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신화

나와 너를 넘어 우리로

by 박소령


2016년 8월부터 그 이듬해 9월까지 나는 UN 평화유지군 옵서버 자격으로 아프리카 서부사하라 지역에서 근무했다. 서부사하라는 1970~80년대 모로코와 사하라아랍민주공화국간에 전쟁이 치러지다가 1991년에 휴전협정을 맺은 이후로 대치하고 있는 분쟁지역이다. 여기서 나는 UN 임무단의 군사 분야 감시원으로서 휴전선을 중심으로 늘어서 있는 양측의 군부대를 순찰하며 정전협정 준수 여부를 감독했다.

순찰은 보통 아침 일찍 네 명의 대원이 두 대의 차량을 나누어 타고 UN 임무단의 각 지부라고 할 수 있는 팀사이트를 떠나 각 부대들을 돌아보고 오후 늦게야 돌아오곤 했다. 그러다 보니 순찰 시간의 대부분을 차 안에서 파트너와 보내게 되는데, 세계 각국에서 모인 여러 문화권의 파트너들과 나누는 이야기는 늘 흥미로웠다.

한번은 파키스탄에서 새로 온 아샤드 중령과 파트너가 되어 길을 나섰다. 팀사이트에 먼저 온 고참이자 사막 운전에 익숙한 내가 운전을 하고 아샤드 중령이 운전 보조석에 탔다.

지루한 순찰길에 아샤드 중령과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각자의 군 생활 이야기, 자기나라 소개를 하다가 아샤드 중령이 내게 종교에 대해 물었다. 아샤드 중령 뿐만 아니라 보통 무슬림 동료들과 차를 타면 거의 공통적으로 나에게 종교에 대해 물었다. 아무래도 만나보기 힘든 동북아시아 사람의 종교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처음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종교가 없으며 신의 존재는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무슬림 친구들은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무신론자가 있다는 들어는 봤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무슬림 국가에서 종교는 절대적이라 기독교나 불교같은 이교도는 있을지언정 무신론자는 거의 없단다. 뿐만아니라 무슬림들에게 무신론자는 회계도 불가능한 악질 죄인이란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대답하면 무슬림 친구들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연쇄 살인마와 함께 차를 타고 가는 기분이었을까? 그래서 그 다음부터 나는 우주의 질서를 믿는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무슬림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샤드 중령도 그랬다.

하지만 몇 분 뒤엔 내 기분이 좀 불편했다. 아샤드 중령이 화제를 돌려 내게 결혼 여부를 물었다. 내가 결혼한 지 3년 되었다고 답하자 돌아온 질문이 어떤 결혼을 했느냐는 것이었다. 어떤 결혼이라니? 내가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자 아샤드 중령은 ‘가족 내 혼’인지 ‘가족 외 혼’인지 다시 물었다. 파키스탄에서는 사촌 간 결혼이 가능하며 본인도 사촌 여동생과 결혼했단다. 순간 나는 속이 거북해지며 역겨움을 느꼈다. 사촌 간에 결혼하다니. 근친상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용서받지 못할 죄 가운데 하나 아니던가. 나는 가족 외 혼인을 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사촌 간 결혼이 금지 되어있고 무신론만큼이나 악질인 죄라고 말해 줬다.

우리는 서로에게 인간 말종 이었다.

그날 우리 두 인간 말종은 사이좋게 차를 타고 세계평화를 지키기 위해 사막을 누볐다.

우리는 선악을 느낀다. 뉴스에 나오는 끔찍한 범죄자들을 보며 분노하고 위기에 빠진 타인을 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훈훈함을 느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선악을 따져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느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구분이 모호한 것도 있다. 사막에서 나눈 나와 아샤드 중령과의 대화에서처럼 나에게 악인 것이 타인에게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또 동성애가 중세시대 유럽에서 악 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시대에 따라 갈리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살인이 길에서, 평범한 사람에 대해서는 죄 이지만 전쟁터에서, 적군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상황에 따라 갈리기도 한다. 우리를 고민하게 하는 것은 늘 이런 모호한 것들이다. 보통 문화적 상대성,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이해하고 넘기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로부터 부처님, 예수님, 공자님 등 옛날 철학자들의 선악론을 들여다보아도 어떤 행동이나 생각이 선인지 악인지에 대해서는 좀 알 수 있지만 선악 자체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마치 선악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어떤 사례가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구분하기만 한다.

