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화 신고 지구 한 바퀴
드디어 훈련의 마지막 과목인 고고도 등반 훈련이 시작되었다. 훈련은 간단했다. 그냥 올라가는 거다. 다만 고산병 증세를 극복하기 위해 천천히 단계적으로 올라가는 게 관건이었다.
보통 고산 등반을 위해서는 하루에 고도를 300m 이상 높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8000m 급 산을 오르려면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좀솜과 케상을 오가며 충분히 고도 적응 훈련을 마쳤고 아주 높은 고도에 오르는 것은 아니었기에 단기간 내에 끝낼 수 있었다.
최후의 목표는 5,416m의 토랑 픽이었다. 고도는 그리 높지 않지만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토랑 픽은 민간 등반객들을 위한 트래킹 및 등반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다. 그래서 난이도로 따지자면 고고도 등반의 입문 단계 정도 되는 산이다.
우리는 첫날 좀솜에서 묵티나트라는 곳으로 이동했다. 학교 측에서 묵티나트까지 걸어서 갈 것인지 차로 이동할 것인지 선택해도 좋다고 했다. 보통 훈련에서는 무조건 단체 행동이 원칙인 한국보다 유연한 태도였다. 우리 외국인반 교육생들 중 나와 죠 만 걸어서 가겠다고 했고 나머지는 차로 이동하게 됐다.
출발하는 날 짐은 본대가 이동하는 차편에 실어 보내고 나와 죠, 우리를 인솔할 교관 B.J. 는 최대한 가벼운 복장으로 출발했다.
상쾌한 아침 바람을 맞으며 단출하게 떠난 트래킹은 무척 기분 좋았다. 무장 뜀걸음을 하거나 동료들과 산책을 하며 걸었던 동네 길을 벗어나자 인적이 드문 황량한 산길이 나왔다. 숲으로 이어지던 케상 가는 길과는 반대쪽이었는데, 이 방면으로 숲이라고는 없는 모양이었다.
산길이라고 해서 우리나라처럼 우거진 숲 사이로 난 산길은 전혀 아니었다. 풀도 나무도 없는 언덕 위에 차와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비포장도로가 나 있었다. 분명 비가 오면 유실되거나 산사태로 흙더미가 밀려와 막힐게 뻔한 그런 길이었다.
태양은 또 얼마나 작열하는지 그늘 한 점 없이 걷는 내내 그 햇빛을 받아야 했다. 자외선 차단제도 단단히 바르고 모자도 썼다. 그나마 선선한 고산지대 바람이 열기를 식혀 주어 다행이었다.
좀 가다 보니 큰 길가 외딴곳에 집을 짓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동안 서서 집 짓는 모습을 구경했다. 집 짓는 자재라고 해야 산에서 배어온 듯한 마르지 않은 통나무 목재와 주변에서 주워온 바위들, 시멘트가 전부였다. 목재로 문설주와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돌을 쌓고 시멘트를 발라 벽을 세우는 모양이었다. 단열재라던가 방수포 같은 것은 없었다. 나중에 공사가 진행되면 더 가져다 보충할지도 모르지만 부부의 살림이 그렇게 넉넉해 보이지는 않았다. 엄마 아빠가 집을 짓는 동안 두 명의 아이는 쌓아둔 목재 위에서 놀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다섯 살 정도의 오빠와 세 살 정도의 여동생 같아 보였다. 사진을 한 장 찍는데 세상 천진한 표정이었다.
한참을 더 가다가 마을 한 곳을 지나면서 가정집에서 운영하는 카페에 들러 점심도 먹을 겸 쉬었다.
나는 간단하게 오렌지 주스와 야크 버거를 시켰고 B.J. 와 죠는 맥주와 버거를 시켰다. 맥주는 네팔 지역 맥주인 구르카였다. ‘구르카 용병’할 때 그 구르카다. 하지만 영어로 표기할 땐 ‘GORKHA’로 쓴다.
카페 주인이자 이 집은 안주인인 듯한 아주머니가 음식들을 내 오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물었고 B.J. 가 답했다. 아마 우리의 정체에 대해 묻는 눈치였다. 우리 모두 사복을 입고 있어서 군인인 줄은 모르고 관광객인 줄 알았을 텐데 B.J. 가 설명했을 것이다.
음식을 먹으며 집 정원을 구경하는데 마당에 신기한 물건이 하나 있었다. 위성 안테나 같은 넓은 은박 철판으로 태양열을 모아 물을 끓이거나 음식을 조리할 수 있는 기구였다. 사실 산악전 학교 마당에서도 봤던 물건이었는데 정확히 어떻게 쓰는지 몰랐었다가 이번에 제대로 보게 되었다.
태양이 워낙 강하게 내리쬐니 그 공짜로 쏟아지는 햇빛을 이용하기 위해 집집마다 하나씩 있는 모양이었다.
