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화 신고 지구 한 바퀴
2013년 봄 어느 날 밤. 나는 여자 친구에게 전화로 물었다.
“자기야. 나 콜롬비아 태권도 교관 파견 확정 됐는데, 우리 결혼하고 같이 갈래?”
오랫동안 망설일 거라는 내 예상과 다르게 여자 친구는 흔쾌히 대답했다.
“그래. 같이 가자. 그까짓 것 가지 뭐.”
그리고 두 달 뒤 우리는 결혼했다.
두 달 동안 결혼 준비와 출국준비를 같이 했다. 출국준비는 내가 결혼준비는 당시 여자 친구이자 지금의 아내가 했다. 두 달 동안 준비한 것 치고는 결혼식도 별 탈 없이 잘 치렀다.
그리고 그해 8월에 출국 했다.
콜롬비아는 남미에서 유일한 6.25 참전국이다. 그래서 군사적인 교류 협력이 많은 편이다. 그 다양한 군사 협력 가운데 하나가 콜롬비아 육군사관학교에 태권도 교관을 파견하는 것이다. 육군사관학교 생도들과 야전에서 선발되어온 인원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쳐 전 육군에 전파하는 것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는 사업이다. 또 태권도를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콜롬비아 군의 미래를 책임질 생도들에게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 친한(親韓) 인사로 만드는 게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중요한 군사 외교적 임무를 품고 콜롬비아로 갔다.
그런데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콜롬비아는 마약 카르텔과 살인청부로 대표되는 위험한 곳이었다. 그리고 파견당시에도 공산 게릴라들과의 내전이 진행 중 이었고 마약 카르텔들이 지방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사실 걱정되는 마음도 있었다. 나 혼자라면 어디서든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아내를 데리고 그렇게 위험하다는 곳에 가도 되는 걸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리고 남미라는 곳이 영화에서만 봤지 내 주변에서는 가본 사람을 찾기도 힘든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심리적 거리도 멀었고 정보를 찾기도 힘들었다.
아무튼 그렇게 첫 신혼살림을 지구 반대편 생면부지의 땅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 둘만 가는 것은 아니었다. 나보다 몇 년 선배인 강 소령님과 함께 선발되어 같이 파견되었는데 그분은 형수님과 딸 둘까지 동반했다. 둘 다 걱정이 많았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그나마 좀 위안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 믿고 의지해야 될 유일한 파트너였다.
출국은 했는데 여정이 만만치 않았다. 인천공항에서 출발, 미국 뉴욕에서 내려 12시간을 대기 했다가 비행기를 바꿔 타고 다시 달라스로 가서 거기서 다시 2시간을 대기 했다가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로 가야했다. 비행시간만 27시간 정도 걸리는 여정이었다.
인천에서 출발해서 한밤중에 뉴욕에 내렸는데 12시간동안 갈 데가 없었다. 지금 같으면 공항근처에 호텔을 예약해서 쉬고 왔을 텐데 첫 장거리 여행이라 그렇게까지 준비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항에서 노숙을 했다. 다행히 공항에는 우리 같은 노숙자들이 여럿 있었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준비해간 얇은 침낭을 깔고 아내와 누워 자던 그날 밤은 정말 평생 잊지 못할 밤이 되었다.
그래도 별 탈 없이 보고타에 도착했다.
우리를 위해 우리와 교대해야하는 전임 태권도 교관들과 주 콜롬비아 한국국방무관님이 공항에 나와 있었다. 우리를 마중 나온 한국 군인들을 보니 어찌나 마음이 놓이던지. 이제 됐다 싶은 마음에 긴장이 확 풀렸다.
나와 아내는 육군 장교호텔에 숙소를 잡았다. 하지만 장교호텔에 아이들은 숙박이 금지 된 관계로 강소령님 네 가족은 장교호텔 근처 민간 호텔에 숙소를 잡았다.
무관님과 전임자들은 우리를 숙소로 대려다 주고 우선은 잘 쉴 것을 당부하고 돌아갔다.
호텔방에 다시 아내와 나 단둘만 남자 전혀 외국에 와있는 것 같지 않았다. 한국 어느 호텔방에 있는 것 같았다. 아직 외국생활에 대한 현실감이 없었다.
우리는 총 20일간 장교호텔에 머무르며 전임자와의 인수인계, 육군사관학교 학교장 등 업무 파트너들과 회의, 주 콜롬비아 대사님을 비롯한 우리나라 여러 관계인들 방문 등 임무수행을 위한 준비일정을 소화 했다.
