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화 신고 지구 한 바퀴
다음 날도 등반이 이어졌다. 마낭에서 토랑 픽 턱 밑까지 갔다.
가는 내내 날씨가 좋지 않았다. 구름이 안개가 되어 우리 일행을 감쌌다. 해는 볼 수 없었다. 구름 속에 산행이 말은 멋있는데 걷는 내내 죽을 맛이었다. 걷는 동안 춥지는 않았지만 잠깐 쉬는 동안 땀이 식으면서 한기가 들었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숨쉬기도 힘들어졌다. 그간 계속해서 훈련을 통해 고도에 적응했지만 지금은 20kg이 넘는 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한발 한발 계속 걸었다. 천리행군을 비롯해 수많은 훈련을 통해 깨달은 한 가지는 어쨌든 발을 떼야 끝난다는 것이다.
하시브와는 애초부터 따로 출발했다. 내 속도를 낼 수 있어 좋았다. 하시브가 걱정돼서 B.J. 교관을 하시브에게 붙여 줬다. 나는 다른 조와 함께 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자유로워진 나는 내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선두그룹에 끼었다.
가는 동안엔 안개 때문에 경치 구경도 못했다. 그저 앞사람 발뒤꿈치만 보며 걸었다. 그동안엔 경치 구경하느라 몰랐는데 오랜만에 행군하는 기분이 들었다.
저녁 무렵에야 목표지점에 도착했다. 거기서 200m 정도만 더 가면 만년설 지대가 나오고 바로 토랑 픽 능선이라고 했다.
도착하자 날씨가 더 나빠졌다. 눈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얼른 텐트를 쳐야 했다. 아직 하시브가 도착하지 않아서 혼자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눈발이 더 세지면서 펼쳐놓은 텐트 안으로 눈이 들이쳤다. 뿐만 아니라 만년설 지대 근처라 땅바닥도 눈 녹은 땅이었다. 최대한 젖은 땅을 긁어내고 방수포도 깔았다.
겨우겨우 텐트를 쳤는데 텐트 안에 눈비 녹은 물이 들이차서 한강이었다. 그물을 퍼내고 닦아 내는데 손이 너무 시렸다. 지급받은 방한장갑에 방수 기능이 없어서 장갑을 끼고 작업을 할 수도 없었다. 물을 퍼내기 위해 텐트 문을 열어 놓으면 다시 비가 들이쳤다. 그러니 느긋하게 손을 녹이며 할 수도 없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해서 고통을 참아 가며 언 손을 놀렸다.
그렇게 겨우겨우 마무리를 하고 얼어붙은 손을 좀 녹이겠다는 마음에 불이 있는 주방으로 갔다. 큰 행사용 텐트로 간이 주방을 만들고 거기서 불을 때고 있었다.
나는 양쪽 겨드랑이에 언 손을 끼운 채 불 앞으로 갔다. 그런데, 그 앞에 하시브가 있었다. 전부터 도착해서는 혼자서 텐트 치는 나를 도울 생각은 안 하고 불 앞에서 몸을 녹이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어찌나 화가 나는지 하시브에게 소리치고 말았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난 손이 얼어붙도록 혼자서 텐트 치고 있는데?”
“미안해, B.J. 가 텐트 다 쳤으니 걱정 말라고 해서.”
나를 보고 놀란 하시브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말했다.
“지금 텐트가 홍수가 났단 말이야. 난 그 물을 혼자서 퍼냈다고. 네가 여기서 불 쬐고 있는 동안.”
나는 보송보송한 하시브의 옷과 손발을 보고 또 너무 화가 나서 쏘아붙였다.
“정말 미안해, 몰랐어. 정말 미안해.”
그 큰 눈을 순진하게 뜨고 잘못을 시인하는 모습이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나는 화를 누르며 불 앞에 앉았다.
하시브는 내가 불편했는지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불을 쬐다가 다시 우리 텐트로 돌아왔다. 하시브가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하시브, 아까 화내서 미안해. 너도 힘들었을 텐데.”
화낸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서 나도 사과했다.
“괜찮아, 내가 미안하지 뭐. 너한테 짐만 되는 것 같네.”
우리는 서로 미안한 마음으로 좁은 텐트 안을 후끈 달구었다.
저녁 식사를 일찍 마치고 라비 소령이 내일 등반을 위해 공지사항을 교육했다. 안전 수칙과 필요한 장비, 등반 대형 등을 공지하고 잠깐 동안 예행연습도 했다.
교육이 끝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에 일찍 출발해야 하니 일찍 자야 했다.
