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여름. 특전사에서 근무 중이던 나는 네팔 산악전 학교의 고고도 산악전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카트만두로 갔다.
그간 특전사에 있으면서 강하훈련을 위해 수없이 비행기를 탔지만 7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해외여행도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나가는 외국 여행길이 걱정돼 출국 전날 인천 공항에 사전 답사까지 갔었다.
공항에 내리면 네팔 담당자가 입국장에 나와 있을 거라고 네팔과 인도의 군사 외교 업무를 주관하시는 국방무관님이 알려 주셨다. 하지만 입국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입국할 때 어떤 절차를 치러야 하는지 잘 몰랐던 나는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런 걱정은 막상 도착하니 쓸데없는 걱정이 되었다.
카트만두 국제공항은 ‘국제공항’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너무나 소박했다. 여객 터미널 크기가 우리나라 중소도시의 고속버스 터미널만 했다. 비행기 활주로만 좀 컸을 뿐 여객 터미널을 포함한 입국장, 출국장 등의 시설은 정말 조촐했다.
뿐만 아니라 담당자가 나를 한눈에 알아봤다. 내가 비록 군복을 입고 있지는 않았지만 등에 맨 가방이 군용 가방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입국 심사를 기다리며 길게 늘어선 여행객들의 줄에 섞여 있었는데 어떤 양복 입은 말끔한 사람이 들어와서 박 대위가 이 아니냐고 물었다. 나도 단박에 그 사람이 내 교육 담당자인 라비 소령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그렇다고 했다.
그렇게 간단한 인사를 마치자 이 사람이 내 가방을 들더니 따라 나오란다. 아니 나는 아직 입국 심사를 위해 기다려야 하는데? 라비 중령은 내 여권을 달라고 하더니 본인이 직접 입국 심사장의 직원에게 던져주며 입국 도장을 받아줬다. 그리고 내 수화물 짐은 함께 온 운전병에게 맡기고는 성큼성큼 공항 밖으로 빠져나갔다.
아무리 군인 끗발이 센 나라라고는 하지만 공항 입국장 내부를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 것도 그렇고 입국 도장을 받아내는 것도 그렇고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라 나는 속으로 ‘대단하다’하며 그 뒤를 쫓아갔다.
공항 밖에는 군용 지프가 한 대 서 있었고 나는 그 지프에 올라탔다.
나는 네팔 고고도 산악전 과정에 참여하는 외국인들을 소집하기 위한 숙소에서 사흘을 머물며 다른 멤버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4일 뒤 산악전 학교가 있는 좀솜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를 태운 지프는 우선 카트만두 시내에 위치한 군부대 내의 숙소로 향했다.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이국의 풍경은 그야말로 생경했다. 차선도 없는 도로 위에 당나귀가 끄는 수레, 검은 연기를 내뿜는 오래된 차들, 릭샤, 오토바이 등 온갖 탈것들이 오가고 있었다. 가끔 길이라도 막힌다 싶으면 그 맨 앞엔 소들이 도로 한복판을 여유롭게 지나가고 있었고 사람들은 소가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예전에 한참 인도 여행 붐이 일었을 때 여행 책에서나 보던 풍경들이었다.
네팔은 방글라데시나 파키스탄과 함께 인도와 인접해 있으며 특히 힌두교 인구가 많아 경제 문화적으로 인도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그래서 비록 네팔이 석가모니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지만 큰 길가나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는 힌두 사원이나 힌두 기념물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도로에는 폐차 직전의 오래된 차들이 배기구에서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다녔는데 그 덕에 카트만두는 공기 질이 나쁘기로 늘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곳이다. 덕분에 나는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에어컨이 돌지 않는 군용 지프에 앉아 열린 차창으로 그 매연의 위력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나를 공항에서 맞이한 담당자 라비 소령은 앞으로 두 달간 우리 고고도 산악전 외국인 과정을 총괄하는 책임 교관이었다. 키는 165 정도로 작았지만 오뚝한 콧날과 날렵한 몸매에 무척 잘생긴 영화배우 같은 외모의 남자였다. 거기다 공항 직원들을 꼼짝 못 하게 하는 그 카리스마란.