그리고 숙소가 배정되어 호텔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우리 첫 신혼집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우리가 살게 된 숙소는 보고타 북쪽에 위치한 국방타운에 있는 장교 아파트였다. 당시 나는 대위였지만 외국군에서 파견된 손님으로서 특별대우를 했는지 영관장교 아파트를 내 주었다. 그래서 집이 꽤 컸다. 방이 세 개에 화장실이 두 개였고 주방이 분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한국에는 없는 가사 도우미를 위한 방과 화장실이 주방 옆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총 방이 네게 화장실이 세 개에 거실과 주방이 따로 분리되어있는 구조였다. 단 둘이 살기에는 너무 컸다.
일단 이사는 들어 왔지만 당장에 살림살이가 하나도 없었다. 당장에 필요한 물품들은 대형마트에서 구매해서 들였고 가구는 일주일전에 배달을 예약해 놨었다. 다행히 침대는 제 날짜에 도착해서 자는 데는 무리가 없었는데 소파가 도착하지 않았다. 덕분에 넓은 거실이 휑했다. 식탁은 조립식 식탁을 구매해 직접 들고 와서 다행히 밥은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
첫 신혼살림이었지만 좋은 가구 예쁜 그릇은 살수 없었다. 2년만 살게 될 한시적인 집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취방 수준의 가구와 그릇으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결혼과 살림에 대한 로망이 있었을 아내에게 미안했다.
아무튼 이렇게 저렇게 생활을 안정시키고 본격적으로 태권도 교관으로서 임무도 시작할 수 있었다.
이사 이후에 보고타에서의 생활은 빠르게 안정됐다. 거기에는 무관님과 콜롬비아 육군 지휘참모대학에 위탁교육생으로 와 있던 구 소령님의 도움이 컸다. 특히 구 소령님은 내가 육군 정보학교 어학처에서 러시아어 교관으로 일할 때 스페인어 교관으로서 함께 일하던 인연이 있었고 강 선배님과는 대학교 선후배 사이였다. 세상 참 좁다 싶었다.
구 소령님은 유창한 스페인어 실력과 반년 먼저 생활한 경험을 바탕으로 보고타 생활의 이모저모를 알려 주었고 각종 증빙서류 발급과 행정업무를 처리해 주었다. 덕분에 모든 업무가 ‘비교적’ 원활히 진행되었다.
생활이 안정 되면서 여유도 조금씩 생겼다. 전에도 집 앞 노천 카페정도는 나가봤는데 그보다 멀리 나가 볼 여유는 없었다. 또 현지 사람들을 관찰하며 보고타를 경험할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도착한지 한 달이 넘자 길도 눈에 익고 사람들도 보이고 풍경도 보이기 시작했다.
보고타의 첫 인상은 익숙한 삭막함 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가 최근에 개발된 신도심이라 그런지 아파트 단지에서 조금만 나가도 높은 건물과 쇼핑상가가 있는데 그 모습이 여느 대도시에나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영화에서 보던 남미 풍경은 아니었다. 더구나 안전을 위해 큰길로만 다니다 보니 번잡하고 쾌쾌한 매연이 가득한 대도시의 모습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좀 지내다 보니 보고타의 속살들을 조금씩 들여다보게 되면서 나름의 재미를 느끼며 예쁘고 이국적인 풍경들을 볼 수 있었다.
우선 보고타는 큰 도로에서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소음이 사라지고 곳곳에 공원들이 나타나 주변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공원에는 잔디밭과 나무그늘이 마련되어 있어 점심시간을 맞은 직장인들이나 학교 끝난 학생들이 앉거나 누워서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특히 우리 아파트 근처에 있는 점보라는 대형 마트로 가는 길에 조그만 놀이터와 함께 천변 공원이 하나 있었는데, 이 공원을 가로 질러 마트에 가는 길이 나와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산책로였다. 이 공원은 주택가에 있어 조용하고 천변이라 더 시원하기도 하며 큰길가 이면 도로에 바로 접해 있어서 번잡함과 조용함의 반전을 더 극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또 집에서 20여분을 걸어서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93번가 공원이 있었는데 그곳 주변엔 고급식당들과 카페들이 있어서 특별한 약속이 있을 때나 외식을 할 때 자주 갔었다. 특히 그 곳은 보고타 사람들이 가족, 친구들끼리 자주 찾는 유명한 곳 이었는데 그렇다 보니 주말엔 각종 전시회나 기업 홍보 행사 같은 여러 이벤트들이 열려 아내와 나는 자주 찾아 다녔다.
