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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스 Mar 25. 2021

TV 속 주인공들이 늙어간다.

그런데 왜 나는 웃음이 나지


얼마 전 새로 시작한 tvN 미니시리즈 <나빌레라>를 보는 중이다. <나빌레라>는 발레를 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이다. 심덕출(박인환 분)과 이채록(송강 분). 두 남자는 서로를 닮았다. 발레를 향한 애정 하나를 무기로, 무턱대고 스튜디오에 찾아가 '가르쳐달라'고 말할 정도로 발레를 사랑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다른 점이 더 많다. 채록은 발레에 익숙하지만 덕출은 그렇지 않다. 이제 막 발레의 ㅂ자를 알아가는 병아리 같은 존재이다. 또, 덕출은 비교적 경제적으로 안정되어있지만 채록은 그렇지 않다. 발레에 매진해야 하는 시기이지만, 당장의 생계를 위해 서빙 아르바이트를 병행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크게 다른건, 둘의 나이다. 채록은 23살의 이팔청춘이지만, 덕출은 70세의 노인이다.



나는 아직 한번도 나의 70살을 그려본 적이 없다. 감히 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언젠가 유행하는 '황금빛 노후 계획' 세우기 같은 트렌드를 좇아 미래를 더듬거려본 적은 있으나 거기에도 70살의 나이는 없었다. 기껏해야 50,60대가 전부였다. 굳이 상상해본다면, 70살의 나는 잘은 모르겠으나 따분하고 그저그런 인생을 살고 있는 (어쩌면 이미 세상을 떴을지도) 노인이 되어있을거라 추측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 노년의 나이에 자신이 무얼 하고 있을지 상상할 때, 거기에 아주 신나거나 행복한 일을 가득 넣을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가 생각하는 노인이 그렇고, 한국 사회가 보여주는 노인이 그렇다. 그런데 박인환은 76세의 나이에 발레복을 입었다. 까치발을 들고, 딱 붙는 발레복을 입고, 날갯짓을 하며 TV에 나타났다. 그렇다. 그는 70대의 발레리노가 되었다.


미니시리즈는 대체로 젊은 사람들의 것이다. 젊고 예쁜, 핫하고 잘생긴, 이른바 우리를 '눈호강' 시켜줄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 장르야 다양하겠지만 미니시리즈는 기본적으로 트렌디해야 한다. 트렌디한 미니시리즈에서 노인 배우는 등장하지만 주변부에 머문다. 주인공의 부모님, 할머니, 할아버지로 나오거나 가끔씩 등장하는 노령의 회장님(사장님 아니고 회장님이여야 한다), 출퇴근길에 마주하는 경비아저씨, 화면 한 켠에서 폐지를 산더미 처럼 쌓아놓고는 손수레를 끄는 노인으로 등장하면 그만이다. 그래서일까. 박인환은 <나빌레라>의 심덕출역이, 난생 처음으로 맡는 미니시리즈의 주연이라고 했다.


희끗한 머리와 주름이 가득한 얼굴이 말하는 인생은 그 어떤 젊은 이가 말하는 인생보다도 두텁고 깊다. 그래서, 현생에 치여 복잡한 머릿속을 부여잡고, 한숨 돌리고자 켠 드라마 속의 노인이 말하는 건 어쩐지 더 와닿는다. 나이 든 뒷모습은 우리 부모님 같기도 하고, 풀이 죽은 모습이 꼭 내 모습 같기도 하고, 내 미래같기도 하다. 한국 미니시리즈에서 노인이 주변부를 벗어나 중심부로 걸어나오고 있다. 조연이 아닌 주연이 되고 있다. 주인공의 서사를 연결하는 징검다리가 아니라, 자신만의 서사를 가진 주인공으로 우뚝 서고 있다. 이 변화는 무얼 의미할까.



2016년 tvN <디어 마이 프렌즈>는 노령의 '베스트 프렌즈'들의 이야기였다. 세월이 무색하게 늙어버렸지만, 가슴 속 한켠의 청춘을 품은 이들의 좌충우돌 인생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들의 우정이, 영원할 듯 하면서도 자꾸만 으스러지고 휘청거리는 모습에 혼자 눈물을 몇번이나 훔쳤는지 모른다. 2020년 MBC <꼰대인턴>은 50대의 꼰대가 그의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였다. 인턴 귀한 줄 모르던 그가, 불과 몇년 만에 추락해 누구도 눈길 주지 않는 '시니어 인턴'이 되었다. (비록 그 꼰대 이만식은 얄밉기도 많이 얄미웠다.) 나이 지긋한 부장님이어야 할 사람이, 허둥대는 인턴이 되어 온갖 고초를 헤쳐나가는 게 안쓰럽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시청자들이 그를 응원한데에는 분명 극중 이만식의 매력이 뛰어났던 덕택도 있을 거다. 중년의, 노년의 주인공도 사람들을 울고 웃게 만들 수 있다는 것. 우리도 이제 확실히 안다.


이제 76세의 박인환이 발레를 하고, 우리는 그 모습을 숨죽여 지켜 본다. 작년의 김응수도, 올해의 박인환도, 모두 처음으로 미니시리즈의 주연을 맡았다. <나빌레라>에는 20대의 청춘 송강이 함께 하지만, 그럼에도 내 눈길은 박인환을 좇는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나이들어 간다. 나는 이 변화가 마냥 즐겁기만 하다. 우리는 조금 더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고, 그 어느 인물도 주인공이 되지 못하리란 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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