다음 날 새벽 두 시에 일어났다. 해가 뜨기 전에 올라갔다가 아침나절에 내려와야 했다. 햇빛을 받아 눈이 녹으면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조별로 인원을 확인하고 전체 병력 백여 명이 대형을 갖추었다. 미국 레인저 출신 해쉬가 몸이 좋지 않다며 열외 했다. 해쉬는 전날 밤부터 고산병 증세를 호소했었다. 마지막 과정인데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웠다.
네팔 군 교육생들이 앞장을 섰고 우리 외국인 반 교육생들이 뒤에 섰다.
모두 머리에 헤드렌턴을 쓰고 방한복을 단단히 차려입고 조별로 인원들마다 로프를 연결해 추락과 이탈을 방지했다.
출발하고 30분 만에 만년설 지역에 도착했다. 우리는 들고 있던 크렘폰을 스노우 부츠에 착용하고 본격적으로 설상 등반을 시작했다.
이동 경로에는 선발대 교관들이 전날 설치해놓은 고정 로프들이 있었다. 그룹을 나누어 각 그룹마다 정해진 고정 로프에 확보 줄을 걸고 등반해야 했다.
시작부터 경사가 상당했다. 45도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네 걸음 오르고 20초 쉬고 또 네 걸음 걷고 20초 쉬고 하기를 반복했다. 많은 인원들이 한 줄로 서서 이동하다 보니 속도가 나지 않는 건 이해됐지만 그래도 너무 느린 것 같았다.
“이거 너무 속도가 안나는 걸? 맨 앞에 선두를 너무 약한 사람한테 맡긴 것 아냐?”
나는 약간 볼멘소리로 B.J. 에게 물었다.
“아냐. 맨 앞엔 선등 교관이 서있어. 속도를 내면 고산병 증세가 올 수 있어서 천천히 가는 거야.”
나는 아직 내가 한 번도 고산병 증세를 겪어보지 않아 몰랐지만 교관들은 혹시 모를 경우에도 대비하는 것 같았다.
급경사는 끝없이 이어졌다. 크렘폰을 신었지만 눈은 종아리까지 발을 파묻었다. 다행히 앞사람 발자국을 따라 걸어서 힘은 덜 들었다.
어제보다 날씨는 좋은 것 같았다. 눈비도 없었고 안개도 없었다. 하지만 새벽이라 주변이 보이지는 않았다. 헤드렌턴 불빛이 닿는 곳 까지는 보였지만 그마저도 그냥 눈뿐이었다.
세 시간 내내 같은 경사의 같은 눈밭을 걸었다. 마치 같은 곳을 계속 걷는 느낌이었다. 한국 같았으면 귀신에라도 홀린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다 겨우 급경사가 끝나고 완만한 지대가 나왔다. 마침 여명이 밝으며 해도 나왔다.
우리는 모두 서서 해가 나오는 걸 지켜봤다. 해가 뜨는 쪽에 구름이 많아 ‘말갛게 솟는 해’를 볼 수는 없었지만 ‘어둠을 살라 먹는’ 여명이 점점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그 속에서 산들이 깨어나는 장관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해가 뜬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도 시간이 없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완경사 지역을 벗어나니 다시 한번 급경사가 나왔다. 그런데 그 끝이 보이는 경사였다. 저기만 오르면 정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 손에 잡힐 것 같은 정상이 어찌나 멀던지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않았다.
특전사 3대 거짓말 중 하나가 ‘다 왔어’다. 천리행군 중 처지는 후임들을 위해 선임들이 ‘다 왔어, 조금만 힘내’라고 하지만 사실 그때는 반 정도 왔을 때이다.
지금이 그랬다. 다 왔는데 다 오지 않았다.
하지만 걷다 보면 언젠가는 끝난다. 결국 마지막 경사도 끝나고 정상에 도달했다.
모두들 환호했다. 마침 해도 밝게 떠서 주변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다행히 정상 부분이 완만하면서도 넓었다. 모든 교육생들이 한 번에 정상에 머물 수 있을 정도였다.
교육생들 모두 사진 찍기에 바빴다. 단체로 찍고, 그룹으로 찍고, 조별로 찍고 혼자서도 찍었다. 나는 그런 동료들을 찍었다.
사실 나는 내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사진 속에 내 모습이 마음에 드는 경우가 별로 없고 나중에 사진을 보면 내가 봤던 그 풍경을 다시 보고 싶지 풍경 속에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내가 거기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단군할아버지 때 내린 눈이 쌓여 있을지도 모르는 곳. 산 아래에서 신령스러운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이렇게 그 위에 서게 되니 왜 그토록 산에 오르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특히 왜 정복이라는 단어를 쓰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가 오르던 상관없이 산은 그저 무심히 서 있을 뿐인데 말이다.
