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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상 Oct 15. 2020

사슴고기 스튜의 진실 (2)

아일랜드 농장일꾼

< 지난글의 끝맺음 > 

맙소사. 진짜 사냥해서 잡은 사슴으로 이 스튜를 끓인거라고? 이 정도로 날 것의 우핑을 기대하진 않았는데. 우리 셋은 저마다 생각이 많은 눈을 하고선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따뜻한 스튜를 한 숟갈 뜰 즈음 탕- 하고 총소리가 울렸다.




동물을 정말 사랑하는 스테파니



나는 충격받은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스푼을 떨어뜨렸다. 이미 입 안에 들어있던 사슴고기가 까끌까끌하게 느껴졌고 머릿 속에는 총소리가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그래서 탕- 하는 소리가 실제로 두 번 이었는지, 네 번 이었는지 이제는 정말 모르겠다. 확실한 건, 다음날 헛간 안에 새로운 숫사슴 사체가 걸려있었다는 점이다. 마이크는 본인이 생각해도 사슴 피로 물든 리아와 스테파니에게 미안했는지 또 한 번 사체를 옮기라는 임무는 주지 않았다. 참 다행이다. 하지만 새로운 사슴 사체와 나는 이후에 격렬한 재회를 하게된다.


그렇다. 마이크의 집에 와서 들은 사슴고기 이야기는 전부 진실이었다. 한국에 고라니가 있다면(우어어어엉) 아일랜드는 사슴이 있다고 한다. 특히 가을이 다가오면 개체수가 너무 많아서 농작물 피해는 물론 사람들이 사는 집 앞 까지 찾아와 텃밭을 망가뜨리기 일수이다. 그치만 사슴을 잡아서 먹는 경우는 절대로 흔치 않다고 한다. 그 말은 마이크가 참 독특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왜 나는 계속해서 평범하지 않은 농장 주인들을 만나는걸까. 아일랜드 사람들은 모두 이런걸까. 이 농장에서 빠르게 탈출해야 하는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마이크의 집을 떠난 스테파니가 보내온 사진


늦은 저녁, 스테파니가 마이크의 농장을 떠났다. 그녀는 이제 우핑을 마치고 북아이랜드를 여행한 뒤에 다시 독일로 돌아간다고 했다. 첫번째 우핑하우스에서 마이크보다 더 별난 농장 주인을 만나 함께 동고동락했던 나의 독일인 친구. 그 때 이별하면서 다시는 못 볼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만났고, 두 번째 이별을 했다. 우리의 두번째 이별은 조금 더 덤덤했고 그만큼 애틋했다. 스테파니가 떠나자 나는 무척이나 외로움을 느꼈고 리아는 세심하게 내 감정을 알아봐주었다.


단 한번도 영국땅을 벗어난 적 없다는 리아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완벽한 영국 사람이다. 웃지 않을 때엔 다소 딱딱해 보이는 표정과 어두운 색감의 옷, 그리고 멋들어진 런던식 발음까지. 디지털 기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며 책과 노트를 늘 들고다니는 친-아날로그 사람이다. 그녀는 능숙하게 홍차를 끓여 내게 건냈다. 그녀가 처음 만난 친구를 위로하는 방식은 따뜻한 홍차였다.


영국과 아일랜드 사람들이 홍차를 대하는 태도는 정말 근사하다. 찻잔과 받침, 티스푼을 준비해두고 예쁜 컵에 우유를 가득 따라서 옆에 둔다. 갈색 설탕도 늘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물이 끓으면 살짝 식을 때 까지 기다렸다가 찻잔에 따라주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한국에서 소주를 따르는 것 처럼 절도있다. 나중에 물어보니, 찻잔에 물을 따를 때 튀지 않도록 정갈하게 따르는 것이 예의라고 했다. 그래서 윗사람과 차를 마실 때 다들 주전자를 들고 손을 떨지 않으려 애쓴다고 한다. 한국은 다도문화보다 음주문화가 친숙해서 그런지, 술을 따르는 모습이 겹쳐보였다. 좀 더 근사한 주도같다.


잘 시간이 되었을 때, 터미널까지 스테파니를 데려다 주고 온 마이크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 사냥총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와 리아는 눈빛을 교환했다. 우리는 아주 짧은 시간만에 동지애를 느끼고 있었다. 마이크는 굉장히 말 수가 적은 사람이었는데(그런 줄 알았다) 성큼성큼 걸어와서 차를 한 잔 따라 마시더니 우리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워보이곤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마이크의 엄지를 오늘 세상을 떠난 사슴에게 전달했다. 다시는 이런식으로 만나지 말자, 사슴아.






사슴 사체의 공격만 없다면 너무나 평화로운 마이크의 집


리아와 나는 언제 도래할 지 모르는 사슴 사체의 습격에 대비하면서 빠르게 친해졌다. 장작을 패면서 함께 노동요를 흥얼거리거나 시덥잖은 농담을 하는 등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졌지만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사슴을 잊지 않았다. 특히나 저녁 무렵 마이크가 현관에서 무언가 하고 있으면 그의 주의를 흐트리기 위해 아무 말이라도 걸었다. 어쩌다가 대화는 요리에 대해 흘러갔다. 김밥과 샌드위치를 사랑하는 나에게 요리란 미지의 영역이다. 심지어 궁금한 영역도 아니다. 요리를 하느니 설거지를 하겠다는게 지금까지의 나였다. 그치만 마이크가 또 다시 사냥하러 나가는 것을 막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내가 한국 요리를 해줄게!
그리고 아일랜드 요리도 배우고 싶어!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마이크와 리아가 처음으로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부터 영국 사람(..) 리아의 지옥맛 요리 훈련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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