숙소에 도착하자 먼저 와 있던 미 육군 레인저 소속 중위 매튜, 영국 육군 구르카 연대 소속 중위 톰과 인사했다. 매튜는 키가 183 정도에 덩치가 좋고 웃음기 띤 얼굴의 백인 청년이었고 톰은 170이 될까 말까 한 작은 키에 곱슬머리, 얼굴엔 홍조를 띤 전형적인 영국 백인 청년이었다.
들어서는 입구 로비에서 인사를 마치고 2층 내 방으로 올라갔다. 숙소는 네팔 육군의 교육사령부 내에 있는 장교 숙소 건물이었는데 그중 내방은 2층에 있었고 침대 두 개에 화장실이 하나 딸린 방이었다. 라비 소령은 식사시간과 대강의 생활 방법에 대해 알려 주었고 사흘 뒤에 산악 과정을 진행할 산악전 학교로 이동할 테니 그간 편히 지내라고 했다.
라비 소령이 나가고 나서 혼자 짐을 풀고 잠시 침대에 누워 여독을 풀었다.
저녁 식사시간이 돼서 식당에 내려갔다.
식사는 네팔 취사병들이 준비해 주었는데 병사라고는 하지만 모두 직업 군인들로 나이가 한참 많아 보였다.
음식은 모두 네팔 현지 음식들이었다. 인도식 카레와 삶은 야채들 네팔식 납작한 빵과 닭고기 요리, 과일 주스와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식사를 하는 사람은 매튜, 톰, 그리고 나 세 명뿐이었는데 음식은 6~7인분 정도 되어 보였다.
준비해 주어 고맙다고 하고는 음식을 먹는데 취사병들이 옆에 서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왠지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말은 못 하고 그냥 먹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식사 시중을 들기 위해 서 있는 것이었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더 갖다 달라고 하거나 다 먹고 나면 바로 식기를 바로 치우고 차를 준비해 주는 등의 일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우리가 식사를 마치고 나면 남은 음식을 그들이 저녁으로 먹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군생할 하면서는 우선 장교 식당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도 않고 전 부대원이 대부분 간부로 구성된 특전사에서는 식판에 자기 밥 자기가 떠다가 먹고 그 식판도 내손으로 닦는 게 당연했던 차라 그런 대접이 어색하기만 했다.
나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던 게 장교식당에서 식사하는 것이 익숙하기도 하고 이곳에 이틀을 더 있었다는 매튜와 톰도 시중을 들기 위해 서있는 네팔 병사들을 어색해 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좀 다행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저녁시간이 무료하던 차에 매튜와 톰이 당구를 치러 옆 건물로 간다기에 따라나섰다. 그런데 곧 나만 다시 돌아와야 했다.
날도 덥고 저녁시간이라 한국에서 하던 대로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나갔다. 당구장엔 당연히 반바지에 슬리퍼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갔던 곳은 장교 클럽 내에 있는 당구장이었고 거기에서 네팔 장교에게서 복장 지적을 받았다. 장교클럽에 반바지 슬리퍼는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나는 몰랐다고,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장교클럽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장교 클럽이라는 것을 외국 영화에서나 봤지 내가 직접 가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해봤던 차라 좀 당황스럽기도 하고 내가 외국에 오긴 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앞으로 좀 조심해야겠다는 반성도 하게 되었다.
그래도 기왕 나온 걸음에 그냥 방으로 가기는 그래서 숙소 로비에 있는 바에 들러 위스키 몇 잔을 마시고 방으로 돌아왔다.
덜 풀린 여독과 술기운에 졸음이 몰려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생애 처음으로 외국에서 맞는 밤이었다.
아침 여섯 시에 눈을 떴다.
병영생활이 몸에 배어서 일찍 일어난 게 아니라 네팔 병사들의 점호하는 소리 때문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나라든 병영의 아침 풍경은 비슷한 것 같다.
아침 먹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 침대에서 뭉그적거리고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렸다. 아침 일찍 누군가 싶어 문을 열었는데 식사를 돕던 네팔 병사가 한 손에 찻잔을, 한 손엔 수건 같은 것을 들고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물으려는데 다짜고짜 방으로 들어오더니 찻잔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찻잔을 엉겁결에 받아 들었고 병사는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더니 청소를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즉, 영국 식민지였던 네팔, 인도, 파키스탄 등등 이 지역 국가들은 식민지 시절 영국군의 영향이 남아있어 장교에 대한 대우가 극진하다. 그래서 장교 숙소에서는 아침에 잠을 깨우러 오는 병사들이 따뜻한 홍차와 함께 방 청소까지 해주는 것이었다.