그리고 우리 아파트에서 북쪽으로 20분을 올라가면 우사캔이라는 동네가 나왔는데 그 곳은 고급 단독주택들이 즐비한 부자 동네였다. 그래서 동네도 조용하고 안전했다. 또 일요일이면 풍물장이 섰는데 각종 콜롬비아 기념품과 가죽이나 목제 수공품, 그림, 도자기 같은 예술품, 소고기 바비큐나 옥수수 구이 같은 먹거리가 넘치는 흥미진진한 곳이었다. 물론 음악가, 댄서, 아크로바트 등 다양한 거리 공연자들도 넘쳤다. 일요일만 되면 한가하고 조용하던 고급 주택가가 한바탕 축제의 장이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 집 주변에도 좋은 곳이 많았지만 보고타 여기저기에는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명소들도 많았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은 소금 성당 이었다. 소금 성당은 사실 소금으로 만든 성당은 아니고 소금을 채굴하던 광산에 성당을 앉힌 것이다. 우리로 치면 석탄을 캐던 태백 탄광 안을 성당으로 꾸몄다고 생각하면 쉬울 것 같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 내부가 어마어마하게 넓고 암염으로 조각한 조각상들과 광산의 역사를 보여주는 기념물 같은 볼 것들이 오색의 조명들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특히 내가 갔을 때 실제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신부님의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광산에 울리면서 스스로 멋진 화음을 만들어 더 신비한 분위기를 냈다.
처음엔 소금을 바다의 염전에서 만드는 게 아니라 광산에서 캐낸다는 것부터가 신기했다. 그런데 나중에 여행하면서 보니 페루에서는 산에서 흐르는 물을 가두어 염전을 만들었고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은 사막에 모래대신 소금이 쌓여 있었다. 아마도 오래전에 남미 지역, 특히 안데스 산맥지역이 바다 속에 있다가 융기하면서 만들어져 땅속에 소금이 가득한 것 같았다.
하지만 콜롬비아 하면 역시 황금이다. 엘도라도의 전설이 시작된 곳이 바로 이곳 보고타라는 설이 있는데 보고타 교외의 구아타비타 호수가 그 증거 가운데 하나다. 이곳은 원주민들이 제례를 지내며 황금으로 만든 제물을 던지는 풍습이 있던 곳으로 스페인 정복자들이 호수의 한쪽 벽을 허물어 그 호수의 바닥에 가라앉은 황금을 훔쳐갔다고 한다.
그리고 보고타 구시가지 중심인 시청광장 근처에 가면 황금박물관이 있다. 그 곳에 가면 고대의 황금 유물들이 전시 되어 있는데 황금으로 만든 낚시 바늘부터 장신구, 그릇 등 생필품과 예술작품들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전시 되어 있다. 하지만 거창한 이름에는 좀 못 미치는 규모이다. 황금 박물관하면 커다란 금덩어리가 있고 금으로 만든 큰 조각상도 있고 할 것 같은데 그렇지는 않다. 아마도 크고 웅장한 것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다 가져간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보테로라는 화가의 그림을 모아놓은 보테로 미술관 이었다. 보테로는 콜롬비아가 낳은 세계적인 화가인데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보테로 그림의 특징은 모든 인물과 사물을 뚱뚱하고 동글동글하게 그렸다는 점이다. 그리고 따뜻한 색감과 순박하고 익살스러운 인물들의 표정이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그래서 누구라도 좋아할 만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보테로 미술관 자체도 스페인 풍의 오래된 주택 같은 건물을 전시관으로 쓰고 있어서 그런 인간적이고 따뜻한 느낌을 더 강하게 받았던 것 같다.
세계여행 프로그램들이 넘쳐나고 있는 요즘이지만 아직 콜롬비아에 대한 정보는 많이 부족한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교민들의 수가 1000명이 될까 말까하는 정도이다 보니 아직은 좀 멀게 느껴지기도 하고 비행기 직항도 없으며 유명한 관광지도 없어 관광업계의 관심을 못 받았을 것이다. 거기다 얼마 전까지 내전과 마약카르텔의 테러로 위험한 곳이라는 인식이 강해 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경험해 본 보고타, 그리고 콜롬비아는 충분히 여행해 볼 만한 곳이고 어느 여행가의 말처럼 남미 여러 나라들 가운데 가장 남미다운 나라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