크고 신령스러운 산을 사람은 어쩌지 못한다. 작은 산들이야 깎고 헤칠 수 있지만 머리에 흰 눈을 올리고 있는 이 정도의 산은 옮기지도, 깎아 내지도, 불을 내지도 못한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는 것뿐이다. 인간들은 수억 년의 세월 동안 대 자연이 만들어낸 그 큰 산의 중압감 앞에서 그저 오르기만 해 놓고는 ‘정복했다’ 함으로써 열등감을 씻고 싶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인생에 다시 못 올 이렇게 경이로운 순간에 나에게도 고산병 증세가 찾아왔다. 즐겁고 기쁜 마음을 더 크게 즐기고 싶은데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아팠다.
죠가 쿠크리 럼주 작은 병을 동료들에게 돌렸다. 술이라면 마다하지 않는 나였지만 몸도 좋지 않고 내려가는 길이 걱정돼서 사양해야 했다.
우리 반도 다 같이 단체사진을 찍고는 하산을 시작했다.
그런데 올라올 때는 서로 로프도 묶고 안전에 유의해서 올라오더니 내려갈 때는 각자였다. 출발은 함께 했지만 서로 간의 속도 차로 금방 다들 흩어지게 되었다.
경사가 워낙 심하다 보니 내려가는 길을 걸어 내려가는 것보다는 미끄럼 타고 내려가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올라올 때 우리를 그렇게 고생시키던 경사가 이제는 급 하강 미끄럼을 타는 재미를 선물해 주었다.
특히 미 해병대 교관들은 아주 신이 났다. 그들이 입은 방한복이 무척 기능성이 좋은 고어텍스 재질의 옷이었는데 눈이 묻지도 않고 아주 잘 미끌어 졌다. 비료 포대가 부럽지 않았다. 로저와 데이브는 그렇게 눈을 타고 아래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나도 그 뒤를 따라 미끄럼을 타고 내려갔다. 다행히 쌓인 눈이 젖은 눈이 아니라서 옷이 젖지는 않았다. 하시브도 처음엔 잘 따라오더니 곧 헤어지게 됐다.
그렇게 내려오던 길에 만년설의 속살을 보게 되었다. 누군가 고정로프를 설치하느라 말뚝을 박아 놓았던 구멍이 그대로 남아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만년설의 겉은 하얗지만 쌓은 그 속살은 푸른 하늘빛이었다. 그런데 그 푸른빛이 하늘을 닮았다. 눈이 원래 하늘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서 하늘의 빛깔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과학자들은 빛이 반사가 되고 산란이 돼서 이렇고 저렇고 하는 설명을 하겠지만 그런 설명은 이렇게 신비로운 빛깔을 설명하는 데는 전혀 효과적이지 않을 것 같았다.
밤새 걸어서 올라갔던 길을 한 시간 만에 내려왔다.
텐트를 쳤던 캠프에 도착해서 짐을 챙겼다. 여기서 바로 묵티나트까지 또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라비 소령이 준비되는 데로 바로 출발하란다.
보통 한국에서는 이렇게 단체로 움직이면 중간중간 인원과 장비 점검이 필수다. 어느 구간에서 혼자 다니다 사고가 나거나 조난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각자 개인행동을 해도 되나 싶었다. 물론 다들 군 경험이 있고 나이 꽉 찬 성인들이며 연락 가능한 휴대전화가 있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알아서 조치하겠지만, 한국식 사고에 익숙한 나는 이래도 되나 싶기만 했다.
어쨌든 나도 내 짐을 챙기고 출발했다. 텐트는 지원 팀들이 벌써 뜯어서 철수해버렸다.
그런데 복귀하는 길도 만만치는 않았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힘든 등반을 끝내고 곧장 이틀 동안 올라온 길을 내려가자니 피로가 몰려오고 무릎이 후들거렸다. 아침부터 끼니도 제대로 못 챙긴 상태였다.
나는 안 되겠다 싶어 길옆에 배낭을 내려놓고 비상식량으로 가지고 다니던 참치 캔과 비스킷, 팩에 담긴 주스를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꼭꼭 씹어 먹었다. 정상에서 느꼈던 고산병 증세는 온 데 간 데 없었지만 기운 보충이 필요했다.