그 생긴 모습이 조악하고 아무리 햇빛이 세기로서니 물을 끓일 정도 일까 했는데 올려진 주전자를 만져보니 물이 충분히 끓을 만했다.
마당엔 꽃나무가 많이 있었다. 여기저기 핀 꽃들을 보며 죠가 자기네 집에도 꽃나무가 많다고 했다. 어머니가 꽃을 너무 좋아하셔서 여러 종류의 꽃나무를 직접 가꾸신다고 했다. 미국 켄터키 시골이 고향인 죠가 집 정원과 농장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나는 아주 어렸을 적 초등학교 다닐 때 이후로 아파트에서만 살아서 마당 있는 집에서 살아 본 적이 없었다. 마당이 있을 때도 주인집 마당이었지 새들어 살던 우리 집 마당은 아니었으니 한 번도 마당 있는 집에서 살아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이런 목가적 분위기에서 미국 켄터키 시골집 이야기를 듣자니 미국 시대극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며 기분이 좋았다.
시원한 바람과 멋진 풍경, 좋은 친구들이 있으니 기분이 좋은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카페를 나와 동네에 들어서자 귀여운 ‘레고 소’ 송아지들이 몇몇은 풀을 뜯고 몇몇은 해를 피해 벤치 아래 누워있었다. 조그마한 소들의 오밀조밀한 얼굴이 오는 길에 본 꼬맹이들의 표정과 닮았다. 좀 더 동네를 가로질러 나가자 금방 동내 길이 끝나고 다시 벌판으로 이어졌다. 정말 작은 동네였다.
벌판에는 동네 사람들이 일하는 곳인 듯 잘 정리된 밭들이 펼쳐져 있었다. 마침 이름은 알 수 없는 붉은빛의 꽃들이 온 밭마다 만발해서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려 붉은 강이 흐르는 듯했다. 그 붉은 강은 파란 하늘과 회갈색 산에 대비되어 더 붉어 보였다.
묵티나트로 가는 내내 우리를 따라온 산줄기들과 협곡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목적지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베이스캠프 옆 경찰 체크 포인트에 들러 B.J. 가 우리 신분을 밝히고 통 행장에 등록했다.
우리는 네팔 군의 인솔을 받아 무료로 통과했지만 일반 관광객들은 패스 통행료를 내야 한다고 했다. 이 지역이 안나푸르나 트래킹 패스라서 우리로 치면 국립공원 입장료를 내는 셈인데 그 금액이 만만치 않았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B.J. 말로는 1인당 800달러 정도라고 했다.
히말라야 외에는 변변한 수입이 없어 입장료를 비싸게 책정해야 하는 네팔 정부와 그래도 오겠다는 관광객들의 욕구가 맞아떨어지는 가격인가 싶었다.
그런데 맙소사 아직 본대가 도착하지 않았다. 차량이 준비되는 시간이 있어 우리보다 늦게 출발한다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늦을 줄이야. 우리는 다시 베이스캠프 바로 옆 호텔의 카페에 앉아 본대를 기다리기로 했다.
음료를 주문해서 앉아 기다리고 있는데 길가에서 어떤 남자가 닭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먹기 위한 것이 아니고 닭의 목을 칼로 끊어 피를 내서는 주차된 트랙터 주변에 뿌리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새로 장만한 트랙터에 고사를 지내는 모양이었다. 닭 피를 신성히 여겨 귀신을 쫓는다고 믿는 것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여기서도 그 효험을 믿는 모양이었다. 전 재산 일지 모를 큰 트랙터를 사고 없이 타고 또 돈도 많이 벌게 해달라고 빌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그 남자의 신성한 의식을 보며 기다리다 보니 우리 본대가 도착했다.
우리는 곧바로 본대와 합류해서 호텔 바로 앞 캠핑장에 텐트를 쳤다.
텐트를 치고 배수로도 파고 숙영지를 구축했다. 다들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라 30분도 안 걸린 것 같았다.
그런데 화장실이 문제였다. 관광객들도 사용하는 캠핑장이라 한쪽 구석에 재래식 화장실이 세 칸 있었는데, 맙소사! 평생 이렇게 더러운 화장실은 본 적이 없었다. 똥이 넘쳐 안에서는 제대로 볼일을 볼 수 없었는지 조금씩 조준을 빗겨 싸질러놓은 똥들이 점점 밖으로 밀려 나와 화장실 앞쪽까지 똥 밭이었다.
하룻밤만 지내면 되니 그냥 참기로 했다.
숙영지를 편성하고 주변지역으로 고도 적응을 위한 트래킹을 나섰다. 뒷산 약수터 산책 정도의 강도로 걸어갔다 왔다.