잠도 덜 깬 비몽사몽간에 극진한 대접까지 받으며 일찍 일어난 나는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 방청소까지 하려고 하는 병사를 내보냈다. 한국에서 받아보지 못한 대접이 영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아침 식사 시간이 되어 식사를 하러 내려갔다.
다시 세 명을 위한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고 간단히 식사를 마쳤다.
아침 식사 후에는 자유 시간이었다.
나는 혼자서 시내 구경을 나가기로 하고 준비했다.
방에서 한참 준비를 하고 있는데 170 정도의 키에 이 지역 사람처럼 보이는 남자가 짐을 들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방글라데시 육군 코만도 대대 소속 하시브 소령이었다.
하시브 소령은 나보다 상급자 이긴 했지만 동갑내기에 성격이 밝고 유쾌한 남자였다. 우리는 이때 방을 같이 쓰게 된 인연으로 교육기간 내내 같은 조원으로 붙어 다니게 된다.
우리는 서로 각자 소개를 하고 인사했다. 하시브가 상급자였으므로 내가 경례를 올렸고 하시브가 받았다.
짐 정리를 하는 하시브를 방에 남겨두고 나는 부대를 나왔다. 아직 스마트 폰이 나오기 전이라 한 손엔 영어판 론리플래닛을 들고 허리에는 힙색을 두르고 나갔다.
다행히 부대가 시내에 있었고 중심가가 멀지 않았다. 그래서 걷기로 했다.
부대 밖에서 처음 만난 풍경은 부대로 올 때 보았던 큰길과 도로, 그 위를 가득 매운 차들, 사람들, 릭샤들이었다.
그 옆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는데 목이 따끔거렸다.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의 매연이었다. 길거리를 가득 매운 고물차들과 그 배기구에서 뿜어 나오는 검은 연기는 보기만 해도 목이 간질간질할 참인데 그걸 그대로 마시고 있었으니 따끔거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큰길을 포기하고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골목길의 풍경은 또 달랐다. 다소 한산하고 건물들에 해가 가려져 그늘도 있었다. 그리고 그 그늘 아래에는 구두 닦는 사람, 길에 누워 자는 사람, 그냥 앉아 있는 사람 등 그냥 보기에도 빈곤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들이 길을 따라 앉고 눕고 서있었다. 큰길에서는 최악의 공기 오염을 경험했다면 골목길에서는 최고의 빈곤을 경험할 수 있었다. 다들 한참 일하거나 공부해야 할 평일 낮 시간이었는데 건실한 직장이 없어 이렇게들 시간을 보내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골목길을 따라 시장과 왕궁을 둘러볼 수 있는 지역까지 왔다.
2001년 디펜드라 왕세자가 왕과 왕비였던 부모 등 본인의 가족들을 몰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참극을 이후로 2008년 문을 닫은 왕정. 네팔 국민들의 신망을 받던 왕가가 하룻밤의 참극으로 돌이킬 수 없는 쇠락의 길을 걸은 후 왕정이 종식될 때까지 사용되던 카트만두의 나라얀히티 궁전은 아직 그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지만 그 주변을 옛 왕궁 수비대의 복장과 무기로 무장을 한 군인과 현재 네팔 육군의 군복과 무기로 무장을 한 군인이 함께 지키고 있었다.
또 주변은 엄청나게 번잡했다. 관광객들이 많은 만큼 그들을 상대로 하는 잡상인들과 기념품 상인들로 북적였다. 거기다 힌두교 성물, 조각상 등이 여러 곳 있어 기도하는 사람들로 넘쳐 났다. 그리고 비둘기, 엄청난 숫자의 비둘기들이 마지막 번잡함의 끝을 장식했다.
어느 나라, 어느 도시나 처음 비행기, 버스에서 내리면 공기에서 나는 냄새가 다르다. 내가 민감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온갖 다양한 것들이 섞여 그 지역만의 특색 있는 냄새가 나는데 처음 카트만두에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왕궁 근처 시내와 주변 시장에서 그 냄새의 출처를 알 수 있었다.
첫 번째 출처는 향이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시내 이곳저곳에 힌두교 성상과 성물들이 있어 그곳마다 기도하고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마다 그곳에 향을 피워 대니 그 주변은 향 연기가 자욱하고 냄새가 진동했다.