비상식량을 먹고도 한참을 앉아서 쉬었다. 그렇게 앉아 있는 동안 내 뒤에 출발한 친구들이 지나갔다. 네팔 군 교육생들도 지나갔다. 우리 산악전 과정이 아닌 네팔 코만도 과정 교육생들도 목에 소총을 걸고 단독군장을 한 채 뛰어서 지나갔다. 그리고 반가운 사람들 그렇게 만나보고 싶었던 구르카 용병 부대원들도 한 무리 뛰어서 지나갔다. 완전군장 상태였는데 잘 뛰었다. 길도 험하고 내리막길이었는데 무릎이 괜찮은지 걱정됐다. 이 길목이 각 종 부대들 훈련장으로 애용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보내고 나도 기운을 차려 다시 내려왔다.
오후 네 시 어간이 되어서야 다시 묵티나트 캠프에 도착했다.
그런데 우리 텐트를 치던 곳에 교육생들 텐트가 없었다. 본부와 주방 텐트만 쳐져 있었다.
나는 내가 제일 일찍 온 줄 알고 또 혼자 텐트를 쳤다.
그런데 텐트를 다 쳐갈 무렵 매튜가 오더니 뭐하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뭐하긴 텐트 쳐야 자지.”
“오늘부로 교육과정이 다 끝나서 교관들이 옆에 호텔 가서 자도 된대. 그래서 다들 호텔에 방 잡았어.”
매튜는 상황을 설명해주며 캠프 사이트 옆에 호텔에 다들 모여 있다고 말해 주었다.
아니 교육이 수료식을 해야 끝나는 거지 프로그램만 끝났다고 끝나는 건가? 하고 생각하면서도 얼른 일어나 호텔로 짐을 옮겼다.
거기에는 벌써 교관들과 교육생들이 모여 맥주 한잔씩을 마시고 있었다. 서로 아침에 찍은 사진들을 보고 보여주며 이메일로 교환하고 노트북에 저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 보고도 찍은 사진들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내 디지털카메라와 휴대전화에 저장된 사진들을 보여 줬더니 모두들 너무 좋아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다른 사람들이나 풍경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동료들이 훈련하고 노는 모습들을 찍어 놨는데 너무 자연스럽고 표정이 살아 있었다. 그래서 다들 내 사진 파일들을 저장하느라 줄을 섰다.
나는 휴대전화와 카메라를 동료들에게 던져 주고 호텔 방을 얻으러 갔다. 그런데 깜짝 놀랐다. 방 가격이 너무 쌌다. 우리 돈으로 300원 정도였다. 내가 잘못 안게 아니다. 정말 300원 정도였다. 비수기라서 그렇단다. 하긴 여기저기 방들이 많이 남아 있긴 했다. 방을 싸게 내놓은 대신 호텔에서 운영하는 식당과 펍에서 수익을 내는 것 같았다. 특히 우리 같은 단체 남자 손님들이 많이 먹고 마시고 할 테니 우선은 붙잡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렇게 초특가 방을 얻어서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먼저 도착한 친구들은 벌써 음식을 시켜서 먹고 있었다. 나도 야크 스테이크와 맥주 한 병을 시켰다. 저녁을 다 먹고는 동료들의 추천으로 사과파이를 시켰다. 그런데 이건 맛있어도 너무 맛있었다. 도저히 이 지역 사과로는 나올 수 없는 맛이어서 더 놀라웠다. 지금도 제과점에서 사과파이를 보면 그때 그 사과파이가 생각난다. 이 사과파이를 먹으러 묵티나트에 다시 갈까도 생각했을 정도다.
음식도 맛있고 분위기도 좋았다. 다들 고생했던 훈련 뒷얘기들을 하며 웃음꽃이 피었다.
평소 재미있게 말을 잘하는 해쉬가 교관들 흉내를 냈다. 또 하시브가 절벽에 매달려서 겁먹었을 때 표정도 흉내 냈다. 별로 비슷하지는 않았지만 워낙 익살스럽게 표정을 지어서 모두 박장대소했다. 같이 듣던 하시브도 크게 웃으며 좋아했다. 하지만 본인은 마지막 토랑 픽 등반까지 다 마쳤다며 그렇지 못한 해쉬에게 한방 먹였다.
서로 짓궂게 굴었지만 이제 내일 모래면 다들 헤어질 것이 아쉬웠다.
늦은 밤까지 그렇게 이야기하고 웃고 떠들다가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짐을 꾸려서 좀솜으로 출발했다. 이번 복귀하는 길에도 선택권이 주어졌다. 차량으로 복귀하든가 걸어서 가든가.