선악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성선설과 성악설이다. 인간이 애초에 선한지 악한지에 대한 논의 인데 다들 아시는 것처럼 성선설은 사람의 본성이 애초부터 선하다는 얘기이고 성악설은 악하다는 얘기이다. 성선설은 중국의 맹자와 인간의 자연적 성향을 강조한 루소 정도가 해당되고 성악설은 순자와 공리주의자였던 홉스, 인간의 원죄를 강조하는 기독교가 이에 해당한다. 그 외 성무선악설, 백지론 등 다소 중립적인 파가 있고 노자와 부처같이 딱히 강조하지 않은 스승들도 있다.(각 이론들을 간략히 설명)

다들 워낙 뛰어나신 인류의 스승들이고 그들에 대한 연구도 많이 이루어져 여러 책을 읽어 보았지만 그 분들도 선악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명쾌히 설명하지 않으신 것 같다. 모두 선악이 무언지는 다들 알고 있다는 전제에서 논의를 출발하는 느낌이다. 마치 구약성서에서 이야기 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선악과를 먹고는 모두 선악을 구분하는 능력이 생겼다는 투다. 하지만 우리는 구체적 사례로 선악을 구별하기 힘든 경우를 너무 많이 만난다.

앞에서 이야기한 근친상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근친상간이 잘못된 짓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잘못된 짓일까? 이렇게 물으면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것이다.

일단 기독교에서는 야훼가 금지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 비록 아담과 하와, 그리고 노아의 홍수 이후 노아의 가족들이 인류를 번성시키는데 근친상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겠지만 그때는 예외로 하고 구약성서의 신명기에서 야훼는 친족 간의,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근친상간을 엄금하고 있다.

두 번째로 생물학, 유전학자들은 열성유전의 법칙을 들어 장애인 출산율 증가, 유전병 환자 증가에 따른 호모사피엔스 종의 몰락을 경고하며 안된다고 할 것이다.

세 번째로 사회학자, 문화인류학자들은 아들과 엄마 사이에 나온 또 다른 아이의 출생은 가족 내 질서를 파괴하고 이는 사회 시스템의 붕괴를 가져올 수 있어 안 된다고 할 것이다. 또 혼인이라는 것이 각각의 단위 가족을 이어 공동체의 결속을 가져오는 중요한 사회활동인데 이를 가족 내에서 해결하게 되면 다른 가족들과의 유대가 끊기면서 각각 고립된 씨족사회를 이루어 사회의 결속을 약화시키므로 안 된다고 할 것이다.

네 번째로 도교나 자연주의 철학자들, 유학자들은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며 하늘의 뜻을 거스르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아내는 ‘더럽고 역겨워서’ 안 된다고 했다.

앞에서 열거한 것처럼 근친상간은 여러 가지 이유로 잘못된 짓이다. 그렇다면 피임을 철저하게 하고 서로 진실되게 사랑하여 혼인은 하지 않고 섹스만 하는 남매의 경우는 어떤가?

이들은 두 번째 세 번째 이유를 무력화 시킨다. 그리고 신과 하늘의 뜻, 자연의 섭리는 21세기 자유주의 시민에게 더 이상 먹히는 얘기가 아니다. 또 아담과 하와, 노아의 가족 얘기처럼 예외가 존재하면 역시 선악은 그때그때 다른 것으로 이해하면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불편하다.

그렇다면 우리는(일부 변태들을 제외하고) 왜 근친상간이 불편하고 역겨울까? 그들이 딱히 내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 사회에 큰 위협을 가하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 문화적으로 어느 정도 허용되기도 하는데 말이다.

이에 대해 나 같은 무신론적 회의론자들이 신앙처럼 받드는 진화론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위에서 열거한 이유들 중 생물학, 유전학적, 문화인류학적 원인을 제거하고 인류가 진화하면서 근친상간을 피하고자 심리적 스트레스를 주기 위해 그런 거부감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만 이야기 하면 마치 우리의 DNA가 “아, 근친상간은 유전병을 일으키니까 피해야해, 그러니까 인간을 근친상간 이야기만 나오면 구역질을 하도록 만들자.”라고 회의를 통해 결정하고 협정공문이라도 보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분명히 그렇지는 않다.

좀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옛날 인류는(지금도 그렇지만) 참으로 다양한 성향을 가진 무리가 있었다. 어떤 무리는 근친상간을 좋아해서 가족 내에서만 혼인했고 어떤 무리는 지금 대부분의 우리처럼 근친상간을 싫어해서 가족 외 인원들과 혼인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 내 혼을 지속하던 무리는 유전병으로 심신이 약해져 스스로 무너지거나 고립된 사회활동으로 세가 약해져 가족 외 혼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여러 부족들과 결속을 다진 무리들한테 복속 당했다. 자연 선택의 과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근친혼을 싫어했던 선조들의 후예로서 근친상간에 역겨움을 가지고 있지만 가끔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살인과 거짓말 같은 다른 악행에 이러한 과정을 대입해 보면 우리가 왜 그런 것들에 자연스럽게 거부감을 갖고 있는지 설명이 된다.