그리고 두 번째 출처는 향신료였다. 왕궁을 둘러보고 인근 시장에 들어서니 여기저기 온갖 향신료 가게들이 많았다. 아마 캐시미어 천을 파는 가게만큼 향신료 가게도 많았던 것 같다. 그 가게들마다 온갖 종류의 카레와 큐민, 고추, 후추, 고수, 정향, 샤프란 등 수 만 가지의 향신료들을 팔고 있어서 근처에만 가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이 두 가지와 매연이 어우러진 냄새 그것이 카트만두의 냄새였다.
시장을 둘러보다 보니 점심때가 되었다. 배낭 여행자들이 모이는 타멜 지역에 가면 외국인들을 위한 깔끔한 유럽식 식당들이 있었지만 나는 현지 주민들이 다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간 어느 2층 건물의 식당. 나는 영어로 된 메뉴판을 받아 들고 돼지고기 볶음밥을 시켰다. 우선 음료로 시킨 스프라이트가 한 병 나왔고 더운 날씨에 고생하던 차라 한 잔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내부를 찬찬히 살펴봤다.
일하는 종업원은 홀에 두 명, 주방에 세 명이었다. 주방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이가 좀 들어 보였지만 홀에서 일하는 두 명은 아직 앳된 청년들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2 정도 되어 보였다. 한참 공부할 나이로 보였지만 공부보다는 생계가 우선인 모양이었다. 겉으로만 보고 남의 인생을 함부로 예단할 건 아니지만 한때 우리 부모님 세대들 아니 당장 내 부모님들도 그 나이에 생계를 위해 일했던 생각이 나서 짠한 마음이 들었다.
음식이 나왔고 맛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내가 원체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익숙한 맛이기도 했다.
식사를 마치고 좀 더 네팔 사람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주택가로 들어가 봤다.
옥상에서 빨래 너는 아주머니, 골목길에서 공을 차는 꼬마들, 그늘에서 앉아 노닥거리는 할머니들,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골목길 풍경과 비슷했다. 사람 사는 것은 다 거기서 거기라던 외할머니 말씀이 떠올랐다.
그리고 한참을 걷다가 발견한 태권도 도장. 아직 문이 닫혀있어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지만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를 수련해 이미 6단을 보유하고 있던 차라 외국의 후미진 주택가에서 태권도 도장을 발견했을 때의 반가움은 삼성이나 현대 같은 우리 기업들의 간판을 보게 되었을 때 보다 더 컸다.
나는 태권도 도장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걷다가 또 한 번 아쉬움을 맛보게 되었다. 걷는 도중 구르카 부대를 지나게 된 것이다.
밀리터리 마니아들은 잘 알겠지만 군사 분야에서 네팔 하면 제일 유명한 이들이 구르카 용병이다. 구르카 부대는 네팔 산악 부족인 구르카 부족에서만 뽑아 영국의 특수부대로 활용되는 부대인데 그 용맹함이 넘쳐 포틀랜드 전쟁 때는 이들이 투입된다는 소문만 듣고도 아르헨티나 군인들이 도망갔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이다.
앞서 만난 영국 친구 톰이 소속된 구르카 연대도 바로 이 구르카 용병들로 이루어진 부대인데 그 부대를 우연히 걷는 도중에 지나게 되었다. 아쉽게도 내부는 들여다보지 못했지만 전설과 소문의 주인공들을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흥분되기는 했다.