고산병은 체력과 상관없이 오는 것이고 적응만이 유일한 해결 방법이라 절대 무리해서는 안 된다. 천천히 느긋하게 몸이 적응하도록 시간을 주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날 걸어서 이동한 죠와 나는 이미 적응이 돼 있는 상태였다.
간단한 트래킹을 마치고 저녁을 먹고 또 모닥불 주변에 모여 앉았다. 이번엔 주방에 있던 불붙은 가지를 들고 와서 수월하게 불을 만들었다.
비록 바비큐는 없었지만 따뜻하게 끓인 차를 마시며 오늘 걸어온 이야기를 해주었다. 특히 죠가 흥분해서 이야기를 풀었고 나는 맞장구만 쳤다.
그러다가 더그가 ‘카이니’라고 부르는 입담배를 돌렸다. 입담배는 불을 붙여 피우는 궐련담배와 다르게 생잎을 뭉개 놓은 듯한 담배를 아랫입술과 아랫잇몸 사이에 끼워 넣어 니코틴이 체내로 흡수되도록 해서 즐긴다. 그래서 필터가 없어 독하기도 하고 입에 침이 많이 고여 계속해서 침을 뱉어야 하는 부작용이 있다. 자기네 나라에서는 구하기 힘들기도 하고 네팔의 입담배가 워낙 싸기도 해서 죠와 더그, 톰, 해쉬 네 친구들은 서부의 사나이들처럼 여기저기 침을 뱉으며 매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데 그날은 나에게도 권하는 것이었다. 나는 일반 담배도 피우지 않는 금연가이지만 새로운 경험이다 싶어 한번만 해보겠다고 하고 받아 들었다. 죠가 자기 손바닥에 뿌려 놓은 담배를 내가 오른손 엄지와 집게손가락 끝으로 집어 죠가 하는 대로 따라서 아랫입술 안으로 넣었다. 처음엔 별 느낌도 없고 향도 없더니 갑자기 하늘이 핑 돌고 어지러워졌다. 도대체 몸을 가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모두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런 비웃음에 대응할 정신도 없어서 담배는 뱉어 버리고 그대로 텐트로 가서 쓰러져 잤다.
아침을 일찍 먹고 또 길을 나섰다. 이번엔 전 인원 도보 행군이었다. 드디어 고고도 등반 훈련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우리 캠프를 출발해 뒷길로 나오자마자 불교 사찰이 하나 있었다. 사찰을 빗겨 돌아가지 않고 내부를 통해 지나갔다. 기독교인인 죠도 무슬림인 모하마드와 하시브도 관심 있게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불당에 모셔진 부처님의 모습이 우리나라와 달랐다. 우리나라 부처님이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이라면 이곳 부처님은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좀 더 매서웠다. 아마 부처님의 실제 모습은 이곳 불상의 모습과 더 닮았을 것 같다. 네팔 출신이시니 말이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불상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이 반영되다 보니 우리나라 사람 인상을 닮았을 것이다. 아프리카에는 흑인 예수님상이 있고 남미에는 인디오 예수님 그림도 있다고 하니 말이다.
그렇게 불전에 불상을 구경하는데 염불을 드리는 스님의 모습도 이채로웠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는 오간데 없이 긴 곱슬머리가 밥 말리 같고 누더기 승복을 걸친 것이 산중에서 아주 오랫동안 기거하신 분 같았다.
그리고 초파일 조계사 연등처럼 오색의 깃발들이 줄에 엮여 온 지붕과 마당의 하늘을 거미줄처럼 얽고 뒷산 줄기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 오색 깃발들만 보면 절보다는 만신 당골 내나 성황당 같은 느낌이 들었다. 1-파-8 산을 덮은 오색 깃발
사찰을 지나자 곧바로 묵티나트 외곽이었다. 가는 길도 본격적인 산길이 이어졌다. 비록 나무 한 그루 없는 길이었지만 경사가 심했다. 산을 곧장 오르기 힘든 길이라 지그재그로 비탈을 깎아 길을 냈다. 사람뿐만 아니라 노새, 당나귀, 오토바이, 지프들도 다니는 길이라 널찍했다. 하지만 배수로, 낙석 방지망 같은 보조 설비가 전혀 없었다. 비가 오면 금방이라도 흙과 바위가 쓸려 내려와 끊길 것 같은 허술한 길이었다.
처음에 모두 함께 출발한 우리 반은 어느새 조별로 흩어져 있었다. 등반 속도가 다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역시나 하시브 때문에 우리 조가 제일 늦었다. 성격 급한 한국사람 눈치를 보느라고 하시브도 나름 열심히 걷고 있었지만 해수면 고도의 방글라데시에서 등산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사람한테 핀잔을 주기도 뭐해서 그냥 걷기만 했다.
그런데 내 표정이 좋지 않았나 보다. 하시브가 먼저 한마디 꺼냈다.
“캡틴 박. 난 괜찮으니까 먼저 가도 돼.”