하지만 여전히 선악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에는 부족하다. 위에 설명은 우리가 근친상간 같은 범죄를 싫어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지 선악 자체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선악의 문제는 사회적 문제이다. 도덕적 선의지의 절대성을 강조한 칸트나 이상적 이데아 세계의 모범적 모델을 강조한 플라톤 같이 선의 절대성을 강조한 철학자들은 싫어하겠지만 온 우주에 나 혼자 있다고 생각해 보면 선악이란 있을 수 없다. (고통과 질병 노화와 죽음 등의 현상이 넓은 범주의 악이라고 하면 모르겠으나 이는 자연적인 현상이다. 자연을 선악으로 나누는 것은 좀 그렇다. 한때는 지구가 태양의 주변을 도는 것이 악한 것이라고 믿기도 했지만.) 그렇다면 혼자 앉아서 하는 망상속의 범죄는 어떨까? 구약에서 얘기한 것처럼 마음속의 간음도 범죄라면 범죄겠으나 이 역시 간음할 대상이 있어야 성립되는 것이다. 훔치거나 죽이거나 미워하거나 기만하려해도 누군가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선악은 나 이외의 대상이 있어야 성립하는 사회적 문제이다.

선악은 이성적 판단이 아닌 감정의 문제다. 앞서 근친상간의 예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떤 행동에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범죄로 규정짓지만 이는 성문화된 법을 만들거나 사회구성원들에게 악에 대한 우리의 분노와 혐오를 설명하려는 이유이며 이러한 논거들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실 불완전 하다. 우리는 선악을 느끼고 그것을 바탕으로 흐뭇해하거나 분노한다.

아직 사회화가 덜된 유아기의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한 실험과 침팬지나 늑대 같은 사회생활을 하는 동물들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에서도 이들은 선악을 구분하며 감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이는 분명 선악이 일부분 교육과 사회화를 통해 주입되고 강화되는 후천적 영향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타고나는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본능적 성향은 논리적 사고보다는 감정으로 나타난다. 배고프면 식욕을 느끼듯이 악한 것을 보면 화가나고 선한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위와 같은 선악의 특징을 고려해 봤을 때 선이란 사회적으로 좋은 것이고 악은 사회적으로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좋다는 의미는 사회 구성원들 간의 결속을 다지고 그 사회가 안녕과 번영을 유지할 수 있는 상태이며 나쁘다는 의미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좋다 혹은 나쁘다는 감정은 어떤 일에 대한 우리의 심리적 태도이므로 결론적으로 “선악은 사회를 유지하는데 이익이 되는 것에 대한 우리의 감정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설명은 진화 심리학자들의 의견이다. 그들의 연구과정을 보자.

과거 우리의 스승들은 우리가 가진 생각과 지혜, 감정의 원천인 뇌를 들여다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인지하고 판단하는지 몰랐다. 그들은 이러한 미지의 영역을 이상세계, 신의 섭리, 하늘의 원리, 원초적 자아 같은 모호한 말들로 미루며 우리의 정신세계를 어렴풋이 탐구했다. 그래서 플라톤 같은 이원론적 철학자들은 이런 선악에 대한 구분 능력을 이데아에서 찾았고 칸트는 예지계의 세상과 예지자로서의 인간을 상정하여 해결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과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우리의 뇌를 들여다보고 신경망을 조사하며 심지어 이를 본떠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이런 획기적인 발전은 요즘들어 우리가 철썩 같이 믿었던 자유의지, 창의성, 선의지에 대한 문제 같은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 믿었던 부분들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얘기한다.

심지어 인간의 뇌는 전기신호를 분석하는 컴퓨터에 불과하고 인간의 정신은 각종데이터가 종합된 알고리즘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증거로 인간의 신경망을 본떠 만든 프로그램으로 인간을 게임에서 이기고 시를 쓰며 대화도 한다. 컴퓨터가 만든 노래, 소설은 전문가들도 사람이 창작한 것이라고 판단할 정도이며 대화중 상대가 컴퓨터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생각한 이데아는 어디 있는가?

우리 뇌 어디엔가 있을 듯하다.

우리 뇌는 온몸에서 들어오는 감각정보들을 뉴런을 통해 +,-의 전기신호로 변환해 받아들인다. 그리고 “재해석”된 내용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맛보여 준다. 우리 눈은 자연계에는 없는 색깔이라는 환상을 보여주고 원시시대 선조들이 찾던 당분과 지방의 맛을 아직도 달콤하고 고소하다고 느끼게 만든다.