더불어 네팔에서 가장 인기 있는 기념품들 중에 하나가 이 구르카 용병들이 쓰는 쿠크리라는 단검인데 네팔 시내 중심가 이곳저곳에 이 쿠크리 단검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들이 많다. 쿠크리 단검은 무게 중심이 날 끝 쪽에 몰려 있으면서 부메랑처럼 칼날이 앞으로 굽은 형태인데 이 두 가지 형태적 특징이 내리 쳤을 때의 파괴력을 배가 시켜 칼인 듯, 낫인 듯, 도끼인 듯 성능을 발휘한다. 구르카 용병들이 휴대하고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의 오금을 저리게 한 명성으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쿠크리 단검이 구르카 용병들의 전유물은 아니고 네팔, 인도, 파키스탄 군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평소 짧은 나이프 종류를 수집하는 나에게는 당연히 들러봐야 할 곳 이어서 여러 군데를 들러 구경했다. 각 매장에는 기념품으로 쓸 만한 손가락 크기의 작은 것부터 제례 의식 때 제물로 바치는 동물들의 목을 자르는 용도로 쓰이는 어른 키만 한 것 까지 다양한 크기와 다양한 외양의 단검, 장검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당장에 가장 멋지고 좋은 것을 사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12센티미터 이상의 것들은 국내 반입이 되지 않아 구매할 수 없었고 작은 것들은 쿠크리 단검 특유의 힘과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아 비싸게 구입할 만큼 가치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참 돌아다니다가 주택가 어귀에서 구멍가게에 들러 음료수 하나를 샀다. 초등학생 같아 보이는 꼬마가 가게를 보고 있었다. 공부를 착실히 하는 친구 인지 영어를 꽤 잘했다. 영국 식민지였던 탓에 다들 영어를 조금씩은 하는데 학교에서 수업도 잘 들었나 보다. 그 꼬마랑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구멍가게 앞에 서서 음료수를 다 마시고 다시 걸었다.
시내 중심가와 조금 떨어진 주택가, 그리고 외국인 관광객들을 위한 상점이 아닌 현지 주민들을 위한 상가들을 지나며, 버스를 기다리는 대학생, 휴대전화로 통화하며 바쁘게 걸어가는 직장인, 상점 앞에서 호객하는 상인, 그 주위를 누비며 날품을 파는 10대들까지 여러 모습의 현지인들을 보았다. 비록 외모가 남루하고 다니는 차들이 오래되었지만 생활인들의 활력과 학생들의 젊음 등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느낌은 우리나라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길거리 풍경 중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나라보다 동물이 많다는 정도? 무슨 말인고 하니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당나귀나 말이 끄는 마차가 도로에 다니거나 소가 길을 막고 있는 것은 예사고 피부병 걸린 개들, 담장을 넘나드는 고양이들, 어디서든 날아오는 비둘기들, 심지어 닭도 있었다. 도심 한복판 큰 길가에 닭장을 만들어 내놓고 닭을 놓아기르는 집이 있는 것이다. 이러니 도심지에서 기껏 비둘기나 개, 고양이 정도를 볼 수 있는 우리나라에 비하면 도로 위에 종의 다양성이 두세 배는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네팔 사람들의 세계를 조금 들여다보다가 외국인 관광객들이 모이는 타멜거리로 갔다. 유럽인들과 동아시아인들이 보이니 뭔가 마음이 편해졌다. 네팔 사람들 틈에 있을 때는 여지없이 이방인이었는데 이방인 들 틈에 끼게 되니 동류의식을 느꼈었던 것 같다.
관광객들이 모이는 지역에 오니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히말라야를 오르려는 사람들 덕분에 많은 등산 용품점들이 있었고 수입 식품점들과 호텔, 유럽식 술집, 음식점들이 즐비했다.
나는 한 호스텔에서 운영하는 카페에 앉아 레모네이드 한잔을 마시며 한나절 동안 찍은 사진들을 고르고 첫 여행의 여운을 즐겼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생각하면 처음으로 하는 외국 여행을 중급 이상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네팔에서 그것도 혼자 걸어 다녔으니 몰라서 더 용감하고 그래서 더 재미있었던 것 같다.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다른 인종의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흥미로운 풍경에 매료되어 하루 종일 걷던 그날의 풍경, 기분, 냄새까지 기억나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한 시간 정도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일어나 부대로 복귀했다. 복귀할 때는 자전거 뒤에 수레를 이은 릭샤를 탔다. 하루 종일 걸었던 거리를 20분 만에 돌아왔다. 릭샤를 끌던 아이는 열서너 살쯤 되어 보였다. 약속한 돈 보다 조금 더 얹어 줬다.
부대에 돌아오니 미 해병대에서 덩치 큰 백인 중사 둘과 레인저에서 상사 한 명이 도착해 있었다. 영화에서 보던 미 해병과 레인저처럼 생겼었다. 서로 자기소개를 하고 차를 한잔 마셨다. 해병대 둘은 미 해병대 산악 학교 교관이라고 했다. 고수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나도 특전사에 있으면서 기초적인 산악 훈련 경험은 있었지만 전문 과정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미 그런 전문 과정을 마친 교관들이 오다니. 일등은 물 건너갔구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