나는 저번에 걸어봤던 길이라 차로 복귀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웬일로 대부분의 교육생들이 걸어서 가겠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3일 전에 인근 다른 지역에서 미니버스가 추락해 승객 전원이 사망한 사고가 있었단다. 나는 그간 오고 가면서 그런 사고가 충분히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다지 충격적이지는 않았는데 다른 동료들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처음으로 위험과 모험을 구분해서 안전하게 걸어가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와 하시브만 묵티나트와 좀솜을 잇는 구간 지프를 이용해서 복귀하게 되었다.
하시브와 나는 산악전 학교에서 섭외해 놓은 7인승 지프에 올라탔다. 거기에는 우리 외에도 다른 부대원들과 주민 한 명이 더 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운전기사들이 운전석에 탔다. 그렇다 운전기사가 아니고 ‘운전기사들’이었다.
운전석에 두 명의 운전기사가 앉았다. 그것도 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어린 남자 둘이었다. 나이가 어려 보여 과연 운전면허가 있을까 싶었다. 아니 운전면허가 있더라도 1인용 운전석에 두 명이 앉는다는 걸 상상도 못 해 봤는데 지금 그런 일이 내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나 외에는 차에 탄 사람들이 다들 태연해 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차는 태연히 출발했다.
운행을 하는 내내 나는 두 운전기사가 하는 양을 뒤에서 유심히 보았다. 여차하면 뛰어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가끔 급커브에 낭떠러지 길이 나올 때면 내 심장은 콩알만 해 졌다. 노면도 좋았고 길도 넓었지만 두 명의 운전수들이 혹시 실수는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보아하니 지금 운전대를 잡은 주 운전수는 부사수이고 그 옆에 포개 앉아 가끔 기어를 바꾸어 주는 운전수가 사수인 것 같았다. 사수가 커브를 돌 때, 맞은편에서 차가 올 때 같은 주요 국면에 잔소리를 하고 호통을 쳐댔다.
이렇게 위험천만한 드라이브를 무사히 마치고 좀솜에 도착했을 때 동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 시간 때문에 우리가 늦게 출발해서 걸어간 동료들이 더 빨리 도착한 것이었다.
그리고 네팔 군 교육생들을 포함한 모든 교육생들이 함께 학교 정문을 통과해 들어갔다. 학교 정문에는 학교장님이 우리를 마중 나와 환영해 주셨다. 특히 각 개인마다 이마에 축하와 정화의 의미로 붉은 물감을 찍어 주셨다.
전 교육생들이 연병장에 모여 간단히 훈련 종료 보고를 마치고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저녁에는 다시 훈련 종료 축하 파티가 열렸다. 학교장님과 각 교관들, 외국인반 학생들이 모였다. 다들 친해져서 첫 환영 파티 때보다는 더 분위기가 좋았다. 농담도 하고 술도 마셨다.
이제 며칠 후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니 시원섭섭했다.
다음날 오전에 수료식을 했다.
학교장님의 축하 말씀과 학생대표 하시브 소령의 답사가 있었고 각 개인마다 상장을 하나씩 수여했다. 나는 레펠 최우수상을 받았다. 인사고과에 반영되지는 않지만 인생에 소중한 기념이 될 상이 었다. 내가 받고 싶었던 암벽등반 최우수상은 로저가 받았다.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최우수 학생 상은 죠가 받았다. 이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죠는 늘 웃으며 과정 전체를 즐기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각 과목의 실력이 처음보다 나중에 훨씬 나아졌다.
수료식이 끝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공식적으로 모든 교육과정이 종료되었다.
그런데 교육이 종료되고 다음날 떠나기로 돼있던 우리는 나흘을 더 좀솜에 머물러야 했다. 기상이 좋지 않아 우리를 태우고 카트만두로 가야 할 비행기가 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산악전 학교 옆 높은 암벽에는 부서진 경비행기 한 대가 놓여있었다. 몇 년 전 나쁜 기상 여건에도 불구하고 이륙했다가 암벽을 피하지 못하고 벽에 충돌한 것이었다. 물론 승객 전원이 사망했단다. 그 사고의 잔해로 남은 경비행기는 좀솜을 다녀가는 모든 손님들에게 강한 경각심을 일으켜 줬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나흘 동안 마음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잘 쉬었다. 비가 오는 중에도 닐기리 산과 좀솜의 풍경을 눈에 가득 담았다. 동료들은 그때도 쉬지 않고 '쉿 헤드'를 외쳐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