그리고 뇌는 우리 몸의 2%정도를 차지하지만 20%정도의 에너지를 소비하는 기관이다. 그리고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비상시에는 신체 각 부위에서 에너지를 끌어다 가장 우선적으로 소비한다. 그래서 뇌는 되도록 스트레스를 덜 받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심지어 뇌가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으면 생명을 끊어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려고 까지 한다. 심적 고통에 의한 자살이 바로 그 증거다.

이와 같은 두 가지 큰 특징이 우리 일상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는 여러 작은 문제들을 일으킨다.

첫 번째로 우리 뇌는 에너지와 저장용량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신체 각 기관들로부터 입력되는 정보를 다 저장하지 못한다. 그래서 핵심사항들 위주로 기억을 저장했다가 필요 할 때는 나머지 세부사항을 재구성해서 보여준다. 그래서 오래된 기억들이 오락가락하는 것이다. 그리고 외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재구성하지 못한다.

두 번째로 우리 뇌는 기억된 정보를 잘 꺼내기 위해 카테고리를 만들어 정보를 저장하는데 우리가 컴퓨터에 문서들을 주제별, 날짜별로 정리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사물을 패턴화 시키고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 혹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패턴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오류를 일으킨다. 이는 자연에서 생존 가능성을 높여줬으나 현대에는 편견과 성급한 일반화 오류를 통해 사회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세 번째로 우리 뇌는 선후 인과에 집착한다. 사물의 이동과 인과의 원리를 깨달은 우리 선조들이 짐승들을 몰고 덫을 놓고 해서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원리를 파악하고 인과 관계에 집착해 끝없이 연구에 매진했던 노력 때문이었다. 이는 현대의 과학자들과 추리소설 덕후들에게서 가장 극적으로 볼 수 있는 특성이다. 그러나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경우에도 과하게 집착하게 되면 뇌는 곧 스트레스를 받고 원하는 답을 만들어낸다. 기상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던 원시인들이 신이라는 허상을 만들어 답을 구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신은 전지전능하다. 우리가 모르는 모든 것에 답을 해야 하고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해냈어야 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 우리 뇌는 나쁜 것에 집중한다. 야생에서는 좋은 것 보다 나쁜 것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더 생존확률을 높인다. 어둠을 무서워해서 밤에 나다니지 않는 것이 용감하게 밤의 어둠에 맞서다 숨어있는 사자에게 죽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밤을 무서워하고 어둠을 사악한 기운의 근원지라고 생각한다. 이런 특징은 현대인들이 자기 처지를 비관하고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는 시각을 갖게 했다. 그래서 경제는 발전하지만 내 생활은 비루해 진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뇌는 상상하고 그 상상한 바를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의 힘은 막강하다. 우리는 귀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 본성은 어두운 곳을 두려워하라고 밀어대며 우리에게 구천을 떠도는 영혼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 줬다. 이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기만 하면 여럿이 찍은 졸업사진에서, 옷걸이에 걸린 흰색 원피스에서, 창문에 어른거리는 내 모습에서 귀신의 패턴을 해석해 보여주고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게 만든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신용화폐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이 신용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 이다. 하지만 그 허구를 모두가 믿음으로서 거대한 자본주의는 훌륭히 작동한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생각한 이데아는 어디쯤에 있을까? 이데아는 우리 뇌의 이 여러 가지 특성들이 유기적으로 작동한 결과다.

플라톤은 사물의 근본모델이 이데아에 있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 모사품 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사물의 이치를 자연스레 알아차리는 우리의 특성을 들었다. 우리는 그 생김새가 다양한 종의 개들을 보고 그것들이 모두 개의 한 종류인 것을 안다. 그리고 개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고양이를 개와 구분한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깨우치게 되는 일이다. 바로 그 이유가 이데아의 세계에 개와 고양이의 모델이 있고 우리는 그로 인해 그것들을 구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과학으로 들여다본 바에 의하면 우리가 개와 고양이를 구분하는 방법은 끝없는 반복학습에 의한 범주화다. 갓 태어난 아기들이 사물을 인식하고 언어를 배우면서 끝없이 하는 질문이 “이건 뭐야?”다. 아이는 방금 물어봤던 물건을 다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집요하게 “이건 뭐야?”하고 묻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개와 고양이의 차이점을 인식한다. 우리 뇌의 특징인 패턴화다. 현대의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은 이와 비슷한 과정을 통해 컴퓨터를 학습시켜 개와 고양이를 구분하는 AI를 만들었다. 컴퓨터가 개와 고양이를 구분하는데 이데아가 필요하지 않았듯이 우리도 필요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렇다면 선악의 개념은 어떻게 생기게 되었을까?

