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識 (알 지, 알 식)
어떤 책은 문장 하나하나에 내 감정을 울리는 힘이 있어서 책이 끝나는 것이 아까워 조금씩 아껴 읽게 된다. 최근에는 김하나 작가님이 쓴 글들을 그렇게 읽고 있다. 처음 김하나 작가님을 알게 된 것은 <여자 둘이 살고있습니다>라는 책이었다. W2C2(여자 둘과 고양이 둘을 화학식으로 재치있게 표현함)라는 용어라던가 어떤 순간에 내가 했던 생각인데 그 책에는 증발되지 않고 고스란히 한글로 적여있는 점들이 유쾌하고 감동적이다. 그래서 두 저자의 트위터 계정을 팔로우하고 그들이 이번에는 또 어떤 재미난 일들을 하는지 보며 흠모해왔다.
올해 여름, 김하나 작가가 <말하기를 말하기>라는 책을 펴냈다. 저자 소개도 얼마나 재치있던지, 작가님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한 개의 직업명사로 대체하지 않고 술술 써내려간 점이 정말 멋있다. 이렇게 책 제목과 저자 소개부터 재미있는데 어떻게 읽지 않을 수가 있나. 그래서 이 책은 명실공히 "2020년 내가 가장 아끼는 책"으로 선정되었다. 김하나 작가님, 축하드립니다!
"말하기"라는 주제를 여러 일상 에피소드와 생각으로 엮어낸 글인데 소제목들도 하나하나 뜻이 깊다. 가수 덕질을 할 때 내 가수의 앨범에 실려있는 곡 중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노래가 너무 좋아서 팬들끼리 알고 있는 명곡들이 있다. 그 중에도 명곡으로 가득찬 앨범은 명반으로 알려지는데 이 책이 딱 그런 느낌이다. 모든 챕터가 제목부터 끝맺음까지 두 번, 세 번 읽어도 머리를 탁 치는 시원함을 준다.
그 중 책의 마지막 부분에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라는 챕터가 있다. 여기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등장하는데 너무 반가워서 따로 표기를 해두었을 정도이다. 나름 과학도의 정체성을 가진 기간이 십년에 가까운데 말하기에 대한 글을 읽다가 어린시절에 동경했던 과학자 이름을 보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는 중학교 때 과학 교과 중에서도 천체가 가장 좋았다. 커다랗고 멀리있는 것들을 누군가 연구해서 현상을 설명한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나는 달의 공전에 대해 배운 뒤 달의 모양을 보고 음력 날짜를 따져보는 습관이 생겨 아직도 종종 '오늘은 대충 음력 7~8일 정도네' 라고 생각한다. 좀 더 거슬러 내려가면 초등학교 때 <지구는 왜?>, <우주는 왜?>라는 "왜?" 시리즈를 너무 좋아해서 책이 너덜너덜해 질 때 까지 읽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을 해서는 본격적인 수학과 과도한 학습량에 지쳐 과학과 다소 낯을 가렸지만(낯을 가리면 안되는 학교였는데!) 그 때에도 지구과학 시간에 틀어주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보고 감동하곤 했다. 문제는 칼 세이건의 목소리와 어투가 너무 좋아서 졸렸다는 점이다. 한창 많이 먹고, 많이 자야 할 나이에 많이 먹기만 하고 잠은 잘 자지 못해서 칼 세이건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두 시간을 꽉 채워 자기도 했었다. 작가님이 말하는 그 멋진 말하기가 지친 고등학생들에게는 훌륭한 ASMR 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대학생이 되었고 나는 천문학과 거리가 먼 과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왜 시험기간에는 항상 시험 공부 빼고 모든 게 재미있는지. 시험 공부를 하려고 도서관에 가면 고개를 직각으로 꺾고 졸기 일수였다. 그래서 스트레칭도 하고 주의도 환기할 겸 도서관 2층으로 내려가 교양도서 책장을 돌며 "딴 짓"을 했다. 그 때 내 눈을 사로잡은 책이 바로 <코스모스>였다. 고등학교 생각도 나고, 시험 공부는 더 하기 싫어서 그 두꺼운 책을 시험기간에 다 읽어버렸다. 시험 결과가 안 좋았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아마 코스모스를 읽지 않았다고 해도 더 좋았을 리가 없다) 마치 처음 글을 읽는 사람처럼 문장 하나하나가 충격적이었다.
사람이 지식을 전달할 때에도 이렇게 근사할 수 있구나. 분명 국어 시간에 배운 설명문의 특성엔 "문체가 딱딱하다"가 있었는데 잘 못 된 설명이다. 지식을 두꺼운 책으로 전달하면서도 노래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스모스>는 내가 좋아하는 과학지식과 추구하는 예술적 소양을 모두 훌륭하게 소화하는 책이다. 감히 내 책장에서 먼지만 뽀얗게 앉게 둘 수 없는 그런 글로 가득하다.
이렇게 훌륭한 컨텐츠를 ASMR로 들으며 숙면했던 사람으로서 해야할 일이 있다. 나는 이 시대의 <코스모스>를 펴내는 데에 일조하고 싶다. 지금은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해서 정의를 내리거나 바꿀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다양한 사람들이란 다수의 사람이 아닌, 다양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긴 역사 기간 내내 지식의 보급은 권력을 가진 소수 남성들만의 특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핵심 권력층에서 멀리 벗어나 있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상황이 왔다. 우리가 기존의 지식 생태계를 답습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정말 다르게 변해갈 것이다.
"목소리를 냅시다"는 김하나 작가님의 저서 <말하기를 말하기>의 마지막 챕터 소제목이다. 정말이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형광펜으로 도배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이렇게 멋진 책이 2020년에 발간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그 안에서 저마다의 목소리를 찾으면 좋겠다. 나와 함께 재밌고 훌륭한 ASMR을 집필할 사람을 찾고싶으니까.