을 떠난 게 아니었기 때문에 단순히 즐거움과 재미는 해당되지 않는다.
맛있는 음식이야 많지. 그 넓은 땅에 맛집이 얼마나 많겠나. 평생 먹으려고 해도 먹지 못할 다양하고 화려한 음식의 향연. 다만 부러울 거 하나 없고 내세울 거 하나 없다. 배고프면 뭐든 맛있기 마련인 것을. 인간이란 잠깐의 허기짐만 채워주면 먹고 싶은 걸 못 먹어서 죽을 일은 없다.
좋은 사람들 많았지. 인생에 귀인도 만나 보고 그들의 개입이 없었으면 어찌 살았을까 싶다. 고맙지. 반면에 나쁜 사람도 많이 만났다. 돈 문제로 서로 죽이니 마니, 총을 쏘니 치고받고 많이 했다.
미친놈은 어디 가나 있고, 땅도 넓고 인구도 많은 만큼 사이코패스는 얼마나 많겠는가? 친절한 웃음 뒤로 조롱하기 바쁘고, 잘 웃고 호탕한 사람도 순식간에 돌변한 적이 한두 번인가. 좋았던 사람도 안 좋게 변하고 아무튼 그래서 그런지 무언가 인간에 대한 고마움에 있어서는 결과적으로 상쇄된다고 해야 할까?
값진 경험은 어떤가? 타지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며 생존 능력도 늘리고 도전 의식도 불태우며 흔하지 않은 경험을 했다면 값졌다고 해야 하나? 근데 한편으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경험을 하고 합리화를 시키는 건 아닐지? 내면의 성숙함은 각자에게 달린 문제인 것을.
생각해 보면 미국은 행복해지려고 가는 곳이 아니다. 한국이 지옥이라면 미국은 더 큰 지옥이다. 똑같은 지옥이다. 좀 더 큰 목욕탕을 간다고 작은 목욕탕보다 월등히 나은 게 있을까. 어차피 씻고 나오는 건 똑같은데. 그런 차원에서 미국은 어떤 목적을 갖고 가는 곳이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목적을 달성하고 나의 자리로 돌아오면 됐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좋은 기억은 없지만 굳이 좋은 기억이 있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인생에 도움이 되는 건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마찬가지다. 좋은 기억으로 '그땐 그랬지' 하겠지만 나쁜 기억도 '그땐 그랬지' 하며 넘기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