우리는 모세가 받아 왔다는 돌판에 혹은 죽으면 만난다는 염라대왕의 장부 같은 저세상 어딘가에 명확한 선악의 기준이 있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절대적인 선악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있다. 하지만 이 역시 플라톤에서 파생된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유래된 이데아론의 파생상품이다.

그 전에 먼저 좀 더 설명하기 쉽게 우리 몸에서 쾌락과 고통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알아보자.

우리 몸에서 쾌락은 선이요 고통은 악이다. 우리는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은 피하려한다. 고통은 악이라서 우리는 되도록 피하고 고통 없이 살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 답은 ‘죽는다’이다.(누구나 언젠가는 죽지만, 이 경우 비교적 빨리 죽는다.) 신체적 고통은 우리를 신체적 위협으로부터 되도록 빨리 벗어나도록 해준다. 칼에 찔렸을 때, 불에 데었을 때 우리는 출혈과 화상을 통한 사망에 대한 공포보다, 먼저 끔찍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을 움츠리거나 펄쩍뛰어 칼과 불로부터 달아난다. 만약 고통이 없다면 반응도 느릴 것이고 상처도 더 커져 곧 죽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쾌락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쾌락은 반대로 우리가 그것을 위해 노력하도록 만든다. 가장 큰 쾌락인 성욕과 식욕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고 자손을 번성시키는 가장 강력한 요인이다.

이처럼 고통은 사람을 뒤에서 쫓고 쾌락은 앞에서 끌며 생명을 유지하고 유전자를 퍼트리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고통과 쾌락도 신체의 자극을 전기신호로 받아 뇌에서 재구성해 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덕적 선과 악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는 선을 보면 기쁘고 악을 보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직접적인 육체적 고통이라기보다는 정신적 쾌락과 고통을 받는다. 이러한 정신적 쾌락과 고통은 우리 뇌에 긍정적, 부정적 작용을 일으킨다. 부정적 작용은 뇌의 부하량을 높여 스트레스가 되고 우리 뇌는 이를 회피하거나 원인이 되는 것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우리는 액션 영화의 악당을 때려 눕히고 잔인하게 죽이면서 통쾌함을 느낀다. 뇌에 스트레스를 주는 원인을 해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선한 사람들을 보면 뇌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어 기분 좋은 느낌이 든다. 이런 기분 좋은 느낌은 매우 강력해서 겁쟁이의 후손인 우리들이 죽음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 합당한 대가로 영웅이라는 찬사와 존경을 그에게 선물한다. 우리 겁쟁이들을 대신해 그가 용기를 보여 주었으니 당연한 대가이면서 앞으로 우리를 대신할 지도 모르는 영웅 후보자들을 양성하는 효과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선을 권하고 칭찬하며 강화시키고 악을 욕하고 징벌하여 약화시킨다.

그러나 문제는 선악의 기준이 각자 다르다는 것이다. 최초에 논의 했던 것처럼 선악은 문화마다 지역마다 시기마다 다르다. 이는 각 사회가 처한 환경이 달라 사회를 유지하고 번영시키는 전략이 달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양한 혼인제도의 형태를 예로 들 수 있다. 근래에는 일부일처제가 지배적이지만 여전히 일부다처제가 유지되는 곳들이 있다. 아랍의 일부다처제는 잦은 전쟁으로 미망인들이 많아지면서 생긴 구호 제도였으며 일본의 형사취수제는 전쟁이나 장사를 위해 멀리 떠났다가 죽은 형제를 대신해 그 가족들을 돌보기 위한 제도였다. 또 중국 고산지역의 일처다부제는 부족한 농경지를 보존하기 위해 산아를 제한하기 위한 제도였다.

그리고 같은 사회라도 입장차에서 오는 기준도 다르다. 마이클 센델 교수의 정의는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얘기한 선로위의 기차 딜레마는 무엇이 선인지 알 수 없어 이래저래 찜찜한 지경이다. 또 태풍 속에서 피난민들에게 폭리를 취하는 호텔주인들의 이야기는 충분히 화가 나지만 반대 입장이 납득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악의 종말’을 쓴 롤프 데긴은 ‘도덕의 원’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도덕의 원이란 편향적 도덕 판단이 미치는 범위라는 의미이다. 가령 가족은 가장 기본적인 도덕의 원이다. 부모는 자식이 살인범이라도 감싸고돈다. 명백한 사실입증이 되기 전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자식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거나 피해자가 원인제공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부모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할 수도 있지만 보통은 진짜 그렇게 믿는다. 이를 ‘인지부조화에서 오는 현실 왜곡’이라고 한다. 외부사실과 자기가 믿고자하는 바가 다를 때 우리 뇌는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자하는 대원칙에 따라 스트레스가 적은 쪽을 따른다. 부모는 자식이 끔찍한 살인자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피해자가 행실이 바르지 않았거나 자식을 꾀어 벌어진 일이라고 믿는 쪽이 훨씬 스트레스가 적기 때문에 그렇게 믿는다. 과학실험자나 사건수사를 하는 경찰이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들만을 믿으려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를 정치집단으로 확대하면 특정 정치인을 과도하게 지지하는 지지자들은 그 후보의 성추행 의혹이 일어나면 그 후보를 방어하고 피해자의 의도를 의심하거나 심지어 거대 배후를 상상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킨다. 이는 재판이 끝난 후에도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반대쪽 후보가 비슷한 일을 겪을 때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범행사실을 덮어놓고 믿는다. 우리가 얘기하는 음모론과 내로남불의 원인이다.