“아냐. 바쁜 일도 없는데 뭐. 천천히 가자.”
내가 대답했다.
그냥 여기서 끝났으면 괜찮았을 텐데 하시브가 한마디 더 해서 내 속을 긁었다.
“지금 나는 고양이 같지만, 이제 곧 다시 호랑이가 될 거야.”
우리 반 교육생들은 다들 각 나라에서 선발되어 온 사람들이었다. 이 과정은 단련을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단련된 사람들이 새로운 기술을 배우러 오는 과정이었다. 그것도 코만도 소속 소령이 겨우 등산하고 있는 와중에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좀 모진 소리를 좀 했다.
“하시브, 넌 이미 10년 넘게 군에서 생활했고 코만도 훈련도 받았어. 그런데 이제 호랑이가 될 거라니. 넌 호랑이가 이미 됐었어야지. 넌 방글라데시 대표야. 여긴 각 국가별 자존심을 걸고 경쟁하는 곳이라고.”
나의 예상치 못한 매몰찬 소리에 하시브가 놀랐는지 뭐라고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다 입을 닫았다.
한동안 분위기가 서먹했다. B.J. 도 우리 눈치를 보며 말없이 걷기만 했다.
그러다 다행히 쉴 곳이 나왔다. 산 중턱, 이런 곳에 사람이 살까 싶은 곳에 로지가 하나 있었다. 우리를 앞서간 다른 친구들도 이미 도착해서 쉬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가 너무 늦어지자 간격을 줄이기 위해 기다려 준 것 같았다.
우리도 테이블 하나에 자리를 잡고 각자 음료를 하나 시켰다.
다행히 하시브와 서먹했던 분위기도 대화를 하며 자연스레 풀렸다.
로지에는 우리 이외에도 유럽인 가족이 있었다.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부부와 여섯 살, 일곱 살 정도 돼 보이는 아들 딸, 4인 가족이었다. 모처럼 휴가로 가족 여행을 온 오스트리아 사람들이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오스트리아나 우리나라처럼 산이 많은 나라 사람들이 등산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올라가고 그 가족은 내려가는 길이었다.
우리보다 일찍 온 그 가족이 먼저 일어서서 인사를 하고 우리가 온 길을 내려가는데 그 뒷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다. 나도 나중에 가족이 생기면 같이 꼭 오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휴식을 마치고 다시 출발했다. 출발 한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또 간격이 벌어졌다. 하시브가 제발 괜찮으니 먼저 가라고 했다. 내가 같이 가는 것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B.J. 에게 하시브를 맡기고 속도를 내서 갔다. 괜히 하시브에게 눈치를 준 것 같아 미안했다.
어느덧 고도가 더 높아져 구름 안으로 들어왔다. 구름이 안개가 되어 우리를 감쌌다. 안개에 젖지 않기 위해 입고 있던 얇은 옷 위에 바람막이를 하나 더 껴입었다.
경사도 더 가파르게 변했다. 고도와 경사 때문에 걷기가 힘들었다. 어깨에 배낭은 어깨를 더 짓눌렀다. 하지만 이 정도 고통은 익숙했다. 한국에서 천리행군할 때보다는 훨씬 덜 힘들었다.
그 고통도 얼마 가지 않아 끝이 났다. 마냥 캠프에 도착한 것이었다.
캠프라고는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텐트를 칠 수 있도록 다져진 넓은 공터와 수도를 대신해 시냇물을 끌어온 호스가 있는 캠핑장이었다.
우리는 각 조별로 자리를 배정받고 각자 텐트를 쳤다. 하시브가 도착하기 전에 나 혼자서 텐트를 완성했다.
텐트를 치면서 땅을 고르는데 한글로 쓰인 고등어 통조림 깡통을 발견했다. 오랜만에 한글을 봐서 반갑긴 했는데 마구 버린 쓰레기라니.
또 반대쪽에서 한 아시아인이 현지 가이드와 내려오기에 혹시나 싶어 한국 사람인지 물어봤다. 역시 한국사람이었다. 잠시 서서 대화를 나눴다. 오랜만에 한국어로 말하니 또 좋았다. 한 달 조금 지난 시점에 은근히 한국이 그리웠나 보다.
안개가 계속 껴있어서 쌀쌀했다. 샤워하기에는 추워서 간단히 씻고 옷을 더 껴입었다.
텐트에서 짐을 정리하는데 하시브가 도착했다. 곧이어 짐을 실은 당나귀와 지원 팀들이 도착했다.
모두 도와서 주방을 세우고 본부 텐트를 세웠다.
일이 모두 끝나고 다들 텐트로 들어갔다. 날씨가 좋지 않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별도 보이지 않았고 장작이 없어 불을 피우기도 어려웠다. 백인 친구들은 그렇게 열심히 하던 카드놀이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텐트에서 일찍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