가장 극단적인 예가 종교집단이다. 애초에 절대적 믿음을 강요하며 강한 결속력으로 뭉친 집단이라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특히 그들은 교주의 악행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숨은 의미가 있거나 자신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사탄의 농간으로 받아들인다.

꼭 이렇게 편향적인 이념집단만 그런 것은 아니다. 마이클 센델 교수의 열차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우리가 선로 위를 달리는 기차의 기장이라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사고의 당사자로서 선로 위에 있는 세 명의 사람과 네 명의 사람을 대상으로 판단한다. 이때 나는 이미 열차를 타고 있는 사람들과 도덕의 원을 형성하고 선로 위의 사람들은 그 밖에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넷이 죽는 것 보다 셋이 죽는 게 낫지 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다리위에서 뚱뚱한 사람을 밀어 떨어뜨려 달리는 열차를 멈추려는 사고 실험에서 우리는 이미 열차 사고의 외부자로서 옆에 있는 뚱뚱한 사람과 도덕적 원이 묶여있고 열차를 타고 있는 사람은 그 원의 밖에 있다. 쉽게 얘기하면 뚱뚱한 사람과 비슷한 입장이고 동질감을 갖는 같은 편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우리는 훨씬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지만 뚱뚱한 사람을 밀어 떨어트리기를 주저한다.

태풍 속에서 피난처를 구하는 호텔 투숙객 얘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 사건의 외부자로서 심리적으로 다수가 해당되는 호텔 투숙객들에 공감하며 도덕적 원을 긋는다. 그리고 그들의 편을 든다. 반대로 미국 호텔경영 조합원들에게 물으면 그들은 호텔 주인의 편을 들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도덕적 판단의 범위인 도덕의 원을 긋는다. 이는 편가르기 와도 비슷하다. 그리고 이 도덕의 원이 좁으면 좁을수록 이기적이고 크면 클수록 이타적이다. 가장 극단적으로 작은 도덕의 원에서 사는 사람들이 바로 이기심의 끝판왕인 싸이코 패스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뇌의 일부가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해 타인의 기분을 공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철저히 본인의 욕구만을 충족하기 위해 움직인다. 도덕적 원이 오로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것이다. 반대로 가장 큰 원을 그리는 사람들은 나의 원수들 까지도 사랑하고 벌레 같은 미물까지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예수님, 부처님을 성인으로 모시는 것이다.

이런 분들은 원수가 나에게 해를 끼쳐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그분들에게는 죄도 없고 악도 없다. 본인을 부정하는 베드로와 배신한 유다를 용서하시며 역정 한번 내지 않는 예수님을 보면 과연 그렇지 않은가. 본인에게 화가 없고 스트레스가 없으니 어떤 잘못도 용서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러한 도덕적 원의 극대화는 칸트가 얘기한 일반입법이론과도 비슷하다. 칸트는 ‘네가 생각한 도덕규범이 법으로 만들어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지 되물어 보라’고 했다. 물론 우리 같은 세속적인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이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선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도덕의 원을 극대화 시키고자 한 것으로 생각해 보면 될 것 같다.

또 이런 도덕의 원에 대한 생각은 인간 개인의 생존욕구를 극복하고 사회적 공공성을 강화하고자 하는 본래의 선악의 역할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작은 원보다 큰 원이 더 선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는 공리주의와 비슷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도덕의 원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을까? 롤프 데겐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선사시대로 돌아가 상상해 보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야생에서 혼자서는 살아남기는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반드시 사회를 이루고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가끔은 자기 목숨을 버려서라도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 처했던 상황에서 그 사회란 자신을 보호해줄 사회 즉 내편이 되어줄 사회를 의미한다.

원시시대 어떤 부족원이 사냥을 하다가 숲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제일 먼저 과연 그들이 내 적인가 아닌가를 구분하는 것이 무척 중요했을 것이다. 같은 부족이라면 사냥을 같이하고 다른 부족이라면 우선 숨어야 했다. 그래야 생존확률이 높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피아식별과 부족 간의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통일된 머리장식, 얼굴화장, 복장들을 갖추었다. 아직 원시시대를 살고 있는 오지의 부족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유니폼, 국기, 학교이름이 들어간 후드 티, 머리에 질끈 맨 붉은 띠 등으로 우리에게 전수 되었다.

그래서 한일전 축구경기 때 울트라 닛폰 응원단의 맨 앞에서 커다란 욱일기를 흔들고 있는 일본의 응원단장은 우리에게 무조건 나쁜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그가 오랫동안 병든 노모를 모시고 일요일마다 지역 고아원을 찾아 봉사활동을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 뇌는 불편하다. 그 보다는 일본의 군국주의에 사로 잡혀 극우단체에서 테러를 조직하고 있을 것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 그렇게 믿는다.

우리는 사적인 그를 모른다. 그는 일본 국내적 범위의 도덕적 원에서 행동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인류라는 범위에서 그를 판단한다. 그래서 그는 일본이라는 국가 내에서 애국적이지만 인류라는 범위에서는 이웃나라를 침탈한 역사를 반성하지 않고 다시 그 역사의 재현을 꿈꾸는 악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악을 느끼고 분노하며 그 스트레스를 제거하기 위해 경기에 더 열심히 응원하고 선수들은 죽을힘을 다해 뛴다.

그런데 이러한 도덕의 원의 범위는 상황마다 사안마다 다르게 적용된다.

우리나라 안에서는 지역색을 가지고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다투지만 일본에 가서는 한국 사람으로 묶여 곧 우의를 다진다. 매일 싸우는 부부도 윗집 사람과 층간소음으로 다툴 때는 그야말로 한 몸이 되어 맞선다.

오래전 방송을 통해 소개된 사건이다. 큰아버지 집에 어려서부터 얹혀살던 여자 조카가 큰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피해자는 가해자를 고소했고 경찰조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런 와중에 피해자는 계속 그 집에서 살 수가 없어 집을 떠나 있었다. 기자는 그런 피해자를 인터뷰 하면서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인지 물었고 가족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아무도 피해자의 편이 되어 주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 자신을 무척 아껴주시던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다고 했다. 기자는 다른 가족들 몰래 할머니를 불러 피해자와 만나게 해 주었다. 하지만 오히려 만나지 않는 게 나았을 뻔 했다. “할머니는 네가 그렇게 큰아빠를 고소해서 지금 할아버지, 할머니 다 병원도 못 다니고 집안이 말이 아니다. 키워준 큰아빠를 고소하면 되겠냐.”고 했다. 피해자는 마지막으로 자기편이 되어 줄 거라 믿었던 할머니에게서 마저도 상처를 받았다.

가족에 대한 성폭력은 우리사회에 가장 악질적인 범죄이다. 이런 경우 가해자는 이론의 여지없이 악인이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과 달리 그 피해자의 가족, 특히 같은 여성인 엄마의 태도는 우리의 기대 이하이다. 많은 엄마들이 아버지에게 성폭행 당한 딸들의 행실을 원인으로 지적하고 원망을 돌린다. 그리고 죄 없는 남편을 풀어달라고 한다. 특히 경제력이 없는 엄마들이 그런 경향이 강하다.

이에 대해 심리학자들은 범죄의 원인을 약한 아이들에게 돌려 경제력이 있는 가장을 보호하려는 심리라고 한다. 쉽게 얘기해서 범죄는 이미 벌어진 일이고 약자인 아이들을 희생시켜 삼아 가정의 안정을 유지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가장이 구속되어 경제력이 손실되면 큰 일 아닌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딸을 희생시켜서라도 가정을 유지 시키고 싶어 하는 이런 엄마들은 평소 가족 모두를 포함하던 도덕의 원을 피해자인 딸을 제외한 자기 자신과 남편으로 축소시킨 것이다. 그리고는 그간 아무 문제 못 느끼던 딸의 사랑스러운 애교와 예쁜 옷차림을 ‘어쩐지 그런 방탕한 끼가 보이는 부정한 행실과 야시시한 옷차림’으로 생각하게 하고 그 환상을 스스로 믿는다. 가장 강한 이타적 성향이라고 하는 모성도 이렇게 약해질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뇌를 통제하지 못한다.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기 0.5초전 뇌에서는 먼저 그 생각을 만들어내는 영역이 활성화 된다. 우리가 자유의지를 갖지 못하는 원인이다. 우리의 뇌는 외부 자극으로부터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인다. 초기 조건과 프로세스 과정에 의해 결과 값이 나오는 컴퓨터 알고리즘과 같다. 그래서 잠을 자야겠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잠이 오지 않고 옛 애인을 생각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계속 생각나는 것이다.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려면 오히려 딴 생각을 하는 게 효과적이다. 그래서 우리의 도덕의 원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커졌다 작아졌다 한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이유를 좌뇌에서 끝없이 만들어낸다.

그런 뇌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움직인다. 스스로 스트레스를 덜 받는 쪽을 원한다. 그런데 그 스트레스를 받는 기준이 모두 다르다. 하드웨어의 알고리즘은 같은데 입력된 소프트웨어가 다른 것과 같다. 그래서 가치 기준이 제각각이다. 기본적으로 사회적 성향은 기본 세팅이 되어 있는데 지향점은 환경적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도 기독교 원리주의자도 모두 온 사회가 은혜로운 야훼의 말씀으로 가득하길 바라면서 목숨 걸고 폭탄을 터뜨리고 서로를 목매단다. 성스러운 전쟁에서 순교하는 영광을 느끼면서 말이다. 이렇게 되면 도덕적 원을 극대화 하더라도 선이라고 할 수 없다. 칸트가 두 극단주의자들에게 그들의 행동을 입법화 할 수 있는가 물어보라고 했을 때 두 극단주의자들은 분명 “당연하지!”라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의 행동을 외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자기객관화이다. 그 시선을 통해 내가 가진 도덕의 원의 확장을 꾀해야 한다.

관찰 예능 프로그램에 처음 출연한 출연자들은 자신의 평소 모습을 몹시 생소하게 느낀다. 평소 자신의 시선에선 늘 내가 제외 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보는 세상에 정작 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늘 나와 구분되는 어떤 것이고 나는 그 세상에서 별개다. 하지만 관찰 카메라를 통해 본 세상에는 내가 존재하고 세상의 일부로서의 내가 보인다. 그리고 모니터를 통해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내가 다시 구별된다. 이는 마치 다이어트를 하며 배가 고파서 냉장고 문을 자꾸 열어보는 나를 또 다른 내가 한심해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개선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이런 자아를 양심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또한 결국 자아의 다층적 분열이다. 그래서 사상의 균형을 잃어버린 사람은 양심의 소리마저도 편향적이다. 이는 마치 지구가 태양의 인력을 받아 직선으로 움직이지만 태양의 중력이 만든 시공간의 왜곡으로 인해 원을 그리며 태양 주위를 도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들은 양심에 한 점 부끄럼 없이 폭탄을 터뜨릴 수 있다.

그래서 선악은 결국 사람이 만든 신화이고 그 본질은 우리의 (이성적이 아닌)감정적 태도이다.

그래서 늘 내가 믿고 있는 것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의심해 봐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절대적인 선악은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회의론자가 되었다. 나에게 회의론은 “정말 맞아?”라고 끝없이 묻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진화되어 왔다.”라고 ‘자유의지, 그 환상의 진화’에서 프란츠 부케티즈는 이야기 했다. 그래서 우리의 사상은 늘 생존을 위해 변해왔다. 부족시대에 부족신을 만들어 사회를 단결시키고 왕권시대에는 신으로부터 내려온 왕족의 혈통에 관한 신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시민들이 왕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사회계약이라는 신화를 만들면서 그 전제 조건인 자유롭고 합리적인 인간이라는 신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그 신화를 믿는다. 그런데 이런 신화는 우리 머릿속에서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생존의 조건은 늘 바뀐다. 그리고 이러한 신화도 바뀔 조짐이 보인다.

그간의 사상들은 우리의 뇌를 들여다보지 못한 옛 스승들이 만들었다. 그런데 현대의 기술자들은 직접 들여다보며 인간의 생각을 연구한다. 그리고 그들이 인간의 뇌는 유기체로 만들어진 컴퓨터와 같다고 한다. 그래서 초기 조건과 소프트웨어에 의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결정된다고 한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인간다움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무너진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선악을 판단하고 결정지을 것인가?

여기에서 근본으로 돌아가 보자. 애초에 선악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 만든 신화이다. 그리고 그 범위가 크면 클수록 좋다. 모두 함께 잘 살 수만 있다면 그게 더 좋은 일 아닌가. 그러니 나와 너를 구분 짓지 말고 우리 모두를 도덕의 원 안에 넣어 이웃을 살피고 지구 안에 모든 생명들을 살피도록 노력하자. 편을 가르는 순간 우리 안에 악이 피어오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콜롬비아 태권도 교관 파견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